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2화 (2/114)

제2화

기이한 두루마리(1)

“소화야, 네가 이 두루마리를 서가에 올려놓았느냐?”

유운은 혹시 몰라서 물었다.

“뭘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게 안 보인다는 말이냐?”

유운이 두루마리를 눈앞에 흔들었지만, 소화는 눈만 끔뻑였다.

“공자님의 손이요? 곱고 부드러운…아니, 그게 아니고요.”

소화가 빨간 얼굴로 허둥거릴 때였다.

“아니다, 내 잠시 농을 던져보았다.”

“히히. 그런 농은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유운은 적당히 둘러댄 후 침소로 향했다.

“나에게만 보인다니. 참으로 신기한 책이로구나.”

귀신 들린 물건 같아 꺼리던 마음도 잠시.

학사로서 호기심이 더 컸다.

서가에 꽂혀 있었으니, 어쨌거나 책의 일종 아니겠는가?

“밀면 잠금이 풀린다…? 대체 무엇을 밀라는 말인가?”

두루마리에는 큰 비밀이 숨겨져 있을 터.

그런데 답을 알 수 없어서 답답해했다.

“민다. 민다. 설마 표면을 깎아서 벗겨내라는 말인가?”

하지만 선조가 남겼을지도 모를 유산이다.

감히 훼손할 수는 없었다.

“민다… 혹시 기관 진식? 책을 서가에 밀어 넣으라는 말인가?”

문자 그대로 두루마리를 밀어보기도 했고, 열쇠 구멍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온종일 고민하다 소화와 마주쳤다.

“사람이 셋이 모이면 그중에 스승이 있다고 했으니.”

유운은 성현의 말씀을 떠올렸다.

시비에게 가르침을 구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고서에서 이런 문양을 보았다. 무슨 뜻이겠느냐?”

“저 같은 게 감히 어찌….”

“편하게 말해 보거라.”

유운은 흙바닥에 작은 화살표를 그리고, 문구를 적었다.

“에? 이렇게 쉬운 걸 고민하셨다고요?”

“응?”

“밀라고 하면, 밀면 되잖아요.”

소화는 손바닥으로 바닥을 쓱 밀었다.

“……!”

유운은 무릎을 ‘탁’ 쳤다.

“네가 어리석은 나를 일깨워주는구나.”

고문학에서도 가장 단순한 해석이 정답일 경우가 많다.

유운은 돌아오자마자 손가락을 두루마리 위에 올렸다.

스윽.

화아악!

화살표를 옆으로 밀자마자, 커다란 빛이 터져 나왔다.

“이게 정답이었구나!”

유운은 탄성을 내지르며 크게 웃었다.

난제를 풀었다는 기쁨도 잠시.

“그, 글자가 살아 움직여?”

스르륵.

두루마리가 흐르는 모래처럼 움직이더니, 그 위로 새로운 문구를 쏟아냈다.

[단말기 초기화… 가동 시작.]

[사용 자격 확인 중.]

[혈통, 지력, 심성…기준 통과, 승인 완료.]

[우주의 도서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끝나고, 표면이 다시 변했다.

“이렇게 생생한 그림이라니? 대체 어느 화공이 이리 뛰어나단 말인가!”

유운은 감탄하며 감상했다.

싱그러운 푸른 언덕 위로 파란 하늘, 하얀 구름이 펼쳐졌다.

“까마득히 높은 경지의 주술임이 분명하구나!”

다만 한 가지, 옥의 티랄까.

그림 한가운데, 붉은 네모가 눈에 거슬렸다.

“이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

유운은 곰곰이 생각하다 문득 소화를 떠올렸다.

그 당돌한 아이라면 아마도…

스윽.

유운의 손가락이 붉은 네모에 닿는 순간.

다시 한번 표면, 아니 화면이 바뀌었다.

“확실해. 손가락에 반응하고 있어.”

원리는 도저히 모르겠지만, 작동 방법은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바뀐 화면 가운데, 작은 창이 깜박였다.

[사용자의 관심사 3가지를 선택하여 주십시오.]

“관심사라?”

작은 창을 눌러보니 수많은 주제어가 떠올랐다.

[음악, 산술, 건축, 약학… ]

옆으로 돌려도, 돌려도 끝이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중간에는 물리, 화학, 재료공학같이 이해할 수 없는 단어도 종종 보였다.

“설마 천하의 모든 지식이 담겨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유운은 감탄하며 둘러보았다.

“이 많은 주제 중에서 3가지를 골라야 한단 말이지?”

곰곰이 생각하다 싱긋 웃었다.

“첫 번째는 당연히 이 녀석이지.”

손가락이 거침없이 움직이더니, 한 단어를 찍었다.

[책]

삶의 목적이자, 즐거움이었으니.

단어의 색깔이 변하더니, 맨 위로 올라갔다.

“두 번째는….”

책을 오래 읽으려면, 오래 살아야 했다.

백리세가에서는 특히 요절하는 이들이 많았으니.

몸을 건강히 하는 양생법이라도 얻는다면 좋으리라.

“이걸로 하자.”

[건강]

두 번째 단어 역시 위로 올라갔다.

스르륵.

“마지막 3번째는….”

수없이 많은 단어가 스치고 지나갔다.

평소 관심 있던 주제도, 호기심이 생기는 주제도 많았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게 없었다.

“마지막 기회를 허투루 쓰고 싶지는 않은데….”

그리고 마지막, 운명처럼 뜬 단어.

[무공]

그 단어를 발견한 순간, 마른침을 삼켰다.

“무공이라….”

천하 무공을 집대성하여, 완벽한 무공을 만들고 말리라!

선조의 꿈이자, 자신의 꿈이 아니던가?

유운은 떨리는 손으로 ‘무공’을 선택했다.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사용자에 맞춘 최적화를 진행합니다.]

[예상 대기 시간 : 24:00:00]

[23:59:59]

[23:59:58]

..

.

처음 보지만, 시간의 단위임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선조의 유산은 대체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설레임 속에서 하루가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밤.

[사용자에게 맞는 추천 ‘동영상’을 제공합니다.]

“동영상?”

움직이고, 비치는 형체라?

이어서 굵은 글씨로 쓰인 문장이 나타났다.

【뇌 혁명, 당신도 할 수 있다!】

유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가락을 댔다.

화면 한가운데 중년 학사가 나타났다.

놀랍기는 했지만 여기까지는 평온했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는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사, 사람이 움직여?”

책 속의 사람이 살아 움직이고, 심지어 말까지 하고 있었다.

“굳이 나를 소개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기록을 위해서 분명히 해야겠지. 본좌는 제갈세가의 37대 가주, 제갈명현일세.”

중년 학사가 고고한 표정으로 부채를 털었다.

당연히 자신을 알 거라는 듯한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지간한 세가 이름은 다 아는데, 처음 들어보는데….”

하지만 천하는 넓은 법.

역시 사람은 계속 배워야 한다고 되뇌며 귀를 기울였다.

“절대 고수가 되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나?”

학사에게 도움이 되는 공부법 같은 걸 기대했는데.

뜻밖에 무공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마르지 않는 내공? 강건한 육체? 현묘한 무공? 아니! 그것은 모두 착각일세!”

제갈명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천하의 비급이 있다 한들 이해하지 못하면 소용없는 법! 어린아이에게 날카로운 검을 쥐여 준 꼴에 불과하니.”

유운은 청수한 학사가 말하는 바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오성(悟性)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구나.’

무림에서 오성은 단순히 이해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근원을 꿰뚫는 직관력까지 포함하는, 고차원의 재능을 말했다.

“…무공의 경지가 오를수록 벽에 부딪히고 좌절하게 되니. 결국 이해보다 중요한 것은 없네. 쉽게 말해 두뇌!”

“……!”

제갈명현은 확신에 찬 어조로 두뇌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두뇌야 모든 무공의 근본이자, 절대 고수로 가는 디딤돌! 본좌는 그 두뇌를 일깨우는 방법을 논하고자 하네. 여기, 가문의 선조이신 무후께서 남기신 특별한 두뇌 자극법을 공개하니….”

“…무슨 약장수도 아니고.”

제갈명현의 말대로라면, 이 수련법만 배우면 바보라도 천하의 기재가 될 수 있다.

기재가 배운다면? 천재를 뛰어넘는 오성을 갖게 된다고 했다.

평소라면 허풍이라며 코웃음 칠 말이었지만.

제갈명현의 눈빛은 진지했고, 어조는 무거웠다.

“휴우. 밑져야 본전이니.”

무엇보다 선조의 유산이다. 몸에 해로운 것을 남겼을 리가 없다.

한줄기 양기를 ‘족태양방광경’으로 이끄니, 눈이 깨어나고…

한줄기 음기를 ‘음양교맥’으로 이끌어 두뇌를 일깨우니…

이를 [명안명심법(明眼明心法)]이라 한다.

직계 제자를 가르치는 듯한 정성스러운 설명.

유운은 제갈명현의 가르침에 따라 수련을 시작했다.

스아아…!

단전에 자리한 기운을 서서히 이끌었다.

본격적인 내가 무공이 아니라, 건강을 위해 도인법을 수련한 정도라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기운이 눈에 이르는 순간, 눈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아주 잠깐,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지이잉….

파아앙!

지금껏 보지 못했던 세계가 모습을 드러내니.

‘이, 이 거리에서 이게 보인다고?’

하늘 높이 날아다니는 새의 눈동자가 생생하게 보였다.

다음으로 풀숲 너머에서 짝짓기 중인 벌레가.

심지어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까지 보였다.

‘아아아…!’

이 감각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눈에서 폭죽이 터지는 기분이랄까.

태어난 이래로 이처럼 선명한 감각은 처음이었다.

‘맙소사…!’

유운은 속으로 경탄했다.

인간의 몸에는 의지로 조정할 수 없는 부위가 많다.

심장이 대표적.

움직임을 조정할 수가 없으니, 개발하거나 단련할 수도 없다.

눈 역시 마찬가지.

단련은커녕, 직접 느끼기도 어렵다.

‘그런데 이런 감각이라니?’

아쉽게도 그 감각은 찰나의 번갯불처럼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졌다.

하지만 유운은 그 감각을 기억했다.

‘어떻게든 느낄 수만 있다면, 단련할 수도 있겠지.’

시작이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끝이 창대하다면?

그동안의 고난을 이겨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만약 이 기운이 머리에 이른다면?’

유운의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마침내 기운이 두뇌에 도달하는 순간.

콰과광!

청명한 하늘에 번개가 내리치듯, 커다란 빛이 일었다.

‘…아아아!’

그 환희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아주 잠시나마 ‘깨달은 자’가 된 기분.

그제야 유운은 제갈명현의 말을 온전히 믿게 되었다.

‘진정 새로운 세계로구나.’

그렇게 유운은 수련에 빠져들었다.

* * *

“공자님, 이 책은 어디에 둘까요? ‘백문백해’라는 책인데….”

“그 책은 성현의 말씀을 두 명의 학자가 토론하는 내용입니다. 2층 3번째 서가가 고전문학 란이니, 2번째 줄 오른쪽 5번째에 꽂으시면 됩니다.”

장노의 질문에 유운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육주견문록은….”

“지리서인 듯한 제목과 달리 사실은 정치체제를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3층 2번째 서가 정치, 사회 란으로….”

유운의 대답에 장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 설마 이 책들을 모두 다 읽으셨습니까?”

“그럼요. 그러니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유운은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색인을 작성하고 있었다.

“이, 이 많은 책을 다요?”

장노는 수만 권에 달하는 책을 보며 기함했다.

만서각에 온 지 겨우 한 달.

하루에 십여 권씩 본다 해도 기껏해야 삼백여 권이다.

아무리 천재라도, 아니 인간이라면 절대 다 볼 수 없는 양이었다.

“처음이 어렵지, 익숙해지면 쉽습니다.”

유운은 싱긋 웃으며 붓을 놀렸다.

명안명심법의 첫 단계는 ‘보는 법’.

더 많은 것을, 더 자세하게, 더 정확하게 보는 법이었다.

시중에 떠도는 속독법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니.

스르륵 넘기면 책 한 권이 뚝딱이었다.

명안명심법의 두 번째 단계는 ‘생각하는 법’.

두뇌를 자극하여 기억력을 높이는 공능은,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단계가 높아지면 상단전이 깨어나고, 영성을 깨닫게 되니.

덕분에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실로 지고한 술법이로구나.’

이제는 온전히 제갈명현의 말을 믿는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한 꺼풀을 벗는 기분이었다.

유운의 얼굴은 살짝 피로해 보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반면 장노의 얼굴은 심각해졌다.

“…맙소사.”

세가에서 날고 긴다 하는 기재를 보았다.

지금까지는 유운의 재능이 그중 선두를 다툴 만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원래도 뛰어났지만, 이제는 견줄 이가 없겠구나.’

수만 권의 주요 내용을 기억하고, 이해한다?

이건 재능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공자님은 실로 시대를 잘못 타고 나셨구나. 문(文)의 시대였다면, 천하를 움직이셨을 분인데.’

장노는 안타까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지금은 무(武)의 시대. 공공연히 패도를 부르짖는 이들로 가득했다.

더군다나 백리세가는 전형적인 무림세가.

문으로 이룰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속으로만 삭이고 있을 때였다.

쿵쿵쿵…

덜컹.

두드리는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만서각의 문이 벌컥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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