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검을 논하다 (1)
연무장 한가운데.
청의를 입은 미남자가 서 있었다.
살얼음이 낀 듯한 표정으로 호각대원을 질책했다.
“설 사부, 그, 그것이 말이오. 이번에 새로 오신 학….”
“우리가 스스로 토론하여 새로 만들어낸 검로요.”
더듬거리는 동료의 옆구리를 찌르며, 다른 대원이 말했다.
“그럴 리가 없다. 각각의 검로에는 뜻이 담겨있으니. 이렇게 정적이고 안정적인 검로는 너희처럼 야전에서 성장한 무인의 검과는 결이 다르다.”
미남자의 단정적인 말에 대원들은 차마 변명거리를 찾지 못했다.
“누구더냐? 누가 감히 내가 가르친 검의(劍意)를 함부로 왜곡하였느냐!”
유운이 나서려하였으나, 소화가 옆에서 옷자락을 잡았다.
“위험해요, 공자님.”
“무슨 말이냐?”
“저 사람은, 고독랑 설영이라는 자인데. 보통 괴팍한 자가 아니래요.”
소화가 본가에서 들은 소문을 속삭였다.
“찬 바람 쌩쌩 부는 성격에, 수틀리면 장로라도 들이받으니. 오죽하면 백리세가의 2대 골칫덩이라고 불리겠어요?”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은 표정에 대원들이 쩔쩔매었다.
“…학사, 학사라고? 학사 따위의 말을 듣고 검로를 함부로 수정하였단 말이냐?”
반강제로 대답을 들은 설영이 목소리를 높였다.
유운이 뭐라고 말하려던 때였다.
“어이 얼음덩어리, 그만 하지?”
외공 수련 중이던 거암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거암, 이게 어찌된 일이더냐?”
“뭐긴 뭐야. 네가 들은 그대로지.”
“네 이 녀석! 알만한 녀석이 어찌 학사나부랭이의 말장난에 넘어간단 말이냐?”
설영이 어이없다는 듯 호통을 쳤다.
거암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사부 설영. 말을 조심하거라. 입이 화를 부른다.”
거암이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정식 호칭으로 부르는 것은 거암이 진심이라는 뜻.
“오냐, 말 잘했다. 학사 나부랭…, 아니 공자가 가르쳤다는 말은.”
설영은 한 발짝 물러서서 용어를 바꾸었다.
“나의 무사부로서의 권한을 침범했다는 말이다.”
설영의 말에 거암이 움찔했다.
“장로들에게 밉보여서 쫓겨났다더니, 사실인가 봐요.”
소화가 옆에서 속삭였다.
하나는 서고나 지키라며 시골구석에 처박아버렸고.
다른 하나는 무공을 봐주라는 명목으로 순회 무사부라는 직책까지 만들어서 외부로 쫓아버렸다.
“일선 무인들의 검법을 지도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권한이다.”
설영의 말에 거암이 미간을 찡그렸다.
오랜 지기라 한들, 무사부의 권한은 함부로 침범할 수 없었다.
“이건 나의 일이니 네가 참견할 바가 아니다.”
“끄응.”
논리에서 밀리니 무어라 대답하지도 못했다.
일순간 정적이 흐를 때였다.
“반갑습니다, 설 사부. 부족하지만 만서각을 맡고 있는 백리유운이라고 합니다.”
유운이 앞으로 나아가 정중히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
“공자요? 공자께서 이 녀석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훈수를 두셨소?”
잔뜩 골이 난 설영의 말에 유운은 빙그레 웃었다.
“제가 어찌 함부로 훈수를 두겠습니까? 그저 같이 검을 논하면서 더 좋은 방법을 찾아보았을 뿐입니다.”
“허. 더 좋은 방법이라. 이리 함부로 변형하는 것이?”
설영의 말이 짧아지며, 거칠어졌다.
“초식의 변화는 무한하니 어찌 정답이 있겠습니까? 그저 상황에 적합하다 여겨지는 방법으로 대응을….”
“정답이 없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설영이 벌컥 화를 냈다.
“하나의 초식은 수많은 고수들이 갈고 닦아, 마침내 완성시킨 길이니. 그 길대로 걸으면 될 일이오!”
“그놈의 정석 타령은.”
거암이 조용히 구시렁거렸다.
“하나의 완성된 길이라.”
유운 역시 많이 들어본 논리 아닌가?
성현의 말씀이 담긴 경전은 완벽하니.
단 한 글자도 더해서도 안 되고, 빼서도 아니 된다.
학계에서도 그렇게 고전을 맹신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 초식은 강력한 공격 초식이거늘. 왜 함부로 검을 뻗는 길이를 줄였소?”
설영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번개처럼 내리치니.
맹호출동(猛虎出洞).
사나운 호랑이가 동굴에서 뛰어나오는 듯한 강렬한 검초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공격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길이가 줄어들면 위력 역시 줄어들기 마련이거늘.”
“만약 검을 이렇게 휘두른다면….”
유운이 팔을 미세하게 당기고, 검 끝을 미세하게 올렸다.
“……!”
그런데 오히려 빈틈이 줄어들고, 공격 검로가 더 늘어났다.
“그건 검법에 없는 변초요. 선조가 허락하지 않은….”
“왜 허락받아야 합니까?”
“뭐요?”
“선조가 남긴 검법 안의 뜻을 이어받으면 족하니, 형태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궤변이오. 그럼 이 초식은 왜 바꾼 거요? 여기에는 오히려 쓸데없는 동작을 넣었잖소.”
선풍회선(扇風回旋).
제자리에서 팽이처럼 돌아서 휘돌려 치는, 태풍과 같은 초식이었다.
“변화가 너무 정직하여 읽히기 쉽기 때문입니다.”
“뭐요?”
유운이 천천히 시범을 보였다.
다리를 먼저 내딛고, 발뒤꿈치를 회전시키고, 그 회전력으로 몸이 뒤틀리고.
그 힘이 상체와 팔을 타고 검에 이어지고, 마침내 강력한 수평 베기로 이어지는 초식이었다.
“상, 중, 하 세 군데를 노리는 변화가 있긴 하나, 이미 발을 딛는 자세에서 어디를 노릴지가 이미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를 숨기기 위한 동작을 넣어서….”
“……!”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말로서 무공을 다투는 시합’으로 이어지니.
논검비무(論劍比武).
과거 무학사들이 종종 즐겼다는 이론상의 대결이었다.
“그렇다면 이때 내가 독룡출해를 사용한다면?”
“그건 맹호출호의 3번째 변초를 사용하여 파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 금계투란을 사용한다면 되지 않소?”
“그럴 때는 선풍회선의 8번째 변초를 사용하여….”
설영이 제시하는 초식을, 유운이 말로써 하나 둘씩 파해하자.
“오오…! 저런 방법이?”
“우리가 아는 백리팔검 맞아?”
“마치 새로운 검술 같군. 장님이 눈을 뜬 기분이야!”
듣는 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공자의 말대로 초식을 파해할 수 있음은 사실이오. 이론적으로는 말이요. 허나!”
설영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전에서는 절대 불가능하오.”
“……!”
“누구도 그렇게 빨리 상대의 초식을 읽을 수는 없소.”
유운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걸 말을 할 수도 없고.’
까마득한 고수들 수준에서는 당연한 파해법이었다.
물론 이 세상의 고수가 아닌 저쪽 세상 고수 기준이었다.
“천하십대고수라면 모를까, 공자가 말한 파해는 불가능하오.”
“하지만 그렇다고 검법의 결함을 그대로 둘 수는….”
“허어. 지금 공자께서 얼마나 오만한 말씀을 하고 있는지 아시오?”
설영의 얼굴이 조금씩 분노로 달아올랐다.
“백리세가가 백 년에 걸쳐 다듬은 검법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거요.”
“……!”
설영이 말썽꾸러기로 유명하지만, 그 또한 백리의 무인. 백리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말로는 뭔들 못할까. 말로는 해도 달도 벨 수 있지.”
“그럼?”
티잉.
청명한 금속음에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설영이 바닥에 던진 것은 검이었다.
“직접 증명하시오. 공자의 말을.”
“설영 네 이놈! 보자 보자 하니까…!”
거암이 분노하여 끼어들었다.
“날을 세우지 않은 가검(假劍)이다.”
“가검이라도 잘못하면 크게 다칠….”
“내공을 봉하마.”
“……!”
“백리팔검만으로 겨루도록 하마.”
백리팔검.
8개 초식으로 이루어진 백리세가의 기본 무공.
서로가 잘 아는 무공이었다.
“그래도….”
“저는 괜찮습니다. 하겠습니다.”
“공자!”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저 서로의 배움을 나누기 위함입니다.”
유운의 말에 설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또한 수련의 하나다. 그러니 너는 빠져라.”
유운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암은 마지못해서 뒤로 물러났다.
“조심하시오, 공자. 실전은 이론과 많이 다를 테니.”
설영이 차갑게 말하며 검을 들더니, 오른발을 성큼 내디뎠다.
‘선풍회선을 쓰려 하는구나!’
크게 한 바퀴 돌면서 수평으로 베는,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얕보였군. 그것도 크게 말이야.’
유운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첫 초식은 대게 빈틈이 적은 공격으로 상대의 반응을 살피기 마련이다.
반면 선풍회선은 백리팔검 중 가장 동작이 큰 공격이었으니.
상대를 어지간히 하수로 보지 않는 한,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가오!”
설영이 큰 목소리로 외치더니 몸을 회전시켰다.
휘리릭!
커다란 바람과 함께 검이 쏘아졌다.
‘어디, 잘난 입으로 한번 막아 보거라!’
설영은 속으로 비웃으며 결과를 기다렸다.
이론이야 그럴싸해도, 실전에서 그게 통하겠는가?
더군다나 무인도 아닌 학사.
검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터.
분명 복부에 한방을 얻어맞고 흙바닥을 나뒹굴….
“…어?”
챙!
유운이 설영의 검을 막았다.
떨리는 손을 보니 충격이 없지는 않은 듯하지만, 분명 제대로 된 방어였다.
“우, 운이 좋으시구려, 공자.”
설영은 다시 한 번 검을 들었다.
“단련된 근육을 보니, 거암에게서 외공을 배우셨나본데….”
검을 휘두르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
‘이번에는 반드시 본때를 보여주마.’
다시 한 번 선풍회선으로 가슴을 노렸다.
맹렬한 바람까지 부니, 변화를 읽는 것 따위는 불가능한….
챙!
“…어엇?”
다시 한 번 검이 막혔다.
이번에는 유운의 몸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미리 알았다고? 말도 안 돼!’
설영은 검술만 이십 년을 수련한 노련한 검수.
아무리 유운의 신체가 훌륭해도, 발검 속도로는 설영을 따를 수 없다.
그러니 초식을 읽고 미리 대비했다는 뜻이었다.
“어디 이것도 한 번 받아보시오!”
오기가 생긴 설영은 선풍회선만을 사용해서 맹렬히 공격했다.
그러나.
채애앵!
채애앵!
마치 그의 마음을 읽은 듯 검이 가려던 곳에 미리 검이 와있으니.
설영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어찌, 어찌 이게 가능하단 말인가!”
손은 눈보다 빠르다는 말이 있다.
설령 수 싸움에서 앞선다 해도, 눈으로 볼 수조차 없을 터인데.
설령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리고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파파바밧!
백리팔검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내공이 없다 해도, 설영은 장로급 무위를 자랑하는 절정 강자.
“저, 저거 위험한 거 아니야?”
“너, 너무 빨라. 한 대 맞으시기라도 하면!”
구경하는 이들이 걱정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채애앵!
휘리릭!
유운은 그 모든 검을 피하거나 막아내니.
“다, 다 피하셨어!”
“대체 어떻게?”
연무장의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비 한 방울 안 맞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제갈 사부께 감사해야겠구나.’
유운은 속으로 빙그레 웃으며 검을 털었다.
한 줄기 양기가 눈을 자극하고, 눈이 깨어났다.
[ 명안명심법 ]
그 순간 유운은 현실이 아니라 동영상 속에 있는 것 같았다.
[ 천천히 보기 ]
십분지 일 아니, 백분지 일로 세상이 느려졌다.
아주 잠시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발끝을 보니 이번에는 우측 어깨군.’
설영의 검은 분명 위력적이나, 지나치게 정직했다.
백리팔검의 정석 그 자체.
속속들이 아는 초식에 당할 리가 없었다.
설영의 공격에 대한 분석이 끝나는 순간, 흐름이 넘어왔으니.
“조심하시오, 설 사부!”
유운이 처음으로 검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