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검을 논하다 (4)
“이곳은 실로 평화롭군요.”
장노의 말에 유운이 책을 덮었다.
“다른 곳은 다르다는 말씀 같습니다만?
“후계전이 지나치게 과열되고 있습니다.”
“……!”
첫째 공자 무혁은 뛰어난 무위로 최전방 무인과 원로 고수의 지지를 받고 있으니 그를 따르는 자들은 무파(武派)라 불리웠고.
둘째 공자 은혁은 영민한 머리와 넉넉한 씀씀이로 중견 무인과 상인의 지지를 받고 있으니, 그들을 따르는 자들은 금파(金派)라 불리웠다.
“무파를 지지하는 전투부대원과 금파를 지지하는 낭인이 싸워 사람이 상했다고 합니다.”
“설마 날붙이를 꺼내 들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것도 여럿이 그랬다고 합니다.”
유운의 안색이 흐려졌다.
말다툼 정도라면 몰라도, 피를 보다니?
“본가의 장로들은 물론 종가들까지 각자 편 가르기를 한다고 합니다.”
“아직 공식 후계전이 시작된 것도 아니거늘. 그렇게 노골적으로요?”
대놓고 양분되는 것은, 백리세가의 역사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같은 파가 아니면 공을 세워도 승진은커녕 한직에 처박기 일쑤이고, 같은 파이면 죄를 지어도 어물쩍 넘어간다고 합니다.”
정파라 해도 무인이다 보니 술 먹고 난동을 부리다 민간에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엄히 벌해왔는데.
“전통이 깨어지고 있군요. 안 좋은 의미로.”
“게다가 장로원에서는 매일 고성이 오가고, 주요 전과 당에 서로 자기 사람을 심기에 바쁘다고 합니다.”
“휴우. 이래서야 다른 명문 세가들이 나아갈 때, 홀로 뒷걸음질 치는 격이군요.”
“분위기도 매우 강퍅해졌다고 합니다.”
장노는 말할수록 답답한지 가슴을 쳤다.
유운 역시 마음이 좋지 않았으나, 먼저 장노를 달랬다.
“진정하십시오, 장 노야. 옛말에 다른 이의 어리석음에 화가 난다고 자신의 마음을 해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휴. 속이 상해서 그만. 죄송합니다.”
“세상 모든 일이 성현 말씀대로, 정의롭게 흘러가지는 않을 겁니다.”
유운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니, 책 밖의 세상을 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요. 이곳에서 말입니다.”
비록 서촌은 작은 마을이나, 온전히 만서각주의 영향 아래에 있는 땅.
유운 덕분에 무인들이 사고를 치는 일도, 과도한 세금에 고통받는 일도 없었다.
“모두가 맹주가 되고, 가주가 되어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지요, 모두가 그럴 수는 없지요.”
장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쩐지 아쉬웠다.
‘공자님이 조금 더 욕심을 내신다면… 아니야, 아니 될 말이지.’
머리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가슴은 자꾸만 꿈을 꾸었다.
* * *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지요.”
“지도 감사합니다, 주군.”
설영이 깊게 허리를 숙인 후, 가검을 장비대에 수납했다.
“제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 설 사부와의 비무로 인해 본가 무공에 대한 이해가 크게 늘었습니다.”
설영은 백리 무공에 조예가 깊은 무사부.
덕분에 백리팔검, 웅풍십이검, 숭정현검같은 주요 검술은 물론 비격산타와 같은 박투술까지 배울 수 있었다.
“아닙니다, 중간부터는 제가 감히 공자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내공을 쓰지 않고 초식만 겨뤘으니 그러한 것 아니겠습니까.”
유운이 빙긋 웃자, 설영은 머뭇거렸다.
“혹시…, 아닙니다.”
심하게 밀릴 때, 자신도 모르게 살짝 내공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렇게 검을 맞댈 때, 느껴지는 은은한 힘.
‘겉보기로는 내공이 없으신 듯한데.’
관자놀이 부위에 있는 태양혈도 밋밋하고, 무인 특유의 기세도 없다.
온몸의 기를 갈무리한 절대 고수가 아닌 한, 내공을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는 유운의 심법이 가진 특성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조화무궁선법.
한 부위에 내공을 집중하는 게 아니라, 다 같이 성장하는 방식이니.
특정 부위가 솟아오르는 일 따위는 없었다.
* * *
거암과의 외공 수련도, 설영과의 비무도 끝난 저녁 시간.
유운은 두루마리를 들고 고민에 빠졌다.
‘실력이 정체되고 있어.’
백리세가의 무공은, 적어도 초식만큼은 누구보다 더 깊게 이해했다.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내공을 써서 싸워야 하는데.
‘내키지가 않는구나.’
자신의 내공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정확히 모르는 데다, 혹여 싸우다 내공 수발에 실패라도 한다면?
‘작은 실수로도 피를 볼 수도 있지.’
설영을 다치지 않게 할 자신이 생길 때까지, 시도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관심 동영상을 재생합니다.]
【수련검법 시연】
…
..
.
‘아아아…!’
유운은 매화향 가득한 검술을 보며 다시 한번 감탄했다.
매일 저녁, 이 경지에 도달하겠다며 다짐하지만.
여전히 멀기만 했다.
‘쯧. 무언가 새로운 수련법이 필요하거늘.’
유운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어지간한 문파의 기본 검술은 대부분 다 익혔다.
하지만 무공의 본질은 ‘기술’이 아닌 ‘사람’.
└ 용 사형, 저의 천하삼십육검이 어떻습니까?
└ 방 사제, 종남의 검은 묵직한 게 특징인데 그리 방정맞게 휘둘러서야 되겠나?
└ 상대의 눈을 현혹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 사제, 내 생각에는 말이야….
누군가 올린 수련 동영상.
사형제들이 ‘대화방’이라는 놀라운 기능을 통해 사제의 수련에 동참하니.
동작 하나하나를 같이 고민하고, 돕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저리 대화할 사람이 있다니. 실로 부럽구나!’
학사이기에 오히려 더 잘 안다.
일방적인 가르침만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깨달음이 있다.
그러니 책은 물론 동영상으로도 부족하다.
‘살아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백리세가의 어른들은 그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전까지 서책을 통해 기본 무공을 곁눈질한 게 전부였다.
‘…스승이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유운은 마침내 자신의 속마음을 깨달았다.
배우고 싶다.
소통하고 싶다.
같이 웃고, 떠들고, 고민하고, 발전하고 싶다!
사형제들과 같이 검을 수련한다니, 상상만 해도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유운의 입가에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새어 나왔다.
‘매번 같은 방법을 시도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수야 없는 법이지.’
유운은 두루마리를 잘 보이는 곳에 올려놓았다.
정확히는, 두루마리가 유운을 잘 볼 수 있도록 했다.
‘이 기능이 과연 작동할까?’
지난 댓글 중에 단서가 있었다.
└ 좋다, 내 직접 보여주지!
노인이 만들어냈던 복잡한 문자 덩어리!
실시간으로 찍고, 보여주었다는 것은…
‘나 역시 동영상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지.’
가장 유력한 후보는 [ 녹화 ] 그리고 [ 방송 ] 기능이었다.
유운은 그중에 방송을 선택했다.
[신규 방송 채널을 생성합니다.]
[영상 초점을 맞추어주십시오.]
…
..
.
[중계를 시작합니다!]
“오오…! 된다, 돼!”
유운은 두루마리를 확인하고 환호했다.
커다란 화면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유운은 검을 들고 자신의 모습을 ‘촬영’했다.
“나도 동영상을 만들 수 있다니? 그것도 이렇게 바로!”
한 시진에 걸친 수련 후.
유운은 동영상, 아니 방송의 조회수를 확인했다.
두근두근.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내 영상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많이 부족하다고 구박할까? 아니면 힘내라고 응원해줄까?’
내심 기대가 컸는데.
[시청자 수 : 0]
‘……!’
유운의 어깨가 살짝 처졌다.
‘그래,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지.’
유운은 녹화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위로했다.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으니, 이것만 해도 크게 남는 장사라고.
하지만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시청자 수 : 0]
[시청자 수 : 0]
‘…….’
당연히 ‘댓글’도, ‘대화방 참여자’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동영상으로 만들어서 ‘도서관’에 올려보았지만, 마찬가지.
[조회수 : 0]
‘…하하하. 다른 분들에 비하면, 나는 뭐 아기나 마찬가지니까.’
유운은 어깨를 폈다.
생각할수록 그게 맞았다.
기초 무공을 시연하는 무인조차 적어도 백 년 이상 수련한 신선.
자신처럼 보잘것없는, 초보도 못 되는 수련자의 영상을 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유운은 욕심을 버리고 홀로 수련을 계속했다.
휘리릭. 휘익!
매일 저녁 다양한 검술 동영상을 보며 검술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자신의 수련 장면을 녹화하고, 방송하면서 점검했다.
가끔 힘이 빠질 때면, 화산제일검의 검술을 보며 기분을 전환했다.
‘나도… 언젠가는!’
그 때문일까.
연관 동영상에 유난히 화산파의 검술이 많이 떴다.
【육합검법】
【설매검법】
【벽옥장법】
…
..
.
‘확실히 결이 같아.’
비록 깊이는 화산제일검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무공의 분위기만큼은 흡사했다.
유운은 화산의 무공 위주로 수련을 했다.
‘계속 보다 보니 초식은 확실히 알겠어.’
타고난 오성과 명안명심법 덕분에 무공의 형(形)은 충분히 익혔다.
문제는 내공.
‘과연 될까?’
화산파 무공은 다른 동영상들과 달리 하나같이 자막이 막혀있었다.
화산파의 심법을 알 수 없으니, 자신의 심법을 쓸 수밖에.
‘다소 위험하지만…신의 스승님을 믿자!’
[ 조화무궁선법 ]
열 개의 단전이 서로 조화를 이루니.
세상 어떤 무공과도 어울릴 수 있고, 그 한계 역시 없다!
만수신의의 확신에 찬 말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여느 때처럼 수련하고, 방송하던 때였다.
[새로운 시청자(1명)가 입장하였습니다!]
‘…마침내 왔구나!’
유운이 속으로 환호를 터트리던 때였다.
└ 화산파 신규 문도 모집!
└ 선계에 속한 신선이면 누구나 입문 가능!
갑자기 길고 긴 문구들이 촤르륵 올라왔다.
└ 입문 후 10년 내 육합검법 완전 습득 보장!
└ 입문 후 50년 경과 시 무조건 매화단 증정!
‘오, 오십 년?’
매화단이 뭔지는 모르지만, 절대 받고 싶지 않았다.
└ 시선 집중! 무공 성취도가 뛰어난 제자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혜택!
└ 혜택 1) 소림에서 직수입한 대환단 증정!
└ 혜택 2) 이십사수매화검법 전수 보장!
‘이십사수매화검법!’
유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아아아.’
조그맣게 쓰여 있는 글씨를 보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 (단, 입문 후 100년 경과 필수).
└ (또한 재능 부족으로 인한 미수료에 대해, 본 파는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음).
길고 긴 문구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 ‘기재’, 혹은 ‘수재’라고 불렸던 정도의 재능만 되어 충분!
└ (단, ‘천재’ 이상의 재능 시 가산점 부여!)
└ 태양지체, 태음지체 환영!
└ 천무지체 대환영!
└ 삼음절맥, 구음절맥도 즉시 치료 및 입문 가능!
└ (단, 천살성의 경우 정신과 의원의 진단서 첨부 필수).
└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지금 바로! 바로 입문하세요!
마지막은 사기꾼 약장수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뭐, 뭐지 이거?”
유운이 넋을 잃고 바라볼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