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검을 논하다 (7)
“허어. 벌써 종이가 다 떨어졌군요.”
장노가 붓을 내려놓았다.
“백추지 말씀이십니까, 장 노야?”
“그렇습니다, 공자님.”
백추지(白綿紙)는 닥나무의 껍질을 벗겨서 잿물로 찌고 말린 후, 풀을 먹여 다듬질해서 만드니.
오직 동방에서만 나는 귀한 종이였다.
“백추지가 없으면 좋은 필사본을 만들 수가 없거늘.”
유운이 안타까운 듯 말하며 책을 덮었다.
책이 오래되면 삭아서 못쓰게 되니, 주기적으로 책을 옮겨 적고는 했다.
백추지는 하얗게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유명했다.
학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상등품의 종이였다.
“제가 다시 다녀오겠습니다, 공자님.”
“아닙니다, 벌써 몇 번이나 외유를 다녀오셨는데. 그러다 병 나십니다.”
유운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장노의 손을 잡았다.
“그렇지 않아도 장 노야의 흰머리가 부쩍 늘어서 마음에 걸리던 차였습니다.”
따듯한 말에 장노는 차마 더 말리지 못했다.
“그럼 다른 사람에게 시키는 건 어떻겠습니까?”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이런 사소한 일에 어찌 각주이신 공자께서 나선다는 말씀이십니까?”
“다른 사람 누구에게 맡길까요?”
“그, 그것이….”
유운이 빙긋 웃으며 말하자 장노가 말을 잇지 못했다.
눈 감으면 코 베이는 세상.
만서각에서 종이 질 차이를 구분할 눈을 가진 이는, 유운과 장노밖에 없었다.
“쉬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장날이니, 잘하면 멀리 안 나가도 될지도 모릅니다.”
서촌은 시장이 있을 정도로 큰 마을이 아니었다.
다행히 오늘은 장이 서는 날.
유운이 채비를 마치고 나서려는 때였다.
- 어허. 늙으면 죽어야지.
매화검선이 갑자기 한탄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스승님?”
- 세상은 변하는데, 나는 제자리에 있으니. 세상 돌아가는 걸 통 따라잡지를 못하겠구나.
“……?”
- 요즘 세상은 어찌 변했을꼬. 적어도 천년은 흐른 듯한데….
매화검선이 돌려 말했지만, 유운은 알아듣고 빙그레 웃었다.
“바깥세상, 아니 이쪽 세상이 궁금하십니까?”
- 뭐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니지만. 사양할 일도 아니지 않느냐?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다니, 이 얼마나 귀한 기회인가?
“그럼 이번 기회에 한번 보시지요.”
유운은 슬쩍 웃으며 두루마리를 품에 집어넣은 후, 바깥이 잘 보이도록 옷깃을 여몄다.
[‘음성 모드’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음성이라. 좋구나.’
새로운 기능에 감탄할 때였다.
“저도 갈래요, 장터!”
그때 소화가 냉큼 따라붙었다.
“일은?”
“청소랑 식사 준비랑 모두 다 끝났어요. 놀 사람도 없어서 심심해요.”
소화가 짐짓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녀석.”
물론 또래가 없기도 하지만,
“설 사부가 없어서 심심했구나?”
“헤헷. 뭐 꼭 그런 것은 아니고요.”
본래라면 유운을 호위하는 설 사부랑 투덕거렸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며칠 전 설영에게 본가에서 호출이 왔다.
“이게 말이야, 똥이야?”
“무슨 일이십니까, 설 사부?”
“늙은이들이 노망이 들었나. 순회 무사부인데 왜 한곳에 머무르냐고 시비입니다.”
설영은 편지를 구기며 말을 이었다.
“귀찮게 굴기는.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이 기회에 제 소속을 명확히 하고 오겠습니다, 주군.”
설영은 그리 말하고 본가로 떠났다.
“사부님, 소화랑 같이 가면 아무래도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죄송하지만….”
유운이 말하면서 슬쩍 두루마리를 내려놓으려던 때였다.
- 나도 데려가게!
매화검선이 다급하게 외쳤다.
“나도, 나도 데려가요!”
마지막 ‘죄송’만 들었는지, 소화 역시 같이 외쳤다.
- 나도 가겠네, 나도!
매화검선은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너무 궁금했고.
“갈래요! 갈래요! 꼭 갈 거예요!”
소화는 너무너무 심심했다.
- 가겠네!
“갈래요!”
한 명이 말하면 다른 하나가 질세라 말하니.
메아리와 같았다.
- 나도!
“나도!”
두 사람이 동시에 외치자, 유운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하하!”
늙은 스승과 어린 소화, 모두 천진한 아이 같지 않은가?
“호위 없이 괜찮으시겠습니까, 공자님?”
장노가 조금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하필이면 거암까지 산으로 훈련하러 가서, 마땅히 호위할 사람이 없었다.
“고작 집 앞에 마실 나가는 정도입니다.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유운은 장노를 안심시킨 후, 두 사람을 데리고 떠났다.
* * *
“와, 사람이 엄청 많아요!”
- 호오. 보기보다 번화한 성읍이로구나.
마을은 상인과 물건을 보는 손님으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오랜만에 대형 상단이 방문했나 봅니다.”
외부 상단이 오가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
서촌뿐 아니라 인근 마을 사람들까지 몰리니 장의 규모가 평소보다 컸다.
휘리릭, 휘릭!
단검을 하늘에 던졌다가 받는 기예를 선보이는 이도 있었고.
화르르…!
즉석에서 육즙 가득한 고기 요리를 파는 이도 있었다.
두 사람은 여러 구경거리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공자님, 공자님. 저것 좀 봐요. 예쁘죠?”
소화는 노리개를 보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고.
- 어허. 저것은 무슨 가죽으로 만든 외투인가? 난생 처음 보는데.
매화검선은 붉은 가죽 갑옷을 보면서 물었다.
“아, 저것은 ‘적랑’이라는 마수(魔獸)의 가죽입니다. 질기고 튼튼해서 사냥꾼과 무인 사이에서 인기가 좋지요.”
유운은 소화의 눈치를 보면서 작게 말했다.
- 마, 마수? 그게 대체 무엇이냐?
마침 가는 곳에 답이 있으니.
유운은 마수 상인 앞으로 다가갔다.
- 마, 맙소사. 세상에 저리 생긴 동물이 있단 말인가?
두루마리 너머. 매화검선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머리가 세 개 달리고, 눈이 붉으며, 가죽에는 뾰족한 가시가 가득했다.
그 외에도 날개 달린 고양이, 사람을 닮은 돼지 등 기괴한 동물이 많았다.
“설마 스승님의 세계에는 마수가 없습니까?”
유운이 놀랍다는 듯 물었다.
- 내 살아생전에는 물론, 선계에 온 이후에도 본 적 없네.
신성한 힘을 내뿜는 영물이라면 모를까, 저런 괴물을 본 적은 없다.
- 설마…, 자네 세계의 무인들은 저런 녀석들을 상대하나?
“당연하지요. 무인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 다른 것과는 안 싸우고?
“무인이 그럼 마수를 막지 않으면 뭐를 막는단 말입니까?”
유운의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
매화검선은 말문이 막혔다.
마도인, 사파인 같은 대답은 여기서는 정답이 아닌 듯했다.
- 허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시간이 흐른 것이더냐? 참으로 놀랍구나.
매화검선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 어서, 어서 들어가 보자꾸나. 그 마수라는 것이 궁금하구나.
동시에 소화도 같이 유운을 졸랐다.
“공자님, 공자님. 저기 아주 맛있는 가게가 있대요. 같이 가요.”
두 노소가 같이 조른다.
- 여기부터 가세!
“저기부터 가요!”
둘 다 다급한 목소리였지만.
“참으십시오. 공무가 우선입니다.”
“기다려라. 공무가 우선이다.”
한번은 작게, 다음은 크게.
유운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 그, 그렇지? 그게 맞지….
“그, 그래요. 그래야죠.”
두 사람 다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사이, 유운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천하에서 가장 좋은 종이만을 취급하는 만보지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중년의 상인이 입구까지 나와서 맞이했다.
배는 살짝 나왔으나, 치장은 과하지 않고, 태도는 정중하니.
나름 신뢰가 가는 상인이었다.
“어떤 종이를 찾으십니까?”
“서책에 쓸 종이를 찾습니다. 가능한 최고급품이면 좋겠군요.”
유운은 다른 것은 몰라도 책에 대해선 돈을 아끼지 않았다.
“호오. 최고급품이라. 마침 귀한 물건이 들어왔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상인, 금만보는 하얀 종이 묶음을 가져와서 풀었다.
비단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운 하얀 종이였다.
‘백추지!’
딱 원하는 것을 찾은 유운이 눈을 빛냈다.
“직접 보신 적은 없어도 아마 이름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 종이는 백추지라고 합니다.”
유운이 종이를 들어 올려 살짝 잡아당기고, 매만졌다.
팅. 팅.
종이는 질기고, 견고하며, 매끄러웠다.
“이 종이는 만드는 법부터 다릅니다. 나무를 체로 뜨지 않고 물에 흘려서 만드니, 종이에 얼룩도 없고, 품질이 균일합니다.”
금만보의 입은 기름이라도 칠한 듯 매끄러웠다.
“잘 찢어지지 않고 오래가는, 그야말로 최상품의 종이입니다. 저렴한 가격, 묶음당 40냥으로 드리겠습니다.”
금만보는 믿음직한 얼굴로 말했다.
‘다 사실이니까. 딱 하나만 빼고.’
금만보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하등품을 상등품으로 속여 파는 상인은, 싸구려 약장수밖에 되지 못한다.
상등품을 최상등품으로 팔아먹기!
그것이야말로 큰 상인이 나아갈 길이 아니겠는가?
속으로 뿌듯한 미소를 지을 때였다.
“백추지도 맞고, 말씀하신 제조법도 맞고 다 좋습니다. 다만, 품질에 비해 가격이 과도하군요.”
유운의 말에 금만보가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손님? 이 물건은 최상품으로….”
“최상품은 아니지요.”
“혹시나 흠을 잡아서 가격을 깎으시려는 것이면….”
유운이 종이 표면을 살짝 두들기며 말했다.
“백추지를 만들 때는 열심히 다듬이질을 해야 합니다. 대장장이가 쇠를 두들기듯 말입니다.”
“그렇게 듣기는 했습니다만.”
“그러니 다듬이질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에 따라 품질이 달라집니다. 천양지차로요.”
“……!”
“그런데 이 종이는 매끈하긴 하나, 기름종이처럼 빛이 나지는 않는군요.”
금만보는 식은땀만 흘릴 뿐, 변명을 할 수 없었다.
“이 정도 종이면 상등품이니, 묶음당 20냥이 적당합니다.”
금만보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가격이 오르는 추세라, 상등품도 25냥 정도에 팔지만, 도저히 따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온 김에 먹과 붓, 서책을 묶을 끈도 같이 사겠습니다.”
“더, 덤으로 드리겠습니다.”
상인은 신용이 생명.
자칫 소문이 밖으로 퍼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아닙니다, 그럴 수야 없지요.”
유운은 빙그레 웃으며 제 가격을 주고 샀다.
‘그, 그래도 이 정도면 잘 막은 거야. 큰 손해는 아니니.’
금만보가 아쉬운 마음을 달랠 때였다.
유운이 떠나면서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거 아십니까? 상등품과 최상등품의 차이를.”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재료도 같고, 방법도 같고, 심지어 제작한 공방 역시 같다. 그러니 품질도 똑같아야 할 터인데.
“마음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
“누군가는 최선을 다해 정성 들여 다듬이질을 했고, 누군가는 남이 볼 때만 하는 척하고, 마음을 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운의 눈이 마치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잠깐은 모를 수도 있고, 속여 넘길 수도 있습니다. 허나 결국은 모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말을 하는 유운의 모습은 마치 이야기책 속의 성현과 같았다.
“부디 길게 보십시오. 사람을 얻으십시오.”
“……!”
금만보는 뒤통수를 맞은 듯 큰 충격을 받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작은 속임수로 큰 이익을 얻었다고 기뻐했다.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밤잠을 설쳤다.
‘…사람이라고?’
만약 유운이 무리하게 가격을 더 깎았다면, 그것으로도 부족해 붓과 끈을 공짜로 달라고 했다면.
그럼에도 금만보는 내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원한을 절대 잊지 않고 간직했겠지.’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신기하게도, 값을 후려쳤다는 원한이 남기는커녕 마음이 개운했다.
‘이게 바로 진짜 큰 상인의 길이로구나!’
무인이 겪는다는 깨달음의 순간과 같았으니.
금만보는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몸을 잘게 떨었다.
“공자, 아니 은공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금만보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이대로 놓치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인연이라고 생각하면서.
“은공이라니요. 과분한 말씀입니다. 저는 백리유운이라고 합니다.”
“백리세가!”
금만보의 눈이 더욱 커졌다.
만서각의 주인.
힘없는 막내 공자.
하나 본가라면 몰라도 적어도 이 마을에선 최고 권력자였다.
아니, 명문세가 소속이 아닌 작은 상인에게는 막내 공자라도 하늘처럼 두려운 존재였다.
‘내가 공자였다면 달랐겠지.’
당연히 신분을 밝히고, 값을 후려쳤으리라.
아니 온갖 이유를 들어서 다 빼앗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저 귀한 신분의 젊은이는, 아니 소년 학사는….
‘허어. 내가 그간 인생을 헛살았구나.’
금만보는 오래도록 그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젊은이, 아니 소년 학사가 준 깨달음을 곱씹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