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15화 (15/114)

제15화

검을 논하다 (6)

번쩍!

“차앗!”

유운이 기합과 함께 검을 뽑았다.

우수수.

검이 일으킨 바람에 나뭇잎들이 떨어졌다.

휘리릭.

검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자, 나뭇잎들이 물결치듯 휘돌았다.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던 수련.

평소였다면 이쯤 멈추고, 혼자서 고민을 했겠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시청자 수 : 1]

덕분에 고요했던 연무장에 활기가 돌았다.

- 옳지, 잘한다. 제1초식 자축합토, 그 초식은 그리 사용해야지!

유운이 수련하는 육합검법을 보고 흥에 겨워하는 노인이 있었으니.

- 껄껄껄. 혼자 수련한 네가 답답한 이대 제자놈들보다 훨씬 낫구나!

바로 매화검선이었다.

분명 지난번 헤어질 때 했던 말은 이러했다.

- 간간이 들러서 보아주마.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매일 찾아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어린 것이 벌써 검의 형(形)이 아니라 의(義)를 이해하고 있구나!’

겉으로 보이는 초식의 형태나 변화에 집착하지 않고, 속에 숨어있는 뜻을 이해하고 있으니.

어지간한 제자들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을 해도 해내지 못하는 일이었다.

“어르신, 오늘은 유독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유운이 빙그레 웃으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 껄껄, 좋지. 좋아.

유운에게 말은 안 했지만, 오늘은 아껴놓았던 매화주까지 꺼내 한잔했다.

알딸딸한 기분으로 흡족하게 웃었다.

‘오성도 매우 뛰어나고, 예의도 바르고, 열정까지 넘치니!’

옆에서 지켜보니 알 수 있었다.

유운이 검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나도 그랬던 때가 있었지.’

벌컥.

매화검선은 한잔 더 들이키며 회상했다.

아주 오래전, 화산에 처음 입문했을 때.

그리고 천하제일을 목표로 달릴 때.

그때의 자신도 유운처럼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그리 좋았던 기분이 잠시 가라앉을 때가 있으니.

휘리릭!

육합검법 수련을 끝낸 유운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열심히 수련하다 보면, 언젠가는 화산제일검, 그분을 뵈는 날이 오겠지요?”

아련한 그리움과 동경으로 가득한 얼굴이었다.

- 사실 말이다, 내가….

매화검선은 몇 번이나 진실을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아니, 아닙니다. 그분이라면 고작 이 정도 수련으로 만족하실 리 없지요. 지금도 하늘의 끝에서, 세상을 좀먹는 어둠과 싸우고 계시겠지요!”

- 그, 그렇겠지?

매화검선은 슬그머니 술잔을 치웠다.

‘입이 찢어져도 하선고의 동향을 염탐하다가 왔다고는 말 못 해!’

유운이 워낙 애늙은이처럼 예의가 발라서 잠시 잊고있었다.

유운은 고작 17살.

한창 영웅을 동경할 나이였다.

‘나도 어릴 때, 아니 젊을 때까지는 그랬지.’

자신의 영웅이 협행을 할 때마다, 사형제들을 붙잡고 흥분해서 떠들고는 했다.

유운의 상태가 딱 그랬다.

‘아니, 조금…, 아니 많이 심한 게 문제지.’

그의 머릿속 화산제일검은,

천하무적, 고금제일, 절대검신!

해도 달도 베는 신급 강자!

그러니 어찌 말하겠는가?

동영상을 찍을 때는, ‘불타는 검은 용’에게 몸을 빼앗겼다고.

겉멋만 잔뜩 들어서 우수에 젖은 척했다고.

부담스러워서 어깨와 허리가 구부러질 지경이었으니.

‘잘해주마, 내가 더 잘해주마.’

매화검선은 그리 다짐하며 유운을 지도했다.

- 확실히 기본기가 뛰어나구나. 어릴 때부터 아주 착실하게 다듬은 티가 나. 자네의 스승께서 잘 가르치셨어.

매화검선의 말에 유운이 멈칫했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동영상을 보고 혼자 독학했으니, 정식 스승은 없다고?

본격적으로 무공에 입문한 지 고작 한두 달 되었다고?

“그, 그것이…. 연이 닿아 고인에게 잠시 가르침을 받은 적은 있습니다.”

- 그분은 그런데 어디 계시느냐? 이런 훌륭한 제자를 계속 가르치지 않고.

“연이 다했다는 말씀과 함께 떠나셨습니다. 어차피 저는 정식 제자도 아니었으니까요.”

어린 시절이 떠올랐던 것일까.

유운은 쓸쓸한 표정으로 되뇌었다.

- 허어. 그런 사정이 있을 줄이야.

매화검선은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다.

‘참으로 안타깝구나. 명사 밑에서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으면, 환하게 빛날 아이이거늘.’

길바닥에 황금이, 아니 보석이 굴러다니는데 아무도 못 알아보는 꼴이 아닌가?

내 것이 아님에도 아까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물론 두루마리만으로도 비할 데 없이 큰 기연(奇緣) 이긴 하나….’

극히 드물긴 하지만, 하계의 인간이 두루마리를 얻어 신선계를 엿보는 경우는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운명을 바꾸기에는 차고 넘쳤다.

분명 그러한데….

만약 자신이 여기서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다듬는다면?

꿀꺽.

매화검선은 목마른 표정으로 침을 삼켰다.

윗사람 눈치만 보고, 재능은 부족한 녀석들이 아니라, 영특하고 열정 넘치는 ‘진짜’를 가르친다면?

마른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무공을 깨우치는 ‘천재’를 가르친다면?

자기도 모르게 욕심이 났다.

‘아서라, 아서.’

매화검선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아는 한, 신선이 인간을 제자로 들인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가 속한 곳이 어디던가?

화산파!

구대 문파 중에서도 문규가 가장 엄격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허허. 등선하면서 다 놓은 줄 알았건만.’

놓아주어야 하는데.

놓기가 어려웠다. 아니 싫었다.

“공자님, 오늘도 소화가 왔어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소화가요. 여기 시원한 물과 수건이… 아앗!”

신나게 달려오던 소화가 기우뚱하더니 넘어졌다.

들고 있던 물동이가 허공을 날았다.

촤르륵!

소화는 물론, 소화를 잡아주려던 유운까지 흠뻑 젖어버렸다.

“아아앗! 죄, 죄송해요, 공자님. 제가, 제가 멍청하게…!”

소화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떨었다.

아무리 친하게 지낸다 한들, 유운은 하늘 같은 백리세가의 자제.

그런 유운을 물에 젖은 생쥐로 만들다니?

엄벌을 내린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달구어져서 김이 났는데. 시원하고 좋구나.”

유운은 오히려 빙그레 웃더니, 수건으로 젖은 소화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래도 너는 조심하거라. 어린아이는 쉽게 고뿔에 걸릴 수 있으니.”

“고, 공자님, 흑흑.”

커다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분위기도 잠시.

소화는 이내 씩씩하게 몸을 털더니, 킥킥 웃었다.

“히히, 물에 젖은 모습도 멋있어요, 공자님. 건강하고, 똑똑하고…. 역시 우리 공자님이 최고예요.”

“너도 할 수 있단다. 이 기회에 같이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는 게 어떻겠느냐?”

“고, 공부! 우, 운동!”

소화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하얗게 질렸다.

“제, 제가 조금 바빠서요.”

“네가? 지금은 한가한 시간 아니더냐?”

이맘때면 입에 당과를 물고 만서각의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니.

일명 소화의 시간으로 유명했다.

“그, 그건…! 아, 맞다. 빨랫감을 줄에 널어놓았는데. 깜빡했네요, 히히!”

소화가 토끼처럼 깡충거리면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천천히 가려무나. 옷 갈아입는 것 잊지 말고!”

유운이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본 매화검선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저리 속이 깊단 말인가?’

어리지만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신분이 높아도 허물없이 사람을 대한다.

‘참으로 온유하고, 순후한 눈이로구나!’

매화검선은 유운의 눈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진정 탐나는 것은 유운의 재능이 아니라 인성, 즉 됨됨이였다.

어딜 가서 이런 아이를 다시 찾을 수 있겠는가?

‘본래라면 아니 될 일이나….’

선계에 오른 이들조차도 까다롭게 가려 받는 곳이 화산이었다.

하물며 하계의 인간을 제자로 받는다니?

매화검선의 마음속에서 갈등이 일었고, 마침내 한쪽이 이겼다.

‘무공을 손봐주는 정도라면, 장문인께서도 봐주시겠지.’

나뭇가지도 매화검선의 손에 들리면 천하 신병보다 무서운 법.

하물며 매화검선이 직접 내리는 가르침이다.

상승무공의 구결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물이었다.

‘마음이 이리 편한 것을 보니, 옳은 결정이 맞는 듯하구나. 암, 그렇고말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이지만. 기분이 흡족했다.

매화검선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 나를 잠시나마 스승이라고 생각하거라.

“……!”

유운은 못이 박힌 듯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쿠우웅.

유운이 그 자리에서 절을 올렸다.

- 자, 자네. 그건….

다행히 정식 스승으로 삼을 때 아홉 번 절하는 예법은 아니었다.

“비록 속한 세상이 다르고, 정식 제자의 연을 맺은 것도 아니지만, 스승님께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겠습니다.”

- ……!

화려하지 않으나 진심 가득한 말.

매화검선은 어쩐지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 커험. 너무 기대 말거라, 나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니.

유운은 빙그레 웃으며 두 손을 모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수련이 이어졌다.

- 허어. 초식 이해도는 그렇다 치고. 어찌 이리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을꼬?

매화검선이 유운의 시연을 보며 감탄했다.

육합검법의 초식이야 십 년쯤 수련하면 따라 할 수 있다.

유운 같은 천고 기재라면, 검의 숨은 뜻까지 파악해서 자유롭게 활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공심법은 다르다.

검법에 딱 맞는 독문 심법은 결코 공개하지 않았는데.

솨아아아…!

유운이 검을 휘두르는 데로 기가 움직이니.

파바바밧!

전후좌우 그리고 상하.

검기가 여섯 방위를 완벽하게 점하니, 순간 하늘에 여섯 개의 연꽃이 피었다.

- 어찌 알았느냐?

매화검선이 유운에게 물었다.

- 꾸짖거나 따지려 함이 아니니, 부담 없이 말하거라.

“무슨 말씀이십니까, 스승님?”

- 이 검법의 본질 말이다.

“……?”

- 화산의 뿌리는 도가이나, 육합검법만은 다르니라.

육합검법은 기본적으로 하늘의 움직임을 본떠서 만든 검법이었다.

- 자축합토, 인해합목, 묘술합화, 진유합금, 사신합수, 오미합화.

12간지가 서로 상생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검법으로 승화시켰다.

여기까지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

- 그러나 검법의 창시자는, 사실 불가에서 귀의한 고인이시니. 그 안에 불가의 깨달음을 담았다.

내공의 흐름조차 그러하니.

육합법검은 도가 문파의 무공임에도, 불가의 향기가 진하게 묻은 검법이었다.

“육합검법의 검로를 따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 …허어!

유운의 말에 매화검선이 탄식을 토했다.

- 내공 심법을 공개한 적도, 가르쳐 준 적도 없거늘. 스스로 깨달았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스승님.”

매화검선은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감탄을 넘어서 경악할 지경이었다.

- 화산의 심법이 아닌, 너희 스승께서 가르치신 심법으로 말이냐?

“그렇습니다.”

- 각 문파마다 내기의 흐름이 다르거늘, 어찌? 혹시 나에게 심법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

“알겠습니다. 그 구결은….”

- 아니, 구결은 말하지 말거라. 각 문파의 비전이거늘 어찌 탐하겠느냐?

“……!”

- 그저 심법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나에게 알려주면 족하다.

“그러하시다면….”

유운은 조화무궁선법의 핵심 개념을 설명하였다.

- 허어. 현묘하구나, 참으로 현묘해!

매화검선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신선 중에서도 최강인 그조차 깊은 생각에 잠길 정도로, 놀라운 깨달음이 담겨있었다.

- 상상도 못 한 심법이다. 유사 이래 이러한 심법이 있었던가? 어찌 사람이, 아니 신선이 이런 심법을 만들었다는 말인가?

유운은 몰랐지만, 자존심 강한 매화검선이 타 문파의 무공을 그리 칭찬한 것은 처음이었다.

다른 신선들이 알면 뒤집힐 일이었다.

- 실로 위대한 심법이다. 자하신공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할지도 모르는…!

“그렇다면 이 심법으로 화산의 무공을 익혀도 괜찮겠는지요?”

- 괜찮다마다. 이미 네가 증명하지 않았느냐?

조화무궁선법이 육합검법과 어우러지니, 원래부터 한 몸인 듯 자연스러웠다.

- 본산 제자가 아니라 구결을 전수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참으로 잘되었구나!

매화검선의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떠올렸다.

‘여차하면 장문인의 엄명조차 어기고 구결을 전수하려고 마음먹었거늘.’

그런데 본래의 심법 못지않은, 아니 오히려 더욱 뛰어난 심법을 익히고 있을 줄이야!

진심 가득한 말에 유운 역시 뿌듯했다.

‘신의께서 이걸 들으셨어야 하는데!’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으나, 홀로 내공의 끝을 탐구하길 한평생.

마침내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는 내공심법을 만들어낸 것이다.

“스승께 누를 끼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하는 말마다 어찌 이리 이쁜고. 허허.

매화검선은 흡족하게 웃으며 기꺼이 깨달음을 나누었다.

- 그리 검을 펼치는 것도 나쁘지 않으나.

유운이 상상 속의 적을 대상으로 대련을 펼치면, 가상이 적이 되어주었다.

- 상대가 인해합목의 12번째 변화에 오미합화의 5번째 변화를 섞어서 공격한다면?

“……!”

6개의 초식이 각기 12개의 변화를 가지는데.

72가지의 변초를 다시 조합한다면?

변화의 수는 무궁무진!

“제가 못 보았던 수가 있었군요!”

유운은 자신의 약점을 깨달을 때마다 진정으로 즐거웠다.

솔직히 그동안 설영과의 대련은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았다.

바둑으로 치면 서너 점 깔아주고 싸우는 격이었다.

그래도 유운은 다섯 수, 여섯 수 앞을 읽으니, 겨우 두어 수 앞만 읽는 설영이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자칭 화산파 최약체라는 스승님은 달랐다.

말도 안 되지만, 가끔은 십여 수, 이십여 수를 미리 읽는다는 느낌까지 받았으니.

‘실로 내가 큰 복을 받았구나!’

매화검선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감당 못 할 그릇.

하지만 그였기에 유운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렇게 평화가 그렇게 인연이 이어지니.

후드득.

성마른 여름날,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