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18화 (18/114)

제18화

검을 논하다 (9)

“어떤 쥐새끼가 우리의 행사를 방해하는 거냐!"

덩치는 욕설을 내뱉으며 유운을 떨쳐내려 했지만.

‘무슨 힘이…!’

겉보기로는 닭 모가지 비틀 힘도 없는 백면서생.

하지만 돌덩이에 끼인 듯, 팔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내가 키가 크고, 힘이 센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유운은 덩치의 팔을 풀어주며 말했다.

“어린아이와 노인, 그리고 여인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 힘을 이리 무도하게 쓰시다니요.”

친구를 괴롭히는 학생을 꾸짖은 선생 같은 모습이었다.

“너 이 새끼….”

덩치는 벌겋게 달아오른 팔목을 주무르며, 유운을 노려보았다.

“우리가 정당하게 돈을 주고 샀는데, 이 노인이 강짜를 부린 것이니. 네 놈이 참견할 일이 아니다.”

덩치의 말에, 몸을 추스른 왕 영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들아,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고작 오십 냥 도박 빚으로 천 냥짜리 장원을 꿀꺽하는 게 말이나 되느냐?”

“거참. 경제를 모르시네. 이자 모르시나, 이자?”

“무슨 이자가 하루에 이 할씩 붙어! 천하의 사기꾼 놈들!”

덩치는 개가 짖는다는 듯 코웃음 쳤다.

‘하필 왕 노인의 아들이 도박이라?’

유운은 도박사 패거리도 의심스러웠다.

서촌은 조그마한 마을이라 도박장도 없고, 돈 많은 이도 없다.

그런데 굳이 여기까지 와서 도박을 한다?

“너희들이 뭐라고 우기든 장원은 우리 거다. 억울하면 정식으로 맹에 따져보든가.”

덩치는 땅문서를 들이밀며 큰소리쳤다.

“백번 양보해서 땅이 당신들 것이라 칩시다. 하지만.”

유운이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민가 주변에 화방을 설치하다니. 이 무슨 무도한 짓입니까?”

유운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화방? 화방이 뭐지?”

“뭐 꽃 가게나 그림 상점 같은 거 아닐까?”

“마을에 상점 생기면 좋지. 나쁠 게 뭐 있어.”

순진한 시골 사람이라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었다.

“화방을 설치하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마을 사람들에게, 화방이 화약과 화기를 다루는 공방임을 미리 알리셨습니까?”

유운의 말에 사람들이 발칵 뒤집혔다.

“뭐, 뭐라고? 화약?”

“미, 미친! 마을 옆에 그런 걸 설치한다고?”

“마, 말도 안 돼!”

분위기가 달아오르며 사람들이 성을 낼 때였다.

“촌구석 무지렁이들이 겁도 없이. 우리가 누군지 모른단 말이냐?”

덩치가 외치면서 상단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불꽃 문양 위로 칼과 채찍이 새겨진 그림!

마을 사람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흑산병단(黑山兵團).

흑산의 패주, 조씨 가문이 운영하는 병기 상단.

조씨 가문은 역사가 오래되었지만, 뿌리가 사파에 있다는 소문 때문에 오랫동안 배척받았다.

그래서일까.

남들이 꺼리는 물품을 주로 취급했으니.

화약, 병기, 독, 마수.

위험한 만큼 이문이 많이 남았고, 적도 많았다.

상단의 사내들은 거칠었으며, 종종 흉흉한 소문도 돌았다.

콰아앙!

덩치가 도를 뽑아서 바닥을 내리쳤다.

“흑산병단의 행사이니라. 감히 너 같은 시골 서생 놈이 참견할 일이 아니다!”

“아니. 저에게는 참견할 자격이 있습니다.”

유운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품에서 호패를 꺼냈다.

백리세가에서 발행하고, 맹에서 인증한 정식 신분증에 적힌 이름은.

백리유운.

“배, 백리!”

“백리세가의 혈육이라고?”

사내들이 주춤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막내 공자니, 뭐니 그건 내부 사정.

바깥세상에서 백리세가의 이름은 무겁고도 높았다.

“백리라!”

그런데 뒤에서 지켜보던 사내는 달랐나 보다.

염소수염의 사내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어디론가 달려갔다.

“행수님께서 행차하신다, 길을 비켜라!”

얼마 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수십 명의 사내들이 도착했다.

‘행수라니!’

흑산병단은 결코 작지 않은, 아니 상당히 규모가 큰 상단.

그런 상단의 우두머리가 이 조그마한 시골에 왔다?

고약한 냄새가 풀풀 풍겼다.

“흑산의 행수, 적인걸이라 하오.”

큰 키. 붉은 비단으로 치장한 화려한 의복. 점잖은 표정.

하지만 누구도 그를 상인이라고 보지 않았다.

“무슨 얼굴이…!”

“어이쿠, 꿈에 볼까 무섭네.”

흉터로 가득해서 본래 피부색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이니.

마을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적인걸이라면….’

분쟁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는 낭인.

하지만 하찮게 여겨지는 낭인 중에도 인물은 나오는 법.

‘적랑쌍도!’

천하의 수많은 낭인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

오죽하면 조 씨가 아님에도 행수를 맡았겠는가?

유운조차 알 정도의 유명인이었다.

“적 대주, 아니 행수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붉은 늑대들을 이끌고, 무인과 마수를 가리지 않고 베니.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실전의 고수였다.

“허허허. 간신히 밥벌이만 하는 필부에 불과합니다. 백리세가에 비하면 보름달 앞에 반딧불에 불과하지요.”

적인걸은 느긋한 표정으로 말하며 껄껄 웃었다.

‘백리세가라.’

얼핏 보면 유운을 높여주는 듯했지만.

나는 피와 땀을 흘려 살아남아 명성을 쌓았지만.

너는 세가의 이름 빼면 아무것도 아닌 놈에 불과하다.

속에는 유운을 깔보는 내용이 가득했다.

“이곳에 화방을 만든다 들었습니다. 왕가장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저희가 돈을 주고 산 장원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사기도박의 증거 따위야 진즉에 없앴을 터.

유운은 다른 부분을 지적하였다.

“상단의 재산은 물론 보호받아야 합니다. 하나.”

유운이 정면으로 적인걸의 눈을 바라보았다.

“위험은 다른 문제.”

“……!”

“화방이 흥하면 흑산병단만 이득을 취하고. 화방에 사고라도 생기면, 그 고통은 마을이 다 같이 겪으니. 세상에 그렇게 불공평한 경우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유운의 말에 마을 사람들이 조금 더 크게 외쳤다.

“옳소!”

“백리 공자의 말씀이 백번 맞지!”

“배우신 분이라 그런가, 속 시원하게 말씀 잘하시는구만!”

다시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채애앵!

채애앵!

새로운 사내들이 검을 뽑아서 사람들을 위협했다.

그 모습에 유운이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처음 검을 배울 때, 스승께 그리 배우셨습니까?”

처음부터 건달이나 악당이 되겠다며 무공을 배우는 자가 누가 있으랴.

다들 협객전의 영웅을 꿈꾸며 검을 잡았다.

“검이란 사람들이 웃고 떠들게 만드는 것이지, 입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

“사람을 겁박하는 검은, 군자의 검이 아니라 소인배의 검이오.”

유운이 준엄하게 꾸짖었다.

“옳지! 역시 공자님!”

“백리세가는 역시 달라!”

마을 사람들이 다시 기세를 탔다.

한 점 부끄러움 없는 기백에 사내들이 주춤할 때였다.

짝짝짝.

적인걸이 여유롭게 박수를 치며 끼어들었다.

“훌륭한 말씀이오. 아주 인상 깊게 들었소.”

“……?”

“얘들아, 뭐하냐? 어서 칼을 거두지 않고. 백리 공자의 말씀 아니더냐.”

스르릉.

사내들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왕가장이라고 하셨소? 고작 장원 하나 얼마나 한다고. 못 돌려줄 것도 없지. 누구의 명이시라고.”

적인걸은 호탕하게 웃으며 땅문서를 왕 영감에게 돌려주었다.

“우와아아아!”

“백리 공자님 만세!”

“역시 백리세가로구만. 내 이리 될 줄 알았지!”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환호했다.

하지만 유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명이라니! 실로 교묘한 단어로구나.’

유운의 말에 감동하여 주인에게 돌려주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백리세가의 위세에 못 이겨 빼앗겼다고 해석할 수도 있었다.

“내 백리 공자의 체면을 보아 이만큼 양보했으니, 공자 역시 나의 부탁을 들어주는 게 어떻겠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평소 백리세가의 명성을 흠모해왔소. 누가 뭐래도 하늘에 떠 있는 태양처럼 명망 높은 무가 아니오?”

무언가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사람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백리의 무인과 겨루는 것이 내 평생의 소원이었는데. 마침 백리의 적손이 여기에 있구려.”

“……!”

여기서 유운이 학사 출신임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저의 무공은 어디에 선보일 정도로 대단하지 못합니다. 선대에 누를 끼치기만 할 뿐이니.”

“지나치게 겸손하신 말씀이시오. 가주님의 직계이신데 무공이 약하실 리가 있겠소?”

“허나….”

“게다가 승패가 무엇이 중요하겠소? 이 적모는, 그저 백리의 검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오.”

겉으로는 너그러운 웃음을 짓고 있으나, 눈은 날카롭게 번뜩였다.

‘결국 말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구나.’

유운은 속으로 탄식했다.

무림(武林).

싸울 무, 수풀 림.

싸움이 숲처럼 흔하고, 숲속마다 싸움이 벌어지는 곳 아니던가?

‘나를 망신 주려는 목적이로구나.’

유운이 대답이 없자, 그걸 다르게 해석했나 보다.

“손해를 감수하고, 공자의 요구를 다 들어주었거늘. 이리 적모의 체면을 봐주지 않을 줄이야.”

적인걸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끝을 흐렸다.

“백리의 이름이 무서우니 힘으로 해결할 수도 없고.”

유운의 행동을 백리세가의 행사라 못 박으니.

오히려 일을 키우는 모양새였다.

“적 대협, 어찌 제가 세가의 이름을 앞세웠겠습니까? 그것은 오해….”

“태생이 무식한 칼잡이라.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못 알아듣겠소.”

털썩.

적인걸은 말을 끊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부하들이 재빨리 의자를 대령했다.

“그저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이 마을에서 기다릴 수밖에.”

“……!”

“불민한 몸이나 흑산병단의 행수이니. 업무도 이곳에서 봐야 할 듯싶소이다.”

적인걸이 의자의 마수 가죽을 쓰다듬으며 눈을 번뜩였다.

‘조씨 가문의 해결사라더니. 작정하고 찾아왔구나.’

유운은 속으로 탄식했다.

“허. 저쪽도 터가 괜찮군. 저기에 마수 공방을 지어도 되겠어.”

“……!”

“……!”

적인걸의 말에 마을 사람들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수.

화약만큼이나, 아니 더 위험한 물건이었다.

특히 마수의 피와 살이 풍기는 냄새는, 또 다른 마수를 부르는 귀물이니.

잘못해서 마수의 피가 누출이라도 되면, 조그만 시골 마을 따위는 흔적도 남지 않을 터였다.

“제가 뭐라 말해도 듣지 않으시겠군요.”

유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설령 여기서 논리로 이겨도 소용없다.

땅은 넓고, 방법은 많으니.

맡은 임무는 어떻게든 해낼 자다.

‘다른 형태의 피해만 늘어날 뿐이지.’

상대가 작정했으니, 피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어떻소? 적모, 여기서 터를 잡고 기다려도 되겠소?”

굶주린 늑대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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