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5화 (5/114)

제5화

기이한 두루마리 (4)

구릿빛 피부의 거한이 유운을 노려보았다.

꿀꺽.

거암의 살벌한 기세에, 사람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유운이 겁낸 것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마음 수련이 부족하였구나. 조그마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이리 오만해지다니.’

유운은 속으로 탄식했다.

상대방이 먼저 조언을 구한 적도 없으며, 스승과 제자 관계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제멋대로 좋다, 나쁘다를 평하다니?

팽육이 귀에 못이 박히게 말했다는 건 변명에 불과했다.

“호각대주, 제가 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유운이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뜻밖의 사과에 거암이 멈칫했다.

“공자께서 무슨 실수를 하였다는 것이오? 못 배운 무인이라 당최 못 알아듣겠소만.”

거암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가문에서 귀하게 자란 공자다.

분명 말투에 기분이 상해서 곧 덤벼드리라 생각했는데.

“변변찮은 지식을 믿고, 함부로 대주의 수련법을 깎아내렸으니 이게 첫 번째 죄입니다.”

“……!”

상대 역시 나름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만든 수련법일 텐데.

어찌 섣불리 판단한단 말인가?

“작게는 대주 한 사람을, 크게는 대주의 사문과 스승을 모욕하였으니, 결코 작은 죄가 아닙니다.”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거암이 머쓱한 표정으로 한발 물러섰다.

“또한 수련 시간과 방식은 대주의 고유 권한이니. 이를 방해함은 공무를 방해함과 같으니, 이것이 두 번째 죄입니다.”

“그, 그렇게까지 대단한 일은 아니오.”

유운이 얼굴을 굳히고 다시 고개를 숙이자, 거암이 손사래를 쳤다.

“겨우 말 한마디에, 그리 스스로를 욕할 것은 없소이다.”

“학사라는 자가 남을 탓할 때는 신나게 붓을 놀리면서 자신을 탓할 때는 붓을 감추어서야 쓰겠습니까?

“커험. 학사라…!”

보통 사람은 남에게는 가혹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한데.

자신에게 저리 엄격하다니?

거암은 신기한 생각까지 들었다.

“사과는 그만하면 되었소, 공자.”

여기서 시비를 더 걸기도 뭐 했다.

게다가 만서각주는 명목상 상관 아닌가?

거암은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사람들과 함께 물러갔다.

“다행히 사소한 시비로 문제를 키우는 성격은 아닌가 보구나.”

유운은 빙그레 웃으며 수련 도구를 정리했다.

“그, 그래도 그 얼굴 보셨잖아요. 얼마나 살벌했는데요?”

소화가 겁먹은 표정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정 살심이 일었으면, 어떤 형태로든 위협을 했겠지.”

하지만 거암은 주먹을 들어 올리지도, 칼을 뽑지도 않았다.

“그러니 겉모습만 보고 두려워 말거라. 모두 똑같이 말이 통하는 사람이니.”

유운의 말에 소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쉽진 않지만… 노력해볼게요!”

“그래, 착한 아이로구나.”

“헤헤.”

유운은 빙그레 웃으며 소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 *

다음날.

유운은 여느 때와 똑같이 신체를 단련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어쩐지 달랐다.

유운을 살피는 묘한 시선.

주변을 서성이는 사람들.

호각대의 무인들이었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시오?”

“흠흠. 그럴 리가. 아니오, 공자.”

무인 서넛은 어색한 표정으로 역기 운동을 시작했다.

‘혹시 아직 화가 안 풀렸나?’

얼굴을 자세히 살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듯싶었다.

진심 어린 사과에 분노는 해소되었지만, 무언가 아쉬운 표정이었다.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유운은 미소 짓고는 스승이 만든 운동계획표대로 몸을 움직였다.

“흐음. 저건 마보(馬步)가 아닌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걸 보니 조금 다르긴 한데.”

“하체 운동이 다 거기서 거기지.”

유운의 운동을 보고 무인들이 한마디씩 했다.

‘조금은 다르지요.’

원래 이름은 발음하기도 힘든 낯선 용어.

유운은 편하게 ‘쪼그려 앉기’라고 불렀다.

스윽, 스윽.

하나, 둘, 셋….

유운이 두 팔로 상체를 끌어안더니, 허공에 앉았다.

잠시 그 자세로 멈추었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조금은 달랐으니.

스물, 서른, 마흔….

숫자가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우와! 공자님 대단해요!”

“뭔진 모르지만, 아무튼 멋져요!”

“히히. 그런데 오늘도 간식이 있는데. 그냥 그렇다고요.”

옆에서 소화가 알짱거리며 끊임없이 감탄을 토했다.

유운은 피식 웃으며 훈련을 이어갔다.

‘그동안 훈련은 충분히 했으니. 결과를 점검할 차례야.’

스승이 정한 훈련 계획을 한 차례 완료하였다.

오늘은 몸의 한계치까지 몰아붙여 볼 생각이었다.

백, 백하나, 백둘….

유난히 긴 수련에, 무인들이 눈을 빛냈다.

‘몸 쓰는 일이라면 우리 전문이지.’

‘기껏해야 한두 달 수련했는데, 어찌 우리를 당해낼까.’

무인들이 옆에서 은근슬쩍 유운을 따라 했다.

‘……?’

처음에는 무슨 의도인지 몰랐으나.

유운이 하나를 하면, 자기들도 하나를 하고, 유운이 둘을 하면 자기들도 둘을 하니.

숨은 뜻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사내란 다 커서도 어린아이와 같구나.’

유운은 속으로 픽 웃었다.

누가 더 오줌을 멀리 싸나, 누가 더 화장실을 오랫동안 안가나.

동네 꼬맹이들은 그런 유치한 내기에 자존심을 걸고는 했다.

‘설마 계속하는 건 아니겠지?’

다 큰 어른들이 그런 속 보이는 자존심 싸움을 할까 싶었는데.

이백, 이백일, 이백이….

점점 더 많은 무인이 유운을 따라 했다.

심지어 대주, 거암까지.

‘휴우. 이게 뭐라고.’

얼마 전 일이 있으니, 함부로 말을 걸기도 그렇고.

유운은 내심 한숨을 쉬면서 운동을 이어갔다.

“헉헉. 이거 생각보다 힘든데?”

“그러게. 마보랑 똑같은 줄 알았는데. 땅기는 부위가 조금 다르네.”

큰 틀에서는 같은 운동이지만, 세부적인 목적이나 사용하는 근육은 미묘하게 달랐다.

삼백, 삼백일….

숫자가 커지자, 부들거리는 자들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이, 이거 빡센데?”

“그런 소리 말게. 무인이 어찌 학사에게 진단 말인가? 포기하면 내가 온 마을에 소문을 다 퍼트릴 걸세.”

“무, 무슨 말인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걸세.”

여기서 먼저 쓰러지면, 마을에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리라.

하지만 횟수가 반복될수록, 하나둘 자리에 주저앉는 이들이 늘었다.

‘검을 쓰는 오른손, 오른발 위주로 수련했구나.’

겉보기로는 전신의 근육이 골고루 발달한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달랐다.

특정 부위만 너무 혹사해서, 전반적으로 근육 발달이 고르지 못했다.

그렇게 수련은 계속되었다.

오백일, 오백이….

이제 서 있는 이는 유운과 대주뿐이었다.

‘팽육 스승님의 수련법은 실로 놀랍구나!’

고작 한 달 남짓이었으니.

짧은 견문으로도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알 수 있었다.

팽육의 독문 수련법은 단순한 육체 수련이 아니라, 육신을 개조하는 선술이었으니.

정확한 자세로 수련하면, 혈이 열리며 자연스럽게 근육에 기가 쌓이리니.

하루면 병자가 일반인이 되고, 일주일이면 건강한 무인이 되며, 한 달이면 보기 드문 강골이 되고.

수련을 완성하는 순간, 뜻 가는 대로 몸이 따르는 신의 육신을 얻게 되리라!

팽육의 장담은 사실이었다.

구백, 구백일, 구백이….

부들부들.

거암의 몸이 격하게 떨렸다.

‘무리해서 좋을 리 없을 텐데.’

유운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크고, 육신 역시 우반신 위주로 발달해서 불균형한데다….

‘저런 식으로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면 안 되는데.’

‘쪼그려 앉기’라는 운동 자체 역시 처음일 테니, 거암이 힘들어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에도 버티고 있는 것은 타고난 신체 덕분이었다.

‘남방 민족의 육체는 실로 대단하구나!’

휘청, 휘청.

진작 쓰러지고도 남을 몸이지만, 특유의 유연성으로 버텨내었다.

‘하지만 저러다가는 무릎이 상할 텐데.’

덩치가 훨씬 큰 만큼, 몸무게 역시 훨씬 무거웠으니.

무릎에 과도한 부하가 걸렸다.

“공자님, 할 수 있어요, 거의 다 왔어요!”

“둘, 둘만 남았어요. 해낼 수 있어요!”

옆에서는 소화가 두 손을 앙 쥐고 열심히 응원했다.

얼굴까지 빨개질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소화에게는 미안하지만.’

유운은 속으로 결심을 굳혔다.

자신이야 학사이니 상관없다.

하지만 대주는 무인, 하물며 부하들 앞이다.

학사에게 지면 얼마나 수치스러워하겠는가?

털썩.

유운은 힘에 겨운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아아…!”

소화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이내 밝은 표정으로 찬물과 수건을 가지고 왔다.

“고생하셨어요, 공자님. 여기까지 하신 것만 해도 엄청 대단해요. 소화는 아주 감동했다고요.”

금세 싱글벙글 웃는 표정이 영락없는 꼬마 소녀였다.

하지만 거암은 달랐다.

“이게 무슨 짓이오, 공자?”

어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한 표정이었다.

“제가 졌습니다. 과연 호각대주님!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군요.”

짐짓 부럽다는 듯 미소까지 지었는데.

쿠웅.

거암이 거세게 발을 굴렀다.

“그렇게 져주면 내가 기뻐할 줄 알았소?”

“져주다니요, 저는 그저 힘이 빠져서.”

“허튼소리!”

거암이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

“나는 근육에 경련이 일어 제자리에 서지도 못할 지경이거늘. 공자는 자잘한 떨림조차 없지 않소!”

자신과 유운의 다리 근육을 번갈아 가리켰다.

“더군다나 공자는 내가 시작하기 전에 한참 전부터 하고 있었지. 맞느냐?”

거암은 살벌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맞습니다, 대주님.”

“적어도 대주님보다 이백 개는 더 한 상태였습니다.”

호각 무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나는 마지막에 자세조차 무너졌으니. 그런 건 제대로 된 수련이라고 할 수 없소.”

“……!”

“그러니 내가 졌소, 공자.”

“그, 그렇지 않습니다. 당연히 대주께서 승리하신….”

“아니오, 내가 졌소!”

서로가 졌다고 우기는 상황이라니?

생전 처음 보는 일에 모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유운과 거암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순수하고 뜨거운 사내 앞에서 어찌 거짓을 연기하겠는가?

“휴우. 맞습니다. 제가 이겼습니다.”

“그렇지, 그게 맞지. 공자께서 이기셨소.”

거암은 그제야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승자가 한숨 쉬고, 패자가 만족하는 상황.

둘은 동시에 서로 마주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크하하하!”

마주 보는 두 눈에는 이전에는 없던 호감이 엿보였다.

“히히, 이겼어요! 공자님이 이겼어요!”

소화는 순수하게 유운의 승리를 기뻐했다.

어찌나 좋아하는지 입술까지 실룩였다.

“승패가 무에 중요하겠느냐? 수련은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다.”

유운은 빙긋 웃었다.

하지만 귀에 안 들어갔나 보다.

“히히. 그래도 이겼어요.”

소화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가슴을 쭉 폈다.

“봤어요? 봤죠? 우리 공자님이에요, 우리 공자님!”

“하하하!”

“고 녀석 참!”

소화의 귀여운 행동에 모두 다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삭막했던 변두리 마을에 따스한 봄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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