제1화
서장
흙은 기름지고, 물은 청명하며.
땅은 호리병 모양으로, 뭇 산들의 영기가 한데 고이니.
실로 하늘이 내린 길지로다!
어느 도인이 ‘백리세가’를 보고 감탄하며 한 말이었다.
그 덕분일까.
무인들은 용과 범처럼 용맹했고, 풍요로운 땅은 황금빛 곡식으로 가득하니.
인근 십여 개 현(縣)을 지배하는 패자로 거듭났다.
쿠구궁.
천금처럼 무겁다는 가주전의 문이 오랜만에 열렸다.
수많은 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바로 오늘이로군.”
“무려 오 년을 기다렸네. 드디어 뜻을 펼칠 수 있겠군.”
“노가주님께서 젊은 용봉들을 어찌 쓰실지 궁금하군.”
기대감 가득한 말들로 가득했다.
입신식(立身式).
백리세가에서는 오 년에 한 번 직계들에게 정식 직위를 내리는데,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모두 정숙하시오. 가주님의 전언이오!”
중년의 총관이 나타나서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병환이 위중하시다더니. 직접 모습을 드러내시지도 못하실 줄이야.”
“이번 인사는 특히 의미가 깊겠어.”
사람들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무공에 큰 성취를 이룬 비호부대주를 대주에 임명한다. 빈민 구제에 공을 세운 재물각주에게는 장로의 직을 제수하며….”
총관은 먼저 공로가 큰 인물들의 승진을 발표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사는 그들이 아니었다.
“사실상 후계전이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지. 이번에 가주님이 혈육 중 누굴 눈여겨보는지 드러나겠지.”
가주는 늙었고, 자식들은 요절하였으니.
손자, 손녀 중에서 차기 가주가 나올 터였다.
기나긴 발표 끝에 마침내 기다리던 이름이 들려왔다.
“…이번에 한하여, 백리 성을 쓰는 자들에게 더 큰 기회를 주리니. 첫째 공자 백리무혁을 진천대주로 임명한다.”
“…아아아!”
“크하하!”
곳곳에서 탄식과 탄성이 이어졌다.
“맙소사, 진천대라니! 무력 부대 중에서도 수위에 드는 곳이 아닌가? 너무 과하신 게 아닐지.”
“과하기는. 장손이시고, 뛰어난 무인이시니 마땅히 받아야 할 자리일세.”
“역시 가주님께서는 첫째 공자를 마음에 두신 게야.”
세가인들은 흥분해서 갑론을박을 벌였다.
“둘째 공자 백리은혁은 천염상단의 행수에 봉한다.”
“오오오!”
나지막하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천염상단은 소금과 차를 다루는, 세가의 핵심 사업체였다.
“이것도 커, 아주 큰 자리야.”
“확실히 어느 쪽도 만만치 않군.”
젊은이들에게 무력대와 상단을 바로 맡기다니?
생각보다 파격적인 인사였다.
“가소롭구나.”
“흥.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
범처럼 덩치 큰 청년과 냉막한 얼굴의 청년이 서로 노려보았다.
후계 다툼의 시작을 암시하는 듯한 모습에, 사람들이 눈을 빛냈다.
그 이후 많은 손자, 손녀들이 다양한 지위를 받았다.
누구는 지부장, 누구는 표국, 누구는 광산.
하나같이 중요한 자리였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이 남았다.
노가주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청년.
하지만 외가가 변변치 않아 세력도 없고, 무공도 익히지 않은 학사였다.
꿀꺽.
과연…?
초미의 관심 속에서 총관이 마지막 발표를 했다.
“…막내 공자 백리유운은 만서각주에 임명한다.”
처음에는 모두가 잘못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총관의 엄숙한 표정에서 실수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마, 만서각주?”
“서, 설마 먼지만 풀풀 날리는 그 책 창고?”
은퇴하는 늙은 무인에게나 주어지는 자리.
권력, 무력, 재력 그 어느 것과도 거리가 먼 한직이었다.
“으하하. 그럴 줄 알았어. 노가주님께서도 결국 무인이신 게지.”
“책이나 읽는 학사 나부랭이에게 중요한 자리를 주실 리 없지.”
사람들은 젊은, 아니 아직은 어린 청년을 곁눈질하며 비웃었다.
그렇게 오 년 만의 입신식은 끝이 났다.
* * *
“가, 가주님께서 공자님께 이러실 리 없습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분명합니다!”
늙은 하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외쳤다.
“아닙니다. 제게 딱 맞는 자리입니다.”
학사복을 입은 젊은 청년, 백리유운이 빙그레 웃었다.
눈빛은 맑고, 웃음은 싱그러웠다.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세가 내에서 공자님의 지혜를 모르는 이가 없는데.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되돌려야….”
“장 노야, 우리가 어떤 가문입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노복, 장일의 말문이 막혔다.
웅풍백리, 혹은 숭정백리 같은 가문의 구호를 묻는 것은 아닐 터였다.
“아시다시피, 우리 가문은 본래 무학사로 시작하였습니다.”
“…아.”
무학사(武學士).
학사 중에서 무공을 이론적으로 파고드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모든 무공을 기록하고, 이해하고, 분석하라.
그리하면 무(武)의 끝에 도달하리니.
백리세가의 시조는 초식과 내공을 연구하다가 마침내 독문 무공을 만들어냈다.
“가문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유운은 서고 가득한 책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책과 무공이야말로 위대한 백리세가의 근본.
유운의 눈에는 한 점의 부끄러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고, 공자님.”
장노는 차마 말리지 못하고, 안타까워했다.
병법, 산술, 지리, 역학….
하늘에 이를 지혜가 있으면 뭐 하는가? 발휘할 기회가 없는데.
“장 노야가 걱정하던 위협에서 가장 거리가 먼 곳이기도 하고요.”
“…아!”
장노가 얼굴을 펴며 탄성을 터트렸다.
백리세가가 공명정대한 가풍으로 유명하다 한들, 그것은 바깥의 일.
앞으로 다가올 후계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누구도 모른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이보다 더 좋은 자리는 없습니다.”
“노가주님의 깊은 뜻을 몰라봤습니다.”
장노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힘없는 막내 공자에게 이만큼 안전한 곳은 없었다.
“공자님이 어른이 되신 걸, 저만 몰랐던 듯싶습니다.”
유운의 나이는 어리지만, 말투도 목소리도 노년의 학사처럼 농익었다.
“하하하, 애늙은이라는 말을 기분 좋게도 하십니다.”
“허허허, 이거 제 본심을 들켜버렸군요.”
두 노소는 눈을 마주치며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만서각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어휴. 먼지 좀 봐. 백만 년은 묵은 것 같네. 서고째로 탈탈 털어야겠어요.”
키 작고 통통한 소녀가 먼지떨이를 양손에 들고 말했다.
전속 시비, 소화였다.
“같이 하자구나.”
“어찌 감히 그러겠어요.”
소화가 두 손을 휘저으며 말렸지만, 유운은 같이 먼지떨이를 들었다.
“이래 봬도 가문이 수백 년 동안 모아온 책들로 가득한 곳이다.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양이 아니야.”
원래도 관심 밖이라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거기다 재무각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인력까지 빼버렸고, 장노는 본가에서 짐을 정리 중이었으니.
유운은 직접 빗자루를 들고 바닥부터 쓸었다.
“쿨럭.”
계속 기침을 하면서도 청소를 이어갔다.
지하실, 바닥, 심지어 천장을 받치는 연목(椽木)까지 털어냈다.
눈썰미가 있어서 제법 깔끔했다.
하지만 청소에 관한 한, 결코 소화를 따를 수는 없었다.
“모서리는요 부드러운 먼지떨이로 털어주시고요, 면에 붙은 아이들은 털지 마시고 떼어내셔야 해요. 손목은 가볍게 돌리시고….”
소화는 재잘거리면서도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먼지 한 톨 남지 않았다.
“하하하. 청소에도 도(道)가 있구나. 오늘 눈을 새로 떴어.”
“히힛. 그냥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깔끔한 창틀을 보면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몰라요.”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업무 인수차 외출하고 돌아오니, 소화가 의자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녀석. 애썼구나.”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전각이 새로 지은 듯 깨끗해졌다.
“밤바람이 찬데. 이러다 고뿔이라도 걸리면….”
소화를 깨우면, 더 깨끗하게 한다고 난리 칠 게 뻔했다.
유운은 처소에서 비단 이불을 가져다 덮어주었다.
홀로 남은 시간.
유운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후흡. 하.”
오래된 책 냄새.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 편안했다.
“청소는 이만하면 되었고. 책 정리가 필요하겠구나.”
방치된 책을 가만둘 수는 없다.
깨끗한 공기가 통하도록 창문을 열고, 곰팡이를 떨어냈다.
“내일 날이 좋으면 좋겠구나.”
눅눅한 책은 햇빛에 소독되도록 창가에 두었다.
오래된 책은 깊은 곳에 두어 상하지 않게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래서야 어찌 원하는 책을 찾겠는가.”
서고라면 마땅히 제목과 내용이 정리된 색인이 있어야 하는 법.
그러나 수만 권에 이르는 책이 두서없이 쌓여있었다.
은퇴한 전임 학사를 불러와도 되나, 유운은 그러지 않았다.
“어떤 책들이 있을지 기대가 되는구나.”
학사라면 자고로 직접 책을 만지고 느껴야 하지 않겠는가?
그날부터 본격적인 서고 정리가 시작되었다.
“어휴. 힘들지 않으세요?”
“상쾌하기 이를 데 없구나.”
“와. 전 글자만 봐도 어지러운데. 진짜 그런 사람이 있구나!”
소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책을 읽고, 정리하고, 기록하는 일.
누군가에게는 고통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기쁨이었다.
“오호라. 남방지리지라. 본가에서도 못 구했던 책 아닌가?”
흡족한 마음으로 읽고, 책을 꽂아 넣었다.
책의 종류도 다양했고, 희귀 서적이나 고서도 많았다.
하지만 딱 하나 부족한 것이 있었다.
“역시 제대로 된 무공서는 없구나.”
기초적인 무공서, 그것도 실전성 없는 이론서뿐.
무공을 연구한다는 만서각의 본래 취지와 달리, 귀한 비급은 빼돌린 지 오래였다.
“아쉽구나, 아쉬워.”
유운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권력에는 욕심이 없으니, 학사로서의 삶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 꿈이 있었다.
“선조의 유지를 잇기란 불가능하게 되었구나.”
모든 무공을 이해하여, 마침내 완전한 무공을 만들어낸다면.
대체 어떤 기분일까?
괜스레 설렐 때였다.
투욱.
서가에서 하얀 두루마리가 떨어졌다.
“누가 실수로 잘못 꽂았나?”
유운은 두루마리를 들어 올리다 깜짝 놀랐다.
종이 혹은 양피지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차가운 금속이었다.
“어헛!”
돌돌 말린 두루마리를 펼치자 낯선 문양이 보였다.
문제는 문양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기이하구나, 기이해!”
검은 화면에 하얀 선 하나가 끊임없이 움직였다.
무언가 현묘한 이치를 담고 있는 듯했다.
유운은 넋을 잃고 선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대체 무엇일까.”
얼핏 보면 낙서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방사들이 그린다는 진식 같기도 했다.
“설마 검로(檢路)일 리는 없겠지.”
유운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선이 살아 움직이는 건 둘째치고 너무 복잡하고 빨랐다.
이것이 검이라면, 남긴 이는 필히 인간이 아니라 신선이리라.
“신선의 검이라니. 무슨 꿈같은 이야기도 아니고.”
피식 웃을 때 손끝이 두루마리에 살짝 닿았다.
우웅…!
갑자기 하얀 선이 사라지더니, 하단에 낯선 글자가 떠올랐다.
처음 보는 글자인데도 어쩐지 이해가 되었다.
“뭐, 뭐지 이건?”
[밀어서 잠금 해제]
글자 위로 작은 화살표가 깜빡거렸다.
어서 빨리 다음 장을 열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