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인연이 이어지다 (1)
“좋습니다. 적 행수 말씀대로, 한 번 겨루어 보지요.”
“고, 공자!”
“백리 공자님! 안 됩니다!”
마을 사람들이 크게 놀라서 외쳤다.
한쪽은 글밖에 모르는 학사.
다른 한쪽은 30년 이상 손에 피를 묻힌 비정한 승부사.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비무였다.
“고, 공자님. 안 돼요! 위험해요!”
소화 역시 눈물을 글썽이며 말렸다.
“어찌 내가 물러날 수 있겠느냐?”
이곳은 서촌, 만서각의 앞마당.
만서각주로서 마땅히 지키리라 다짐했다.
“껄껄, 화통한 모습이 보기 좋소이다. 역시 백리의 직계답소.”
“방식은 어떻게?”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소?”
“그 말씀은?”
“친한 친우들 몇 정도는 초청해야 하니. 한 달 뒤가 어떻겠소?”
“……!”
“보아하니 연무장 같은 것도 없는 듯하니. 비무대도 세워야겠구려.”
적인걸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만인 앞에서 바닥까지 떨구고 짓밟아라!”
적인걸은 백리오혁의 명령을 떠올렸다.
한 번의 비무면 충분했다.
유운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것이 분명하고, 어쩌면 가문에서 쫓겨날지도 몰랐다.
‘휴. 아예 판을 키워서, 제대로 망신 주겠다는 뜻이구나.’
이미 서로의 속을 다 아는 상황.
유운은 길게 끌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적 행수.”
그렇게 학사와 무림인의 대결이 성사되었다.
* * *
“죄송해요, 흑흑. 저 때문에.”
만서각으로 돌아가는 길.
소화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먹였다.
“너 때문이 아니다. 내가 응당 해야 했을 일이다.”
“으아아앙! 미안해요!”
유운은 소화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녀를 위로했다.
“저는요, 마을 사람들에게도 화가 나요.”
한참 있다 진정된 소화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무슨 말이냐?”
“왜 공자님만 고생하는데요? 마을 모두의 일이잖아요. 그런데 죄다 말뿐이고 뒷짐만 지고 있잖아요.”
“그리 생각하면 안 된다.”
유운이 소화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땅에 씨를 뿌리는 농부가 있기에 우리가 따듯한 밥을 먹고, 꼬치구이를 만들어 파는 상인이 있기에 맛있는 간식을 먹지 않느냐?”
“하지만.”
“그들 덕분에 편하게 살았다.”
소화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서 얼마나 힘드셨는지 저도 아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리 내가 무시 받았다 한들, 당장 끼니 걱정을 한 적도, 헐벗은 적도 없다.”
“……!”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이들에게, 책을 읽고, 성현의 말씀을 논하는 내가 얼마나 부러웠겠느냐?”
유운은 등 뒤의 종이 꾸러미를 추스르며 말을 이었다.
“평생 명가의 후손으로 대접받고 살았다. 고난을 겪는다 하여도 의당 감수해야 할 일이다.”
지금껏 백리세가의 누구도 그리 이야기하지 않았다.
“공자님. 으아아앙!”
소화는 감동해서 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 * *
거친 사내들의 반응은 조금, 아니 매우 달랐다.
“으으득. 돈 받고 검을 파는 낭인 새끼가 감히. 제가 대신 나가서 놈을 으깨버리겠습니다, 각주님!”
거암이 이를 갈면서 말했다.
“내 근육이 먼저 터질지, 그 잘난 쌍도가 먼저 깨어질지 끝까지 겨뤄보겠습니다!”
“이미 주군의 이름을 건 상황이다. 이제 와서 어찌 되돌릴 수 있겠느냐?”
본가에서 돌아온 설영이 차갑게 말했다.
“그럼? 각주님이 남들 앞에서 망신당하는 꼴을 보라고?”
“더 좋은 방법이 있지.”
“뭔데?”
“내가 밤에 마실을 다녀오겠다. 아무도 모르게.”
스윽.
설영은 말하면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설 사부가 살수 출신이라더니. 정말인가 봐요.”
소화가 눈을 반짝이며 속삭였다.
“그건 명예롭지 못한 일 아니냐?”
거암의 물음에 설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둠을 걷는 자에게 명예는 사치지.”
고독하고 쓸쓸한 목소리.
고개를 살짝 틀고, 아련한 시선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니.
이야기 속 영웅이 따로 없었다.
“우와. 설 사부, 진짜 멋있어요. 다시 봤어요, 히히.”
소화는 연신 감탄사를 터트리며 꽃받침을 했다.
“어머어머. 저 턱선 좀 봐.”
“우리 마을에 설 사부만 한 인물이 없지, 없어.”
일 봐주시는 아주머니들도 멀리서 힐끔거렸다.
유운은 어이없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저건 협객전 대사잖아!’
역시 절판된 초판본에만 실린, 오글거리는 대사였다.
“설 사부, 진짜 살수 출신이에요?”
“나의 과거를 알려 하지 말거라. 다친다.”
꼬맹이와 얼음덩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설 사부가 살수 출신일 리가 없지 않느냐!’
설영은 기재였기에 어릴 때부터 주목을 받았다.
백리세가에서 집중 육성하던 차세대 무인 중 하나였다.
물론 성질머리가 드러나기 전까지의 이야기였다.
“휴. 다짜고짜 비무라니요. 공자님답지 않습니다.”
장노의 말에 유운이 빙그레 웃었다.
“뭐가 저다운 행동입니까?”
“불리함을 모르실 리 없으실 텐데. 모름지기 학사라면 후일을 도모해야….”
“학사이기에 물러날 수 없었습니다.”
“……!”
“유리하니 싸우고, 불리하니 피하고. 그것은 무인의, 아니 군인의 싸움. 허나, 학사의 싸움은 다릅니다.”
“……!”
“옳지 않다면, 어떤 이득이 있어도 물러나야 하며, 옳다면 어떤 손해가 있어도 물러나서는 아니 되지요.”
“하아…!”
유운의 당당한 말에 모두가 잠시 말을 못 했다.
그저 뜨거운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설 사부와 나름 많이 겨루지 않았습니까?”
유운은 빙그레 웃으며 사람들을 다독였다.
그랬는데.
- 턱도 없다.
매화검선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스승님? 얼마 전까지 육합검법의 성취를 칭찬하지 않으셨습니까?
- 비무와 실전은 다르다. 전혀 다르지.
“……!”
- 놈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일단 무공만 해도 어지간한 명가의 후손보다 훨씬 나을뿐더러.
매화검선이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 이런 말이 있다. ‘흉터 하나가 십 년 수련보다 낫다’.
“……!”
- 팔다리의 살가죽을 벤 얕은 흉터를 말하는 게 아니다.
심장, 눈, 코, 목덜미.
적인걸의 흉터 중에는 치명적인 흉터도 수두룩했다.
- 내가 살던 세계에서도, 명가의 후손이라는 놈들이 많았지. 그런데 놈들이 종종 비명횡사하고는 했다. 왜인 줄 아느냐?
“설마…, 낭인?”
- 차라리 명문정파의 고수와 겨뤘다면 훌륭한 결과를 냈을 것이다. 허나 상대는 낭인. 자신의 손가락을 내주고 적의 눈알을 파내는 자들이니. 곱게 자란 아이들이 어찌 이겨낼 수 있겠느냐?
말만 비무지 사실상 생사결까지 갈 수도 있는 상황.
유운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 심지어 그놈은 내공조차 빵빵하더구나. 그 부분만은 전혀 낭인답지가 않았어.
마음은 제자 편이지만, 평가는 냉정했다.
“그러고 보니, 적 행수가 조씨 가문에 합류할 때 소문이 돌았습니다.”
개인 무위도 높고, 강력한 실전 부대까지 갖추었으나.
적인걸에게 딱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내공.
조씨 가문이 막대한 돈을 들여서, 진귀한 영약을 제공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 밑바닥부터 올라온 놈이니, 숨겨진 수도 조심해야 한다.
실전의 달인이니, 명가의 제자는 상상도 못 할 방법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 게다가 상황이 불리하면 무슨 추잡한 짓을 할지 모른다.
매화검선은 한숨을 쉬며 생각에 잠겼다.
‘선계의 무공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구름을 밟고 천둥처럼 내리쳐라?
턱도 없는 소리였다.
인간 시절 역시 마찬가지.
매화검선은 어릴 때부터 화산의 정예로 선발되어 꽃길만 걸었다.
추잡한 수? 비장의 초식?
압도적인 내공과 최상승 무공이 있으니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 싸움을 잘하는 녀석이 있긴 한데.’
꽃길이 아닌 똥 밭을 구른 녀석.
막싸움의 달인.
녀석의 실전 경험이라면 제자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에잉. 내가 무슨 생각을. 화산의 제자에게 무슨 그런 잡기술을.’
당연히 고개를 저을 일인데.
어여쁜 제자를 보자 또 생각이 바뀐다.
‘아직 피지도 못한 꽃인데. 이리 귀하고, 착한 아이인데.’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적 행수를 더욱 조심하겠습니다.”
- 그래, 인성과는 별개로, 무인으로서는 상당히 쓸 만한 놈이다.
“…….”
- 내공, 외공, 경험.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으니, 잘 제련된 검이라 할 수 있었다.
명가의 제자가 실력이 더 높아도, 픽픽 죽어 나가는 게 실전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무엇 하나 유리한 게 없었다.
- 너에게 시간만 더 있다면! 시간만 더 있다면 무엇도 두렵지 않을 텐데!
매화검선이 탄식했다.
아무리 적인걸이 뛰어나다 해도, 유운에 비교할 수는 없다.
검법의 성취는 뛰어나고, 내공의 토대는 탄탄하기 이를 데 없으니.
삼사 년, 아니 일 년만 더 수련해도 수월하게 이기리라 자신했다.
“시간을 당길 방법은 없습니까, 스승님?”
- 왜 없겠느냐?
매화검선의 말에 잠시 설레였다.
- 돈!
“……!”
뜻밖의 이야기에 유운이 깜짝 놀랐다.
- 그것도 많은 돈이지.
“그 말씀은?”
- 커흠. 너무 노골적이었구나. 그래. 정확히는 영약이다.
“…영약! 저도 들어본 적 있습니다.”
정확히는 협객전에서 보았다.
“지극히 운이 좋거나….”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동굴 속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다거나.
“수많은 이들의 피를 묻히거나….”
수백, 수천 명을 베어 넘기거나.
“갖은 고난을 겪어야 겨우 손에 넣을 수 있는 보물이 아닙니까?”
- 그래. 우리 때도 뭐 비슷했다.
영약 하나만 나타났다 하면 피바람이 부니.
차라리 돈을 주고 사라는 말이 이해가 될 정도였다.
- 오십 년 묵은 하수오라도. 하다못해 십 년 묵은 놈이라도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매화검선이 한숨을 쉬었다.
“십 년근 하수오만 해도 천 냥은 너끈히 넘어갈 겁니다, 스승님.”
겨우 만서각을 운영하는 게 전부인 유운으로서는, 어려운 이야기였다.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영약뿐인데, 구할 길이 없었다.
“아쉽네요.”
- 아쉽구나.
유운은 즐겨 읽던 협객전을 떠올렸다.
‘절벽에라도 가야 하나.’
유운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하늘에서 양약이라도 뚝 떨어지면 좋겠습니다, 싸구려라도 말입니다. 하하하.”
- 그럴 리가 없지 않으냐.
“휴우. 답답해서 해본 말입니다.”
- 휴우. 그래, 안다.
“돈 좀 열심히 벌어놓을 것을 그랬습니다.”
- 그러게 말이다.
두 사람이 아쉬워하던 시각.
푸드드득!
서촌의 유일한 주루에서 전서구가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