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검을 논하다 (3)
“설 사부, 날도 더운데 건물 안쪽으로 들어오는 게 어떠신지요?”
유운은 읽고 있던 신간 도서를 내려놓고 말했다.
“아닙니다, 주군. 경호하는 자가 어찌 일신의 편안함을 좇겠습니까?”
설영은 땡볕이 비치는 정문에서 꼿꼿하게 서 있었다.
“각주로서 이렇게 말하긴 그렇습니다만. 좀도둑이라면 모를까, 만서각에서 목숨이 위험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천길 방죽도 개미구멍 때문에 무너진다 하였습니다. 저는 이 자리가 편하니, 신경 쓰지 말고 업무에 집중하십시오.”
설영의 말에 유운은 확신했다.
‘봤네, 확실히 봤어.’
‘천길 방죽’은 협객전에 자주 나오는 대사다.
그것도 너무 오글거린다고 저자가 자기 돈 내고 회수했던 초판본에만 나오는 대사였다.
처억.
차가운 미남자가 검 자루에 손을 올리니, 협객전 속 영웅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냉정하고 근엄한 얼굴은 오래가지 못했다.
“빙, 빙, 빙자로 시작하는 말~”
소화가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나타나자, 설영이 움찔했다.
“빙구르르. 빙구르르.”
“빙산. 빙수. 빙과. 후르르릅~!”
군침 한번 삼키고.
“빙, 빙 돌아가는 팽이처럼~”
이상한 박자에 듣도 보도 못한 가사였다.
탁, 탁.
소화가 먼지떨이로 창틀을 털면서, 히죽거린다.
“호, 호, 호자로 시작하는 말~”
슬금슬금 설영 주위로 다가오자, 설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주, 주군. 생각해보니 이 층의 경비 태세를 확인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설영이 황급히 자리를 떴다.
“히히. 그러고 보니 이 층 청소를 깜빡했잖아?”
소화는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설영을 쫓았다.
“하하하.”
유운이 빙그레 웃을 때였다.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장 노야!”
“공자님!”
유운이 한걸음에 달려가 짐을 받았다.
두 사람이 반갑게 얼싸안았다.
“먼 거리 오가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겨우 책 팔고 돈 받아온 게 전부이거늘. 뭔 대수이겠습니까.”
사람이 태어나고 죽듯이, 책 역시 그러하다.
새로운 책을 사고, 중복되거나 필요 없는 책을 파는 것 역시 만서각의 주요 임무.
장노는 유운을 대신해 먼 곳까지 가서 거래하고 온 터였다.
“그런데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장노가 연무장과 이 층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오든 말든 신경도 안 쓰던 무인이 깍듯하게 인사를 하지 않나, 허물어져 가던 담장이 보수가 되어 있지를 않나.
본가의 눈칫밥만 수십 년.
만서각의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한눈에 알아봤다.
“그게 어찌 된 일이냐면….”
마침 수련을 끝낸 거암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자리에 있으니 잘 되었습니다. 식구끼리 다 같이 식사라도 하시지요.”
“시, 식구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유운이 빙그레 웃었다.
* * *
“이거 얼마 만에 목에 기름칠하는 겁니까?”
“얼마 전에 했잖아.”
“그때는 반주였고. 이렇게 다 같이 모인 건 또 다르지.”
“그러고 보니 만서각의 첫 단체 회식 아닙니까?”
“으하하하! 제대로 마시고, 뜯자!”
서촌에 하나밖에 없는 주루, ‘서가진미’.
다들 덩치 큰 사내들이라 그런지 작은 주루가 금방 꽉 찼다.
“어릴 때부터 주군을 보살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설영, 장 대협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장노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냉혈한이라 불리는 고독랑 설영이 이렇게 고개를 숙인다고? 그것도 하잘것없는 종복에게?
“각주님이 누굴 닮아서 성격이 그리 온화한가 했더니, 모두 장 대협의 덕이군요, 하하하!”
장로도 들이받는다는 거암이 친근하게 웃으며 잔을 권한다.
“어미를 찾으며 울던 아이가 어느덧 장부가 되었군요. 참으로 장하십니다.”
전후 사정을 들은 장노가 눈물을 글썽였다.
부모도 없고, 보살펴주는 이도 없이 핍박받았던 아이였다.
“제게도 있었습니다, 든든한 가족이.”
“외가의 어른도 없으셨잖습니까?”
“장 노야가 있지 않았습니까? 장 노야가 제 아비이자, 스승이자, 호위였습니다.”
하찮은 종복을 가족이라니?
장노는 감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유운은 빙그레 웃으며 음식을 권했다.
“이거 드셔보십시오, 간이 잘 배어있습니다.”
유운이 오향장육을 한 점 집어서 장노의 접시 위에 올렸다.
그 모습을 보며 거암이 침을 꼴깍 삼켰다.
“대주님, 마음껏 드십시오.”
“하, 하지만 저리 간이 강한 음식은 근육에 해롭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간 식단 조절을 완벽하게 해오지 않으셨습니까?”
거암이 먹은 것이라고는 삶은 닭과 콩, 약간의 채소뿐.
덕분에 몸에는 한 점의 군살도 남아있지 않았다.
“쉬는 것도 수련이라 했습니다. 칠 일 중 하루 정도는 마음껏 드셔도 됩니다.”
“……!”
“저도 이렇게 면 요리를 먹고 있지 않습니까?”
“저, 정말입니까? 으하하하!”
유운의 말에 거암이 두 손 가득 음식 그릇을 들어 올렸다.
후르르릅!
와그작, 와그작.
거암은 매콤한 어향육사와 짭조름한 우육면을 한 입에 흡입했다.
“이 맛이야, 바로 이 맛이라고!”
거암은 마치 깨달음을 얻은 고승처럼 환호했다.
“주인이 바뀌었다더니, 음식이 훨씬 나아졌습니다.”
“그러게. 맛도 좋고 양도 많구만.”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젓가락을 놀렸다.
“이놈아, 적당히 좀 먹어라. 주군 먹을 음식이 남아나질 않겠다!”
“하하하. 저도 먹고 있습니다. 오늘은 면 요리가 특히 맛이 있군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장노는 가슴이 벅차올라서 입을 열지 못했다.
“장 노야, 어서 드시지 않고요? 음식이 식습니다.”
“보기만 해도, 보기만 해도 배가 부릅니다.”
장노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먼 곳 오가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혹여 몸이 상하지는 않을지 염려됩니다. 이제 바깥 활동은 쉬시는 게 어떠신지요?”
“허허.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노가 붉어진 눈시울을 손으로 비비며, 농담을 했다.
“각주이신 공자님께서 자리를 비울 수는 없고. 그럼 거암 대주에게 맡길까요?”
“……!”
산만한 사내와 조약돌만한 소녀가 쑥덕거리고 있었다.
“공자님은 어떻게 그 많은 책을 보시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글자만 봐도 어지러운데.”
“나처럼 건강하다는 뜻이니 걱정할 것 없다, 껄껄껄.”
“이익. 벽에도 무슨 글자가 있네요. 어지러워….”
“우리 소화가 어지러우면 안 되지! 내 한 주먹에…!”
“으허헙! 그러면 안 됩니다, 대주!”
“말려, 어서 말려!”
소화는 벽에 적힌 음식 이름을 지운다며 낑낑거리고, 거암은 솥뚜껑만한 손을 붕붕 휘두르고, 대원들은 기겁하여 말리니.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그럼 설 사부라면….”
설영을 본 유운이 말을 잇지 못했다.
“누구도 주군의 곳간을 축낼 수는 없다!”
주루 이 층 창가.
설영이 눈을 부릅뜨고 서촌 전체를 감시하고 있으니.
수틀리면 누구든 하늘 너머로 붕붕 날려버릴 것만 같았다.
“휴우. 장 노야께서 조금만 더 고생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늙은이도 할 일이 있어야지요.”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나도 고기, 나도 고기!”
소화가 젓가락을 열심히 놀렸다.
“어이쿠. 조그마한 몸에 끝도 없이 들어가는구나.”
“저러다 금방 거암 대주만큼 크겠어.”
“뭐라고요? 흥! 그러면 앞으로 수련 시간에 간식 없어요.”
“허억. 그건 안 되지, 안 돼!”
분위기가 달아오른 만큼, 음식도 빨리 없어졌다.
“여기 화과육입니다.”
주인장이 새로운 접시 두 개를 가지고 왔다.
“이건? 저희가 이 요리는 주문 안 했습니다만.”
“저희가 드리는 감사의 표시입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유운의 말에 주루 주인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이 서촌도, 이 서가진미도 모두 만서각이 있기에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
백리세가 입장에서 만서각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책 창고에 불과하다.
하지만 작은 시골 마을 입장에서는, 명문세가에게 보호받게 해주는 연줄이자, 마을을 유지해주는 물주였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과한 거절 역시 예의가 아닌 법.
유운은 정중히 인사하고, 접시를 받았다.
‘겉만이 아니라, 속까지 하나가 되었구나!’
회식을 지켜보던 주인이 속으로 감탄했다.
모두 진심으로 유운을 대하는 모습이다.
절대 어울리지 못할 이들이 한 사람을 중심으로 뭉쳤다.
‘소가주께 얼른 보고 해야겠어.’
새로운 주루 주인은 서문세가의 눈이었다.
남방인의 수장, 거암으로 모자라 고독랑 설영까지?
정신 차리라고 시골에 박아놓았지만, 바깥을 전전하다 끝날 인물들이 아니다.
‘갑급 보고 사항이야!’
빠른 보고를 위해 값비싼 전서구까지 꺼냈다.
푸드드득!
비둘기가 날아올랐다.
루주의 주인, 서문요란을 향해.
* * *
“서문 소저, 이 머리 장식이 예쁘지 않습니까? 서역에서 난 귀한 옥으로 만들었다는데, 소저께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백리오혁이 품에서 장신구를 꺼내 불에 비추었다.
반짝반짝.
딱 보아도 비싸고, 진귀한 물건이었다.
“관심 없습니다.”
가문의 후계전이 한창이다.
‘유리한 거래 조건을 가져와도 들어줄까 말까거늘. 고작 장신구 따위로 내 환심을 사려고 하다니?’
서문요란은 치밀어 오르는 한심함에 고개를 저었다.
그녀를 서문 소가주가 아닌 한낱 여인으로 본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백리오혁 역시 백리의 직계.
서문세가에 방문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백화 상단에서 이번에 무엇을 바쳤는지 아십니까? 무려 검노가 만들었다는 백련신검입니다, 하하하. 어디 한 번 보시겠습니까?”
외가의 재력을 마치 자신의 힘인 양 착각하는 백리오혁을 보자니.
서문요란은 그렇지 않아도 지끈거리는 머리가 더욱 아파왔다.
백리의 직계 중 누구를 지원해야 할 것인가?
서문세가를 비롯한 모든 종가의 최대 고민거리였다.
모두가 탐내는 약초와 비단을 꽉 쥐고 있는 서문세가는 더욱 그러했다.
지금까지는 누구도 서문세가의 영역을 침해하지 못했지만….
‘가주가 바뀌면 어찌 될지 모르지.’
백리세가는 종가의 권리를 존중하지만, 어디까지나 일반론.
백리세가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철권통치를 한 가주가 없지 않았다.
당시 경쟁자를 지지했던 종가에게는 실로 암울한 시기였다.
‘그러니 신중하게, 바르게 선택해야 해.’
가문의 미래가 걸린 일.
그래서 서문요란은 후계들을 은밀히 관찰해왔다.
“소가주님, 잠시만.”
그때 수하가 다가와서 귀엣말을 했다.
“가내의 일이 있어서. 잠시만.”
서문요란은 백리오혁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자리를 떴다.
노골적인 냉대에 백리오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문요란은 정자를 벗어나 건너편 방으로 향했다.
“호오. 순하고 부드럽기만 한 줄 알았는데. 이런 모습이 있었단 말인가요?”
서문요란의 눈에 호기심이 엿보였다.
서신에는 유운의 외공 성취, 비무, 사람들에 대해 적혀있었다.
특히 관심이 쏠린 것은 사람이었다.
“각주가 된 지 두어 달 만에 무인들을 휘어잡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백리세가의 두 말썽꾸러기까지 말입니다.”
“관찰 등급을 올리세요. 아니, 아예 지부를 설치하세요.”
“네?”
지부는 등급을 올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인력이나 조직에 적지 않은 부담이 될 터.
“상황이 달라졌으니, 대우도 달라져야죠.”
“하, 하지만.”
“작지만 무력대를 얻었습니다. 게다가 비무라고는 하지만 무공을 드러냈습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 말씀은?”
“그래요. 정식으로 후계전에 뛰어들겠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
천 리 밖에서 상대의 숨은 마음까지 읽어낼 줄이야.
과연 소가주!
부하는 존경어린 눈빛을 보냈다.
“존명!”
쿠웅!
부하는 한쪽 무릎을 꿇은 후, 즉시 움직였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백리오혁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이 노오오옴! 유운 네깟 놈이 감히!’
그토록 사모하는 서문요란이다.
그녀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궁금했다.
무림의 예에서 벗어난 일이나, 몰래 다가가 내공으로 청력을 강화했다.
백리 유운….
평가 등급 상향…, 장래 매우 긍정적….
소가주 직접 관리 대상….
들킬까 봐 가까이 가지는 못했지만, 몇몇 단어는 엿들을 수 있었다.
‘어미도 없이 큰 녀석이 감히, 나의 요란에게! 가만두지 않겠다!
백리오혁은 분노에 눈이 뒤집혔다.
아무도 모르게 음모의 싹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