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11화 (11/114)

제11화

검을 논하다 (2)

휘리릭!

맹호출동!

본래는 변화가 세 가지뿐인 뻔한 초식.

허나 유운의 손에서 펼쳐지는 순간, 검이 무궁무진한 변화를 일으켰다.

‘어디? 어디야!’

설영이 기겁하며 막으려 했으나, 손은 눈보다 빨랐다.

채앵!

유운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설영의 검을 비껴 나갔다.

서걱.

설영의 옆구리에서 설핏 피가 보였다.

“설 사부, 혹여 다치신….”

“계속해라! 어서!”

설영이 흥분하여 소리쳤다.

유운은 망설이다 다시 검을 뿌렸다.

휘리릭!

유운의 이번 수는 선풍회선!

그러나 설영은 도저히 수를 읽을 수가 없었다.

따아아앙!

연무장을 울리는 금속성.

유운의 검과 설영의 검이 맞부딪쳤고, 두 사람 모두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겉보기로는 동수이나.

‘…봐주었구나.’

설영은 유운의 검로를 전혀 읽지 못했다.

반면 유운은 설영의 검로를 읽음은 물론, 적당히 맞추어줄 정도였으니.

그 증거로, 두 사람의 검은 그림으로 그린 듯 대칭을 이루었다.

단 이 초식.

승부를 가르는 데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괜찮으십니까, 설 사부?”

유운이 걱정하며 다가갈 때.

땡그랑.

설영이 넋을 잃은 표정으로 검을 떨어뜨렸다.

“이, 이건 아니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백리의 검법은 모두 속속들이 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이건 자신이 알고 있는 검법을 넘어섰다.

그럼 평생 수련한 자신은 무엇이란 말인가? 바보? 천치?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할 수 없어!”

맹렬한 분노, 그리고 질투가 끓어올랐다.

무의식적으로 검을 들어, 내공을 일으켰다.

솨아아!

단전에서 기가 일자, 검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상대의 가검 따위는 한방에 부숴버릴 수 있는 위력!

아니, 검뿐 아니라 허약한 학사도 같이 반으로 쪼갤 수 있는….

“설영, 네 이놈!”

거암이 천둥 같은 고함을 질렀다.

그 순간.

부르르.

설영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몸을 떨었다.

‘대, 대체 내가 뭘 하려고 한 거지?’

한번 머리에 피가 쏠리면 분노를 참지 못하는 성격.

그 덕에 종종 사고를 치기는 했다.

그러나 상대는 언제나 강자이거나 악한 자였다.

그러나 유운은 둘 다 아니었다.

“가볍게 스친듯하나, 쇳독이 옮을 수 있습니다. 금창약으로 치료를….”

맑고 선한 눈.

무인도 아닌 학사를 상대로 살심을 일으키다니?

이래서야 자신이 벌한 악당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뒤늦은 부끄러움에 눈을 감았다.

“…하아.”

길고 긴 탄식.

“공자, 큰 무례를 범하였소.”

설영이 공손히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설 사부. 즐거운 비무였습니다. 저 역시 배운 바가 많습니다.”

“아니오. 악한 마음을 품은 순간, 이미 비무가 아니었소.”

“……!”

“실로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하였으니.”

설영은 왼손으로 검을 쥐었다.

“나는 검수로서 자격이 없소이다. 검을 쥐는 손의 엄지를 잘라 사죄하겠소.”

“……!”

누가 말릴 새도 없었다.

휘릭!

설영은 오른손을 향해 번개처럼 검을 내리쳤다.

돌발적인 행동에, 모두가 비명조차 못 지르던 순간.

유운이 그 위로 손을 뻗었다.

티이잉!

“……!”

“……!”

“……!”

모두가 입을 떡 벌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고, 공자님! 안 다치셨어요? 세상에, 세상에. 어떻게 해!”

호각대원들과 소화가 기겁하며 몰려들었다.

하지만 유운은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보십시오, 멀쩡하지 않습니까?”

“…어엇?”

“저, 정말이네?”

들어 올린 유운의 손.

비록 작은 생채기가 나서 피가 설핏 보이긴 했지만.

사람들의 상상처럼 어디가 잘리거나, 뼈가 드러나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팽 사부께 감사해야겠어.’

근기(筋氣).

팽육의 독문 수련법을 통해 쌓은 특수한 기운 덕분이었다.

전신의 피부와 근육을 보호하니.

전설의 금강불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내공이 실리지 않은 칼쯤은 막아낼 수 있었다.

물론 옅은 상처는 남았다.

주륵.

손등의 상처가 벌어지면서 피가 새어 나왔다.

“그, 금창약부터 가져올게요.”

소화는 후다닥 안으로 뛰어갔다.

“아아아…!”

설영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런 비겁한 자를 위해? 어찌해서? 왜?”

설영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약속을 어기고 손을 쓰려고 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을 위해 손이 날아갈 위험을 감수하다니?

“설 사부, 괜찮으십니까?”

오히려 자신을 걱정하며, 위로하는 유운의 모습에.

머리는 모르지만, 가슴은 답을 알았다.

부르르.

설영이 눈을 감고 한참을 몸을 떨었다.

이윽고 유운 앞으로 기어가서 무릎을 꿇었다.

쿠우웅.

흙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고독랑 설영. 경무제 45년 동짓날, 유주 무진현 설가촌 출생.”

“……?”

갑작스러운 행동에 모두가 숨을 멈추었다.

“어리석고 오만한 자는 이제 죽고 없으니.”

설영이 고개를 들어서 유운을 바라보더니, 검을 땅에 박았다.

“새로 태어난 설영, 주군을 뵈옵니다.”

“……!”

“……!”

“……!”

갑작스러운 선언에 유운이 깜짝 놀랐다.

“과한 말씀이십니다. 제가 어찌…. 이리된 것, 친구가 되면 어떻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설영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도의 무인이 이리 비겁한 짓을 했으니. 이번 생에서 모시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서 죽을 뿐입니다.”

검을 들어서 목에 가져다 대니, 이번에는 누구도 막지 못할 터였다.

“…일단 알겠습니다.”

당장 사람부터 살려야 할 것 아닌가?

유운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부터였다.

“주군, 기침하셨습니까.”

이른 새벽, 유운의 처소 앞.

설영이 의관을 갖춰 입고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설 사부, 이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매일 아침과 밤, 문안을 잊지 않는 설영에 유운은 다소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닙니다, 주종의 법도가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지는 법. 어찌 주군에 대한 예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설영이 엄격한 표정으로 두 손을 맞잡았다.

“허참.”

그래도 유운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며칠 하시다 말겠지. 휴, 어릴 때 협객전 꽤나 읽으셨나 보네.’

난세에 영웅이 일어나고, 협사(俠士)와 재사(才士)가 그의 뒤를 따른다!

그런 옛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고풍스러운 모습이 아닌가?

하지만 설영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으니.

“어디 주군께서 지나가시는데 허리를 뻣뻣하게 펴고 있느냐!”

호각대원들이 당황할 정도로 급작스러운 변화였다.

“검을 제대로 들지 못할까! 겨우 네 시진(8시간)의 훈련으로 어찌 각을 지킬 수 있겠느냐!”

수련장에서도 더욱 엄격해졌으니.

무인들도 하인들도 설영이 지나갈 때면 군기가 바짝 들었다.

“자식, 제대로 휘어잡았구나. 과연 얼음덩어리답다.”

거암이 흐뭇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너 안 돌아가도 되냐? 명목이 순회 무사부인데.”

“어디서 누굴 가르치는지는 전적으로 내가 정할 수 있다. 장로들은 본가에만 안 돌아가면 불만이 없을 거다.”

“하긴. 그 노괴들이야 사고만 안 치면 신경도 안 쓰겠지.”

“그나저나 너도 주군께 예를 갖춰라.”

“나? 나는 잘하고 있는 거 아니었나?”

거암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공자님이 아니고 각주님이다.”

“……!”

고작 한 단어 차이지만 의미가 컸다.

그저 존경하는 학사로 보느냐, 정식으로 윗사람으로 인정하느냐의 문제였으니까.

“네 말이 맞다. 내 생각이 짧았다.”

거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유운의 일상은 조금 달라졌다.

거암과의 외공 수련 후, 한 가지가 더 추가되었으니.

휘릭!

휘리릭!

바로, 설영과 함께 검을 겨루는 것이었다.

이는 두 사람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다.

‘확실히 직접 칼을 드니, 더욱 잘 알겠어!’

유운은 머릿속 이론이 빠르게 구체화되었고.

“확실히 주군의 말씀이 맞습니다. 무공의 근본은 기술이 아니더군요.”

설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사람입니다.”

“맞습니다. 초식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초식은 없다.

유운이 개조한 검술 역시 마찬가지.

그저 유운의 검은 ‘알맞은 때’에 ‘알맞은 곳’에 있었을 뿐이다.

가장 쉽지만, 가장 어려운 것.

“쉴 새 없이 문제가 바뀌는 시험과 같지요. 누구도 다 맞출 수는 없습니다.”

설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복잡한 문제의 정답을 모두 맞히는 사람이 여기 있지 않습니까?”

“요즘 너무 얼굴에 금칠을 해주셔서, 세수하기도 부담스럽습니다.”

유운은 농으로 받고 넘겼지만.

설영은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 여기 계셨군요. 공자님. 아니 각주님!”

거암이 나타나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각주님이라니요?”

“이제부터는 호칭을 바로 하기로 했습니다.”

유운은 어색하게 서서 미소만 지었다.

“아, 호칭하니까 생각나네. 사람들은 너의 다른 별호를 모모르지?”

“거, 거암 네 이 녀석! 그 입을 다물라!”

진중하게 서 있던 설영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거암은 아랑곳 않고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저희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뭐라고 부릅니까?”

“불타는 바윗덩어리, 그리고 얼어붙은 호수입니다.”

“호오. 잘 어울리는군요. 불타는 바위면 화암이고, 얼어붙은 호수면 빙호….”

말을 하던 유운이 멈칫했다.

화암은 썩 괜찮은데, 빙호는 어감이 어째 좋지 않았다.

“빙호야. 빙호야. 오늘도 참 빙호 같구나.”

거암이 킬킬 웃으며 말을 걸었다.

“네, 네 이놈!”

둘이 떠난 자리.

소화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어떠냐, 보기와 다르지?”

불덩이라 불리는 흉악한 거한은 외모와 달리 유들유들하고 유쾌했고.

얼음덩이라 불리는 미남자는 보기보다 훨씬 다혈질이었다.

“으아악! 빙호가 쫓아온다! 말려주십시오, 각주님!”

그 광경에 소화도 미소 지었다.

첫인상에 겁을 집어먹었고, 특히 설영은 잠시나마 미워하기까지 했으니까.

“그런데 빙호, 빙호라.”

소화가 킥킥 웃었다.

“약간 욕 같아요.”

“응?”

“빙구?”

“……?”

“호구.”

“……!”

“빙ㅅ…”

“커흠. 바른말!”

유운이 헛기침하자, 소화가 혀를 날름 내밀었다.

“빙호는 되죠?”

“비, 빙호까지는. 크흠.”

유운도 정식 별호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날부터였다.

“빙 사부, 빙 사부. 시원한 물을 가져왔어요.”

소화의 태도는 더없이 정중했으나.

“빙호 대협, 빙호 대협, 여기 호빵도 있어요.”

장난기 가득한 얼굴.

누구나 거기 쓰인 말을 읽을 수 있으니.

히히히!

빙호, 아니 설영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이이익!”

지은 죄가 있으니 호통도 칠 수 없었다.

“빙호, 빙호, 빙호! 부를수록 착 달라붙는 그 이름! 빙, 빙, 빙, 호, 호, 호!”

소화는 심지어 돌림 노래까지 만들었다.

‘어쩐지 욕 같은데 말릴 수도 없고.’

온종일 설영을 쫓아다니며 노래를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빙빙빙. 호호호. 히히히!”

“아아악! 이 쪼그만 녀석이!”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거암과 설영은 처소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지금처럼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웠던 적이 없다.”

“그래, 너나 나나 언제나 차별받았었지. 나는 피부색으로, 너는 그놈의 꼬장꼬장한 원칙주의 때문에. 그런데 이곳에서만은 자유롭지 않으냐.”

쪼르륵.

거암이 술을 한잔 따라주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는 없어.”

“……!”

“세상도, 가문도 변하고 있다.”

거암이라고 바깥일을 모를 리 없다.

후계전을 벌이고 있는 공자들과, 서로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세력들을.

“내가 왜 그리 싸운 줄 아냐?”

“네 성질이 더러워서?”

“…젠장, 부정은 못 하겠군. 하지만 그것뿐만은 아니야.”

설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아버지께 들은 이야기, 기억나냐?”

“……!”

“백리세가는 백성을 위해 일어난 이들이 일군 가문이었어.”

차별받는 자들, 약한 자들이 억압하는 자들에게 저항하기 위해 세운 가문이었다.

“하지만 모두 옛일이지. 백리세가는 변했다.”

백성은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 세금을 바치고 명령을 들어야 하는 일꾼에 불과했다.

백리세가는 그들이 강력하게 비판했던, 고귀한 귀족이 되어버렸다.

“처음으로 그때의 마음을 잃지 않은 분을 뵈었다. 오만함에 빠지지 않고, 낮은 곳을 직접 살피시는 분을 말이야.”

“그래. 그런 분임을 안다. 하지만 함부로 후계전에 끼어들었다가 몸이라도 상하시면….”

“너야말로 공자님을 모르는구나.”

설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기사 이곳에서 주군과 직접 검을 대본 이는 나뿐이니.”

첫 비무 때의 유운과 지금의 유운은 또 달랐다.

설영이 껍질을 벗고 한 걸음 나아갈 때, 유운은 열 걸음씩 나아간다.

모든 초식을 그 자리에서 파해하니, 이제 내공 없이는 일 검도 받을 수 없을 정도였다.

“어쩌면 말이야, 어쩌면 볼 수 있을지도 몰라.”

설영은 잊혀진 전설을 떠올렸다.

무학사.

모든 무공을 분석하고, 이해하고, 마침내 초월하는 존재.

그런 말도 안 되는 존재가 되살아날 거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휘이잉!

계절은 어느덧 봄을 지나 여름으로 향하니. 바야흐로 만물이 쑥쑥 자라나는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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