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기이한 두루마리 (6)
꾸욱.
유운은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눌렀다.
그러자 가벼운 제목과 다르게, 신선 같은 풍모의 노인이 나타났다.
“본인은 과분하게도 ‘만수신의’라 불리던 의원일세.”
역시나 낯선 이름.
늙은 나이에도 피부가 팽팽하고 어린아이처럼 발그스름했다.
특이하게도 눈에 동그란 유리가 달린 도구를 쓰고 있었다.
“다른 신선들과는 달리 무인이 아닐세.”
‘신선!’
뜻밖의 단어에 유운이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실망하지 말게. 천하제일고수의 가르침보다, 오히려 연자에게 더 도움이 된다고 자부하니.”
만수신의가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부끄럽지만 젊었을 때부터 명의로 이름을 떨쳤네. 수많은 사람을 치료했지. 비루한 거지도, 천하의 고수도 말이야. 하지만 언제나 궁금했네. 사람은 왜 병이 드는가? 왜 늙는가? 왜 죽는가?”
단순히 의학이 아니라, 인생을 관통하는 질문이었다.
“많이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기가 쇠했기 때문일세. 그런데 만약 기가 쇠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나?”
“…….”
“어쩌면 영원히 살 수도 있지 않겠나?”
“……!”
“천하의 모든 의서를 뒤지고, 사람의 몸을 샅샅이 살폈네. 거기에 선계에 와서 놀라운 지식까지 접했지. 그래도 만족 못 하고 끝없이 연구하였고.”
물경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기’ 하나에만 집착하였으니.
결국 단 하나의 깨달음만 남았다.
“내가 가르칠 것은 몸 안의 그릇을 키우는 법!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유운이 숨을 죽였다.
“내공을 무한으로 쌓는 법일세.”
“……!”
그날부터였다.
똑똑.
“공자님, 밥은 드시고 책을 보셔야죠.”
“…….”
소화에게는 미안했지만, 지금은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유운은 잠조차 자지 않고 오직 두루마리에만 매달렸다.
“물론 수업은 쉽지 않을 걸세. 의학, 약학에 대한 기초 지식을 쌓는 데만 족히 이십 년은 걸리겠지.”
근육, 뼈, 혈관, 신경, 혈도는 물론 십이경맥, 기경팔맥에 숨겨진 혈관까지.
인체에 관한 복잡한 설명이 줄줄이 이어졌다.
만수신의의 장담대로, 어지간한 수재도 이해할 수 없는 수준 높은 수업이었다.
하지만 유운은 본래 의학에도 조예가 있었다.
거기에 하늘이 내린 오성에, ‘명안명심법’까지 있으니.
“오호라. 거궐혈 뒤에 숨겨진 사혈이 있어?”
“기경팔맥을 거꾸로 흐르게 한다고? 그런 놀라운 방법이!”
방대한 지식이었지만, 오히려 더 기뻐했다.
“이렇게 즐길 거리가 많다니!”
유운은 마른행주가 물을 빨아들이듯, 지식을 쏙쏙 흡수했다.
의선이 이십 년은 걸리리라 장담했던 과정을 불과 일주일 만에 끝낼 정도였다.
후흡. 호. 후흡. 호.
낮고 고른 숨소리.
유운은 드디어 내공 수련을 시작했다.
“내공 수련은 땅에 곡식을 심는 것과 같네.”
의선의 말이 떠올랐다.
“무인들은 저마다 숲을 베어 밭을 만들고, 씨앗을 심고, 저마다의 방법으로 키우지.”
후흡. 호. 후흡. 호.
“허나 작물이 자라날수록, 작물을 더 키울 땅은 점점 줄어드네. 그게 흔히 말하는 벽, 즉 내공의 한계일세.”
경지가 높아질수록 내공 성장 속도는 점점 더 더뎌지고, 결국에는 멈춘다.
천하제일고수라 할지라도 결국 쇠하고 마는 이유였다.
“그런데 만약, 밭에 경계가 없다면? 밭을 무한히 키울 수 있다면 어찌 되겠나?”
“……!”
내공에 관한 한 벽에 부딪히는 일이 없으리라.
그야말로 무한 성장!
천하의 고수들이라도 눈이 뒤집힐 내용이었다.
후흡. 호. 후흡. 호.
고작 하루 만에 티끌 같았던 씨앗이 콩알만큼 커졌다.
상식을 초월하는 일.
하지만 놀랄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으니.
우우우웅…!
단전 속 씨앗이 가늘게 진동하자, 몸속 다른 씨앗들이 화답하듯 진동했다.
“일반 내공심법은 고작 기해혈, 즉 단전 한 곳에 내공을 담지만, 나의 조화심법은 다르네.”
무려 열 곳!
기가 고인 열 개의 혈이 고스란히 단전이 되어 같이 성장한다.
“무엇보다 열 개의 단전이 끊임없이 순환하고 소통하며, 눈덩이처럼 커지니.”
마치 선의의 경쟁과 같다.
한 명의 천재가 깨달음을 얻으면 다른 천재도 자극받아서 나아간다.
그런데 그런 천재가 열 명이 있다면?
우웅, 우웅…!
하나의 씨앗과 하나의 씨앗이 연결되는 길은 하나.
두 개의 씨앗과 두 개의 씨앗이 연결되는 길은 넷.
열 개의 씨앗과 열 개의 씨앗이 연결되는 길은…?
무한!
그렇기에 조화심법에는 끝이 없으니.
바로 [조화무궁선법]이었다.
“조화의 길을 따르는 자는, 무한히 성장하리니!”
엄숙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순간 유운의 머릿속에 아스라이 환영이 펼쳐졌다.
푸르른 생기로 가득 찬 거대한 나무!
그것은 생명의 나무였고, 무한의 나무였으며.
“조화 무궁의 끝에 이르는 날, 누구도 밟지 못한 경지에 오르리니. 나뭇잎의 그림자만으로도 천하를 뒤덮으리라!”
세계를 아우르는 나무였다.
“아아아!”
극락에 도착한 것만 같은 쾌감 속.
마침내 유운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깨달았다.
아주 길고 머나먼 길.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길.
그러나 실로 위대한 길이 되리라.
* * *
채앵, 채앵!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
유운의 얼굴이 기분 좋게 풀렸다.
‘열심이구나!’
검에는 사내의 가슴을 끓게 하는 무언가가 있으니.
연무장에서는 대련이 한창이었다.
“만서각의 책이 한 권이라도 털리면, 네놈들의 털이란 털은 모조리 다 밀어버릴 것이야!”
거암이 엄하게 외친다.
만서각은 백리세가가 수백 년에 걸쳐 모은 고서로 가득했다.
비록 무인들은 관심 없는 학술서 위주지만 역사적, 상업적 가치는 차고 넘쳤다.
그래서 의외로 좀도둑들이 욕심내는 장소이기도 했다.
“하합!”
“차아!”
실전을 방불케 하는 수련!
거암의 강함은 타고난 신체 덕이라, 따로 가르칠 게 없었다.
대원들은 자기들끼리 토론하고 대련하고는 했다.
“공자님, 여기서는 횡소천군이 나을까요, 태산압정이 나을까요?”
그러다 무의식중에 유운에게 묻는 이도 있었다.
“에끼, 이 사람아. 공자님이 아무리 몸이 좋으셔도 학사야. 무공을 물으면 어떡하나.”
“어이쿠, 죄송합니다. 물어보는 것마다 막힘이 없으셔서, 저도 모르게 무공까지 여쭈어보았네요.”
두 무인은 겸연쩍은 미소와 함께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아까 검을 가슴에서 한 치정도 더 들어 올리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그러면 아래가 비지. 고작 살을 취하겠다고 뼈를 내줄 셈인가?”
열심히 토론하는 모습을, 유운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공자님, 무공서적도 많이 읽지 않으셨나요?”
소화가 옆에서 물걸레로 바닥을 닦으며 물었다.
유운은 슬쩍 빗자루를 들으며 빙긋 웃었다.
“고작 기초 이론서를 조금 읽은 것에 불과하다. 직접 칼을 휘둘러 본 것도 아니거늘, 어찌 섣부르게 입을 놀리겠느냐?”
조언하려면 할 수 있었다.
초식 이름은 복잡하지만, 결국 대부분 가로 베기, 세로 베기, 사선 베기의 변형이다.
초식의 흐름 역시 읽지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 조언에 진정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아니, 아니지.’
기본 무공의 형(形)도 초식도 안다.
하지만 그걸 어찌 실전의 변화무쌍함을 따라가겠는가? 어찌 목숨을 걸라고 하겠는가?
결국은….
탁상공론.
탁자 위에서 펼치는 헛된 말장난에 불과했다.
“무공을 글로 배우는 데는 한계가 있단다.”
“이야기책에도 나오잖아요. 무공비급을 읽고 짜잔! 고수가 되어서 나타나는 거.”
“허나 글만으로는 고수가 될 수는 없다.”
학사인 유운이 오히려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급을 쉬운 말로 풀어 쓴 주해서, 그림으로 묘사한 도해까지 따로 만들 정도지. 그럼에도 진정한 뜻은, 온전히 전달되지 못한다.”
그랬기에 사문이 필요했다.
스승이 직접 보여주고 옆에서 따라 하고, 틀리면 즉시 고쳐주고.
사형제들과 함께 검을 겨루며 잘된 점, 잘못된 점을 토론하고.
그것이야말로 진짜 무공을 익히는 과정이었다.
“치잇. 그래도 저는 비급 편을 들 거예요. 여기는 만서각이니까요.”
“녀석. 하하하. 그래, 만서각의 소화라면 의당 그리해야지.”
유운은 빙그레 웃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성현께서도 욕심을 멈추고, 만족하라 하셨지.’
명민한 머리와 밝은 눈, 튼튼한 근골과 무한을 약속하는 내공.
지금까지 받은 것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분명 그리 생각했는데.
‘이건?’
의선이 남긴 길고 긴 동영상이 끝난 후.
검은 화면 위로, 여러 개의 동영상이 한꺼번에 떴다.
[추천 동영상을 모두 열람하였습니다.]
[가장 최근에 열람한 동영상 종류 : 무공…]
[연관 동영상을 제공합니다.]
유운은 호기심에 그중 하나를 눌러보았다.
‘허어. 강의가 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어진 영상은 강의가 아니었으니.
중년의 무인 하나가 연무장에서 수련하는 장면이었다.
휘릭. 휘리릭!
검이 허공에서 무수한 선을 그렸다.
속도는 번개처럼 빨랐고, 변화는 미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검이 수련용 목각인형에 이르는 순간.
파바바박!
수백 개의 조각으로 분해되어버렸다.
놀랍게도 조각 하나하나의 크기는 완벽하게 동일했다.
‘보기 드물게 수준 높은 검법이로구나!’
명안명심법으로 오성이 깨어나니.
초식의 형태와 무공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왔다.
‘휴우. 아쉽구나. 몇 번만 더 본다면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숨겨진 변화까지 연구하기에는 영상이 너무 짧았다.
‘처음 볼 때 더 집중해서 볼 것을.’
유운이 천고의 기회를 놓쳤다며 하면서 아쉬워할 때였다.
영상 밑에 못 보던 표식이 있었다.
세모, 동그라미, 선과 곡선 등이었다.
표식 위에 손을 대자, 조그맣게 설명이 나왔다.
[ 다시보기 ]
‘……!’
유운은 설마 하는 눈으로 표식 위에 손을 댔다.
휘릭. 휘리릭!
다시 한번, 검이 허공을 수놓았다.
‘서, 설마?’
유운은 다시 표식 위에 손을 댔다.
휘릭. 휘리릭!
‘마, 맙소사!’
유운은 넋을 잃고 두루마리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 반복해서 볼 수 있다고?’
듣도 보도 못한 기능!
이론상 이해할 때까지 무한히 볼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유운은 다급하게 다른 표식도 눌러보았다.
[ 천천히 보기 ]
[속도를 선택하세요.]
[10배속, 5배속, 2배속, 1배속…0.5배속, 0.25배속, 0.1배속.]
유운은 먼저 첫 번째 10배속을 눌렀다.
파밧, 파바밧!
영상 속 남자가 미친 듯한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명안명심법으로 단련된 눈으로도 미처 잡아내지 못할,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서, 설마. 그렇다면?’
유운은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0.1배속을 눌렀다.
휘이이익. 휘리리리리…릭.
영상 속 남자가 아주 느리게 검을 펼쳤다.
어린아이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부르르!
유운은 흥분하여 손으로 책상을 꼭 잡았다.
‘이거라면, 이거라면…!’
범인조차 시간만 들이면 상승의 무공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하물며 유운 같은 기재라면, 말할 것도 없다.
“실로 하늘이 내린 축복이로구나. 이보다 더 큰 행운은 없으리라!”
유운의 얼굴에 기쁨이 넘쳐흘렀다.
그러나 다음 표식에 비할 수는 없었다.
[ 자막 ]
풀어내면, ‘글자의 장막’이니.
무공과 관련해서 보여줄 글자가 대체 무엇이겠는가.
“아아아…!”
유운은 번개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