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9화 (9/114)

제9화

기이한 두루마리 (8)

유운은 매일 밤 동영상에 빠져 살았다.

그렇게 무공 시연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두루마리를 덮었다.

‘이제 어느 정도는 알겠구나.’

물론 무한에 가까운 영상을 다 본 것도 아니고, 모든 무공을 다 이해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무공에는 흐름이 있기 마련.

‘세부는 달라도 큰 줄기는 동일하지.’

정도의 무공은 도가, 불가, 유가에서.

마도의 무공은 마교라는 큰 줄기에서 비롯되었다.

‘이제 보는 것은 그만두고, 직접 수련해도 되겠구나.’

그리 결심했지만, 뭔가 아쉬웠다.

‘그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찾아보자. 뭔가 새로운 것이 있을 수도 있으니.’

스윽스윽.

유운은 이제 숙련된 두루마리 사용자.

손가락을 몇 번 놀리자, 금방 화면이 변했다.

[동영상을 조회수 순으로 정렬합니다.]

‘조회수라니. 이것도 참 신기한 기능이지.’

동영상에는 사람들이 본 횟수가 적혀있었다.

그렇게 찾은 조회수 1위 영상은….

‘어찌 이리 평범한 영상이 1위란 말인가?’

조회수는 말하자면 인기였으니.

유명한 무공일수록, 자극적인 제목이 달려있을수록 높았다.

그런데 1위 영상의 제목은, 놀랍도록 평범했다.

【수련검법 시연】

다른 영상의 날짜와 비교해보니, 상당히 오래된 영상이긴 했지만.

‘이런 제목으로 1위가 될 수는 없을 텐데?’

궁금한 마음에 영상을 재생하였다.

그리고 틀자마자.

‘……!’

유운은 영상에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사아아아…!

연분홍빛 꽃잎이 바람에 너울거린다.

흐드러지게 핀 매화나무 아래.

한 사내가 검무(劍舞)를 펼치고 있었다.

사라락.

부드럽게 발로 원을 그리자, 스친 땅에서 붉은 꽃이 피어났다.

스르릉.

붓을 놀리는 화공처럼, 검으로 꽃을 그리자.

화아악.

하늘에 꽃이 수 놓이며 진한 향기가 풍겨왔다.

사내의 손끝에서 매화가 끝없이 이어졌다.

‘아아아! 실로 아름답구나!’

시리도록 아름답고, 가슴 벅찰 정도로 화려한 검술이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손끝의 움직임.

심지어 숨 쉬는 모습조차 신묘하니.

유운은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었다.

‘모르겠어, 도저히 모르겠어.’

타고난 오성에, 명안명심법까지 더해졌으니.

지금껏 어떤 초식이든 손쉽게 이해했다.

하지만 이 무공만은 달랐다.

하늘을 꿰뚫는 설산을, 밑에서 올려다보는 기분.

저 위에 무엇이 있는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 키야아! 취한다, 취해!

└ 검술이 이리 아름다울 줄이야. 그저 보는 것만으로 눈시울이 붉어지네.

└ 오늘 매화주가 땡기는구나.

댓글 역시 지금까지와는 달리 호평 일색이었다.

└ 이것은 천하 모든 검법의 정화(精華)다.

단 한 줄이지만, 가장 많은 이들의 추천을 받은 댓글이었다.

그 댓글 밑에도 수많은 이들이 댓글을 달았다.

└ 검마, 그가 인정할 정도면 말 다 한 거지.

└ 여기에 반론할 놈 없어? 아무도 없냐고?

└ 화산제일검, 아니 천하제일검의 전성기 때가 아닌가.

└ 그럼 그럼. 감히 한 치도 더하거나 뺄 수 없지.

└ 영상 더 내놔, 더!

└ 이거 하나뿐이라고, 젠장.

매화 향에 취했는지, 찬양하는 글을 줄줄이 올리는 이도 있었다.

└ 이미 약관도 되기 전에 화산의 최고수라는 매화검수가 된 분이심.

└ 참고로 매화검수 안에서도 등급 나뉨. 구매화부터 일매화. 구매화만 돼도 어지간한 문파 장로 찜 쪄 먹음.

└ 그런데 일매화 되기까지 10년도 걸리지 않았음. 화산파 역사 최초임.

가끔 욕도 섞여 있었지만.

└ 에이 퉤퉤. 더러운 세상. 재능 있는 놈이 노력으로 모자라서, 즐기기까지 하면 어쩌라는 거야?

└ 검에 미친 새끼, 죽을 때까지 여자 대신 검만 품고 잘 새끼.

욕조차 사실은 극찬이었다.

벅찬 감동 속에 표식을 찾아보았지만.

‘허엇?’

[ 천천히 보기 ]도, [ 자막 ]도 막혀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무공명 : 이십수매화검법]

[시연자 : 화산제일검]

[자막 등 추가 서비스는 저작권자의 거부로 인해 사용이 불가합니다.]

‘…아.’

안타까운 마음에 절로 탄식이 나왔다.

유운은 용기 내서 처음으로 댓글을 적어보았다.

└ 왜 구결을 공개하지 않는 겁니까? 하다못해 천천히 보기조차 되지 않으니.

이 시간에도 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지 곧바로 댓글이 달렸다.

└ 허락할 리가 있나. 그 고고한 자가.

└ 알아서 깨달음을 얻으라는 거지. 그조차 못하는 놈은 상대도 안 하겠다는 거야. 빌어먹을 재능! 불공평한 세상!

└ 그런데 자네는 뭔데 그것도 모르나?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모를 수가 없는데?

└ 냅두게. 무림 말고 어디 심산유곡에서 수련하다 등선한 녀석인가 보지 뭐.

유운은 혹시나 해서 다른 동영상들을 찾아보았다.

영상 대부분은 자유롭게 재생할 수 있었지만, 간혹 자격을 제한한 경우도 있었다.

[무공 수련 50년 이상, 정도 출신만 열람 가능.]

특히 ‘구대 문파’라 불리는 곳들이 그러했다.

기초 무공까지는 공개하되, 그다음 단계의 무공부터는 ‘정식 입문’을 자격요건으로 했다.

특히 유운이 보았던 최초 영상들은 더했다.

제갈세가주는 특정 수치 이상의 지성을, 팽육은 끈기와 근성을, 신의는 영성으로 제한했다.

‘대체 인간의 성품을 어찌 평가한단 말인가? 숫자로 딱 나와서 비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늘.’

그러나 화산제일검에게는, 아니 천하제일검에게는 그조차 없었다.

그 흔한 자격 요건조차 붙어있지 않았다.

혼자서 알아서 보고 배우라는 듯이.

그리고 유운은 처음으로 만났다.

벽(壁).

그것은 그의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벽이었다.

유운은 매일 잠들기 전 영상을 다시 보았다.

고오오…!

하얀 얼굴은 고요하고 냉정했으며.

매화가 수 놓인 백의에서는 고고한 기품이 느껴졌으니.

지독할 정도로 아름답고, 오만한 사내였다.

저 남자를 따라잡고 싶다.

나도 저런 경지에 오르고 싶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강렬한 욕망이었다.

저 사람을 닮고 싶다.

그것은 처음 만나는 ‘동경’이었다.

두근두근.

가슴이 떨렸다.

막연했던 가문의 목표가 아니었다.

눈앞에 보이는, 갖고 싶은 목표였다.

* * *

만서각의 식당 뒤편.

일을 보아주는 아주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그거 들었어요? 정 씨 아줌마가 그만 공자님 탁자 위에 차를 엎었대요, 글쎄.”

“그, 그런 큰 실수를…. 어째, 어째.”

“단단히 혼이 나겠네요. 녹봉이 깎이는 정도에서 그치면 좋을 텐데….”

“그런데 놀라운 건, 글쎄 공자님께서 그저 빙그레 웃고 넘어가셨대요.”

“뭐, 뭐라고요?”

“오히려 정 씨네 옷이 젖지 않았는지 걱정해주셨다고 하더라고요.”

“어쩜, 어쩜. 이전 각주는 우리 모두보다 책 한 권이 더 귀하다고 야단치고는 했잖아요.”

“맞아요. 나도 기억나요. 별 볼 일 없는 낙척 학사가 어찌나 유세를 떨던지….”

“귀한 가문의 자제라서 훨씬 더 까탈스러운 줄 알고 걱정했는데. 어쩜 그리 온화하신지.”

여인들의 얼굴에 저절로 따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마침 이 층에서 소화가 내려왔다.

“그나저나 공자님 기분이 유난히 좋아 보이지 않아요?”

“맞아요. 요즘 입술이 귀에 걸렸더만.”

못 들은 척 지나가던 소화의 어깨가 흠칫했다.

“뺨에는 열이 오른 듯 발그레하신 것이. 설마?”

“호호호. 마침내 그게 온 것에요. 그게!”

“그럼요. 공자님도 사내인데. 올 게 왔네요.”

여인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눈웃음을 지었다.

여기서 소화가 유운 공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었다.

“흥, 아니거든요? 우리 공자님은 절대 그런 분 아니에요!”

소화는 분한 목소리로 외치며, 획 돌아서 달려 나갔다.

하지만 계속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 그럴 리 없어!’

‘아닐 거야. 그런데 공자님도 사내인데…’

‘진짜면 어떡하지?’

때마침 유운이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고 있었다.

“아니죠? 그런 거 아니죠?”

소화가 바들거리면서 물었다.

“뭘 말이냐?”

“그, 그거.”

“그게 무엇이냐?”

“…사, 사.”

소화는 빨개진 얼굴로 간신히 말을 이었다.

“…사, 사랑.”

“사랑이라? 흐음. 결은 다르지만. 그래, 그 단어만큼 강렬한 감정이니. 맞다. 이것 역시 사랑이겠지.”

유운은 호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토록 한 사람을 동경하고, 따라 하고 싶은 적이 없었다.

저벅저벅.

유운은 그저 장난이겠거니 하면서 웃고 지나갔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화산제일검의 검법을 이해할 수 있을까,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으아아아앙! 안 돼! 그럴 리 없어.”

무슨 상상을 했는지, 소화는 동그란 눈에서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하하하!”

“호호호!”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아주머니들이 다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 * *

주머니 속의 송곳은 감출 수 없는 법.

검을 수련하던 호각대원들이 제일 먼저 유운의 변화를 알아챘다.

“공자님, 저의 횡천소군은 어땠습니까? 이만하면 서가 놈을 쓰러뜨릴 만할까요?”

“전반적으로 좋았습니다. 다만 변화를 조금 준다면 더 좋아질 듯합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단순히 옆으로 베면 되는 거 아닙니까?”

“초식은 정해져 있으나, 상황은 변하는 법.”

“……!”

“그러니 변하지 않는 초식은, 죽은 초식입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먼저 상대와 나를 잇는 중심선부터 그려야 합니다. 강 무인과 서 무인의 팔 길이를 고려하면, 검이 움직이는 반경은 이와 같고…….”

유운과 호각 무인들이 뜨겁게 토론을 벌였다.

“오오…! 그렇다면 이렇게 한 치를 당기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것도 좋습니다만, 한 박자 느리게 허리를 베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 수를 못 보았군요. 확실히 더 안정적이고, 빠릅니다.”

무인들이 각종 초식으로 공격해도, 유운은 파해(破解)하여 무효로 만들었고.

무인들이 방어할 때는 역으로 빈틈을 찔러 무너뜨렸다.

“허어. 어찌 이게 가능하지?”

“무학사의 가문 아닌가. 선조가 남기신 절대 무적의 무공서라도 익히셨나 보지.”

“예끼. 그게 말이 되는가.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에 백리세가가 천하를 제패했겠지.”

그들의 추측은 의외로 정답에 가까웠다.

‘그분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 기겁을 하겠군.’

이곳에서 복잡한 초식이라 봤자, 까마득한 고수들이 보기에는 애들 장난 수준.

유운의 검을 보는 눈 역시 한껏 높아졌다.

덕분에 유운의 지도를 받고자 하는 무인들도 급격히 늘었다.

‘괜찮을까? ‘그 녀석’에게 들었던 초식 해석과 다소 다른데?’

지켜보던 거암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뭐 괜찮겠지. 그저 가벼운 조언일 뿐인데.’

거암은 그렇게 넘겼다.

“너, 너 어제까지만 해도 나한테 지던 놈이. 하루 만에 어떻게 된 거야?”

“으하하! 귀한 분의 가르침을 받은 덕분이지.”

유운의 조언을 듣고 무공이 나아졌다는 소문에, 호각대원 전부가 유운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유운도 이전보다 좀 더 확신을 담아서 조언해주었다.

‘그분들이라면 분명 이리 말했을 테니까.’

한두 명이 아닌, 고수 집단 전체가 공유하는 관점이니, 틀릴 리가 있겠는가.

가르치면서 배운다고 유운의 무공도 발전했고, 대원들과의 사이도 더 좋아졌다.

하지만 평화는 결국 깨지기 마련.

“누가 아이들을 이리 망쳐놓았느냐!”

서릿바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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