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기이한 두루마리 (2)
검과 칼을 든 예닐곱 명의 무인들이 들어섰다.
선두에는 일남일녀가 보였다.
메기를 닮은 각진 얼굴을 보고 장노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필 오공자라니.’
외가의 세력을 믿고 유운을 핍박하던 사촌이었다.
오공자 백리오혁이 오만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우리가 허약한 학사 나부랭이도 아니고 굳이 이곳에 올 이유가 있소이까, 서문 소저?”
“있어요.”
성의 없는 단답형 대답에도 백리오혁은 눈치 없이 계속 떠들었다.
“그러지 말고 제가 잘 아는 다루로 가시는 것이 어떨지요?”
“…….”
여인은 대답하는 게 아깝다는 듯 무시했다.
“하하, 서문 소저께서는 실로 말수가 적으시군요.”
“경우에 따라 다르지요.”
백리오혁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소저, 서문요란이 얼굴을 돌린 순간, 남녀노소가 모두 감탄했다.
“와, 진짜 예쁘네요!”
“실로 보기 드문 미인이군요, 공자님.”
어린 소화도, 늙은 장노도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서문가에 외동딸이 있다고 들었는데. 올해 스물이라고 들었습니다. 미모와 지혜로 명성이 높다 합니다.”
눈치를 보던 장노가 슬쩍 운을 띄웠다.
“방년이로군요.”
여자 나이 스무 살을 ‘방년(芳年)’이라 한다.
방(芳)에는 '꽃과 같이 아름답다’는 뜻이 담겨있으니.
문자 그대로 꽃과 같이 아름다운 처자였다.
“미인도가 살아 움직이는 듯합니다.”
아름다움을 칭찬하면서도 의외로 눈빛은 고요하고, 청명하니.
서문요란의 차가운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 모습에 백리오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시비를 걸었다.
“서문 소저, 지금이라도 발을 돌려 본가로 가시는 게 어떻겠소? 이런 지저분한 곳은 어울리지 않는…어?”
탁자는 반들반들하고, 바닥에는 그 흔한 묵은 때조차 보이지 않으니.
빈말로도 더럽다고 할 수 없었다.
“흥, 우리가 오는 줄 어찌 알고. 하지만 보이는 곳만 치우는 얄팍한 수로는….”
백리오혁은 일부러 구석진 곳으로 가서, 손가락으로 창틀을 쓸었다.
먼지 하나 없었다.
“…….”
“후후후. 제가 한 깔끔하죠.”
소화가 소리죽여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유운은 그 모습에 빙그레 웃었다.
백리오혁의 얼굴이 썩어갔다.
“보기보다는 상태가 괜찮으나. 겉모습이 중요한 게 아니지.”
냉큼 말을 돌리더니 서가로 다가갔다.
“소저가 원하시는 서책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오. 각주가 무능하여 관리를 제대로 못하였…어?”
모든 서가에는 책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옆에는 제목과 내용이 표시된 색인까지 보였다.
슬쩍 봐도 알 수 있도록, 완벽하게 정리가 끝나있었다.
‘학사 놈이 감히 거짓부렁을!’
백리오혁이 고개를 돌리고 흉악한 표정을 지었다.
“정리하지 않은 지 수십 년이 넘었으니, 누가 와도 정상화하는 데 삼사 년은 걸릴 것입니다.”
전임 학사가 그리 장담했건만, 현실은 정반대.
서문요란은 그를 무시하고 유운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얼음꽃 같은 표정에 찬 바람 부는 목소리가 나올지 알았는데.
의외로 따스하지도 않지만, 무례하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어떤 책을 원하십니까?”
“그걸 어떻게?”
“책 창고에 온 이유야 뻔하지 않겠습니까?”
“우문현답이로군요. 실은 희귀한 고서 한 권을 찾고 있어요. ‘남방지리지’라는…”
서문요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운이 고개를 돌렸다.
“장 노야, 책을 가져다주세요. 3층 4번째 서가 두 번째 열, 좌측에서 10번째입니다.”
그 모습을 본 서문요란이 눈을 반짝였다.
‘색인을 보지도 않고 바로?’
아무리 학사라도 모든 책의 위치를 기억할 수는 없다.
특히 남방지리지는 역사적 가치는 높지만, 무가에서는 찾지 않으니 미리 준비했을 리도 없다.
“혹시 다른 책도 가능한가요? 음률소론이라는 책인데.”
서문요란은 흥미로운 눈으로 유운을 마주 보았다.
‘희귀서적도, 무공서도 아닌 음악서이니, 정말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운이 지시하고, 장노가 책을 가져왔다.
“혹시 본초약론도…?”
“아, 약선께서 남기신 약초학 입문서 말씀이십니까? 마침 본 각 3층에 한 권이….”
“제목을 정확히 모르는데. 맹의 역사를 논한 서책으로….”
“흐음. 그건 다소 위험한 책인데. 일단 본각 지하 이층창고에 있기는 합니다.”
“고대 언어로 적힌 예법이 있다고 들었….”
“저자가 지나치게 허례허식에 치우쳐서, 별로 권하지 않습니다만. 원하신다면, 2층 서가에….”
서문요란이 일부러 엉뚱한 책을 요구했지만, 모두 척척 찾아냈다.
그때마다 서문요란의 차가운 얼굴이 조금씩 풀렸다.
옆에서 보던 오 공자가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겠지. 설마, 무려 서문을 짊어질 소저인데.’
백리세가의 영역은 실로 넓고, 백성만 수십만이 넘는다.
지부를 설치한다 한들 모든 지역을 다스릴 수는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종가’였다.
종가(從家).
말만 들으면 백리세가의 부하 같지만, 결코 상하 관계가 아니었다.
초대 가주가 당대의 고수를 직접 찾아가 의형제로 맞이하고, 동맹으로 예우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혼맥으로 피까지 서로 섞였으니.
입술과 이처럼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였다.
서문세가는 여러 종가 중에서도 최상위권.
가주의 직계라 해도 감히 무시하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서문요란은 더욱 특별했다.
서문가주의 외동딸!
사실상 차기 가주로 확정된 상황이었다.
수십 명이나 되는 백리세가의 손자들보다 오히려 더 높은 위치였다.
당연히 만서각 이용 권한도 있었다.
“서책의 대여 기간은 한 달입니다, 서문 소저.”
“덕분에 저의 여행길이 적적하지 않겠군요.”
담백한 유운의 말에 서문요란이 미소 지을 때였다.
“감히 소저께 쓸모없는 규칙을 들이대다니. 같잖은 책, 드리면 될 일이지 무슨 대여란 말이냐?”
백리오혁이 짜증을 부리며 끼어들었다.
“물론 규칙이 절대불변은 아닙니다만. 합리적 이유 없이 이를 어긴다면, 기강이 흐트러지니 이를 경계해야 마땅합니다.”
유운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역시 학사 나부랭이답게 고리타분하구나. 몽둥이로 두들기면 그런 헛소리를 못 할 텐데.”
백리오혁은 유운을 노려보더니 거친 말을 쏟아냈다.
차마 옮기기도 부끄러운, 학사를 모욕하는 말들이었다.
‘깎아내릴수록 자신이 낮아짐을 모른단 말인가?’
유운은 속으로 혀를 찬다.
천박한 언사에 동행한 무사 중 몇몇까지도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차가운 서문요란의 눈초리가 얼음덩이가 되었다.
“옛말에 올바른 규칙은 법이 되고, 법은 우리의 안녕과 자유를 지키는 방패라 하였습니다.”
“그런 개똥 같은 말이 어디 있느냐? 필시 네놈이 그럴싸하게 지어낸….”
백리오혁이 다시 한번 비웃으려던 순간, 유운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고약한 농담이시군요. 설마 기억나지 않으시는 겁니까?”
“무슨 소리냐? 네 놈이….”
“제가 한 말이 아니라. 가문의 시조께서 하신 말이지 않습니까.”
“뭐?”
유운은 서가에서 하얀 책을 뽑아 들었다.
큰 글씨로 쓰인 교본.
백리사기(百里史記).
백리세가의 혈손이라면 무조건 읽어야 하는 가문의 역사책이었다.
“커, 커흠. 무슨 소리냐? 당연히 기억나지.”
가문의 선생을 발로 차고 놀러 갔기에 알지도 못했지만, 백리오혁은 짐짓 태연하게 웃었다.
사실을 뻔히 아는 유운이 빙그레 웃었다.
“백리보감에 이르기를, 책을 거울삼아 마음을 갈고 닦으라 하였습니다. 특히 무공이 높을수록 삿된 길에 빠지지 않기 위해, 반드시 책을 가까이하라 하셨습니다.”
백리보감은 선조들의 언행을 기록한 어린이 교훈집이었다.
“배, 백리보감. 그, 그렇다면 책을 가까이해야지.”
백리오혁은 똥 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욕설이 목구멍까지 솟아올라 왔지만, 감히 내뱉을 수 없었다.
기사멸조(欺師滅祖).
스승을 속이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
무림세가에서 지을 수 있는 최악의 죄였으니.
아무리 생각 없는 백리오혁이라도 명가의 자손.
감히 선조의 말을 반박할 수는 없었다.
‘이거 재미있구나.’
골려주는 게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이번에는 출처를 말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가진바 힘을 믿고 약자와 배운 자를 핍박하는 이를 일컬어 무뢰배라고 하니, 무릇 뜻있는 자는 이런 이를 징치하라 하였습니다.”
무례한 행동을 에둘러 욕했다.
듣던 백리오혁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무언가 아닌 것 같지만 감히 발작할 수 없었다.
섣불리 말대답하면, 유운이 금방이라도 선조의 책을 꺼내서 ‘형님의 말씀은 이래서 틀립니다’라고 반박할 것만 같았다.
‘육시랄. 둘만 있으면 죽도록 패주었을 텐데.’
아니, 부하들만 있었다면 팔다리를 부러뜨리고 없었던 일인 척 할 수 있다.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외부인 앞에서, 더군다나 종가의 수장이라 불리는 서문세가의 소저 앞에서는 절대 불가능했다.
‘들키면 개망신당하는 걸로 끝나지 않을 거야.’
백리오혁은 꿀꺽 침을 삼켰다.
꼬장꼬장한 장로들이 크게 노하여 난리 칠 것이니.
후계경쟁은 시작도 전에 끝나버리고 말 터였다.
“막내 공자의 지식이 실로 놀랍군요. 소문보다 더합니다.”
서문세가의 무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서문요란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서문요란이 백리세가 선조의 말은 몰라도, 다른 학문에는 조예가 깊다.
그러니 성현의 말씀을 빗대어 무도한 사촌을 훈계하고 있음을 안다.
문제는 그 범위, 그리고 막힘없는 흐름이었다.
온갖 사서의 말들이 풍부하게 쏟아진다.
성현의 말씀 뒤에 숨겨진, 자신도 몰랐던 뒷이야기들까지.
하나의 줄기가 되어 연결된다.
“원칙에서 법, 정치, 그리고 당금의 무력 우선주의에 대한 비판까지. 모두 자연스럽게 이어지는군요.”
유운은 수려하게 잘생겼지만, 흔히 말하는 옥 같은 절세 미남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그 얼굴이 빛나 보였다.
밥 한 끼 먹고도 남을 시간 동안 혼이 나고서야 훈계가 끝이 났다.
백리오혁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쫓기듯 떠났다.
“그러게 공부 좀 하시지 그랬습니까, 하하하.”
장노가 오랜만에 시원하게 웃어젖혔고.
“히히. 속이 다 시원하네. 쌤통. 베에에~!”
소화는 문 앞에 소금까지 뿌렸다.
유운도 속 시원하게 웃었다.
‘이게 바로 스승의 기분이로구나.’
어린 시절 종종 때리고, 물건을 뺏던 못된 사촌 형.
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유운이 선생이고, 그는 제자였다.
어린 시절 서러움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작은 의문이 들었다.
‘서문 소저는 굳이 왜 온 거지?’
서문세가의 금지옥엽과 대화를 나누어보니, 책 내용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아는 책을 빌리러 굳이 후미진 촌구석까지?’
유운은 어쩐지 인연이 짧지는 않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 * *
“소가주님, 백리세가의 막내 공자를 보신 소감은 어떠십니까?”
호위 무인이 서문요란에게 물었다.
그녀는 이런저런 핑계로 돌아다니며 후계자 후보들을 직접 만나고 관찰했다.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
호위 무인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이름난 후계자들조차 ‘황새 흉내를 내는 뱁새’라며 평가 절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기껏해야 ‘쓸만하다’ 정도였는데.
“지금 백리세가에 필요한 게, 아니 후계자에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서문요란이 역으로 물었다.
“명성이나 재력은 충분하고. 설마 세력 확충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면….”
“절대 고수.”
“……!”
누가 뭐래도 정론이었다.
무엇보다 시대의 흐름이 심상치 않았다.
전통 있는 세가와 세가 사이에서도 전운이 감돌 정도였다.
“결국은 힘이군요.”
“그래요. 그러기 위해선 결국 절대 경지에 올라야 하죠.”
호위 무인은 숨 막히는 표정을 지었다.
절대 경지에 오르는 길은 수많은 벽으로 막혀있다.
그리고 그 길은 온전히 혼자 뚫어야 한다.
그렇기에 명문가일수록 제자와 후손의 오성에 집착하고는 했다.
“유운 공자에게는 지금껏 보지 못한 오성이 있더군요.”
뛰어난 이해력과 기억력,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통합하는 직관.
오성은 학사뿐 아니라 절대 고수에게도 가장 중요한 자질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자질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호위 무인의 말에 서문요란이 침묵했다.
절대 고수의 두 가지 필수 요건.
오성, 뛰어난 지혜.
자질, 뛰어난 육체였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키가 크고 팔이 길어 검수로서 적합하나, 학사답게 온몸에 근육이 하나도 없고 내기(內氣) 역시 보잘 것 없었다.
“휴. 아쉽군요. 육체만 받쳐주었더라면.”
서문요란이 유운의 모습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막내 공자가 뛰어난 것만은 사실입니다.”
“맞아요. 그러니 이곳, 만서각에도 본가의 눈을 두도록 하세요.”
“존명!”
서문요란은 어쩐지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다.
* * *
그 시각, 만서각주의 처소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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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가 고래가 되는 법】
“…뭐지?”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제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