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인연이 이어지다 (2)
“하필이면 백리오혁이 여길 찾은 날부터 놈들이 움직였으니. 정황상 그놈이 훔쳐 들은 게 분명합니다.”
호위이자 측근인 동평이 분통을 터트렸다.
“장정 열이 지킨다 한들, 도둑을 다 막지는 못하지요. 천리지청술 따위로 청력을 강화했을 겁니다.”
서문요란이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차분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소가주님. 제가 좀 더 주의했어야 하는데.”
“아니에요. 동 호위. 오히려 저는 이번 일로 배운 바가 있어요.”
“네?”
“어리석은 오 공자가 저에게 깨우침을 주는군요. 시대가 바뀌고 있다는 점을요.”
“……!”
명문세가의 자제가 비밀을 엿듣는다.
대형 상단이 힘을 앞세워 무도한 일을 일삼는다.
이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이제는 누구도 고루한 정의를 외치지 않으니. 바야흐로 패도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뜻이지요.”
부하를 탓할 일을, 오히려 자신이 나아갈 기회로 바꾸다니?
‘소문주의 그릇이 실로 크구나.’
동평은 내심 감탄했다.
“그렇다고 놈을 용서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에요.”
서문요란이 서늘한 눈으로 백리세가 쪽을 노려보았다.
“소가주님, 그 말씀은?”
“놈은 오히려 이번 일을 후회하게 될 거예요.”
“설마 이번 후계전에서 지지할 사람으로…?”
“백리유운! 그 사람으로 결정했어요.”
“……!”
“이번 일만으로 결정한 것은 아니에요.”
“물론 잠재력이 풍부한 점은 알고 있습니다만….”
“종가가 백리 가주에게 가장 바라는 점이 무엇일까요?”
“…….”
“신뢰예요.”
서문요란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종가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 위기 때 종가를 지켜줄 것이라는 신뢰. 무엇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키리라는 신뢰.”
아무리 화려한 약속을 해도, 지켜지지 않는다면 소용없다는 뜻이었다.
“그랬기에, 이 사람이에요.”
서문요란은 보고서를 가리켰다.
“불리해도 물러나지 않고, 내 사람을 지키는 자. 요즘 무림이 어떤지 아시잖아요. 이런 사람,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소가주님, 결단을 내리셨군요.”
동평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결정이 무엇이든, 저 동평. 목숨을 다해 따르겠습니다.”
“좋아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첫 투자부터 시작하죠.”
서문요란의 말에 동평이 눈을 빛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이십 년짜리로 준비할까요?”
속으로 하수오 시세를 가늠하며 말했다.
“겨우 그걸로 되겠어요? 잊지 말아요. 우리 가문이 어떻게 컸는지. 재물은 잠시지만, 사람은 영원해요.”
“그, 그렇다면 오십 년짜리로?”
동평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적어도 삼사만 냥은 하리라.
“동 호위, 통이 작군요.”
“…허억. 서, 설마 백 년?”
동평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오십 년과 백 년의 가격 차이는 두 배가 아니다.
열 배, 아니 스무 배 이상 차이 나고도 남는다.
“그래요, 돈을 쓰려면 제대로 해야죠.”
서문세가의 소가주답게 배포가 컸다.
유일한 후계자가 내린 결단이다.
“존명!”
동평이 외치고 나가려던 때.
“잠시만요, 역시 부족해. 흐음, 승부를 걸 땐, 확실하게 걸어야죠.”
서문요란이 귀를 붙잡고 속삭였다.
그녀의 말을 모두 들은 동평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 *
“고, 공자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이른 저녁.
장노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멀리서 말소리가 들리던데. 누구인지요?”
유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화가 들이닥쳤다.
“왔어요, 왔어요! 맙소사, 맙소사.”
“무슨 일이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얼른 세안하시고, 의복부터 갖추세요!”
소화가 유운의 등을 떠밀며 재촉했다.
“대체 누구기에….”
“보면 알아요. 후회하지 말고, 깨끗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얼른요!”
그렇게 준비하고 나선 접객실에는 한 여인과 호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뵙는군요. 유운 공자.”
서문요란이 붉은 면사를 내리며 살포시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남녀노소 모두가 숨을 멈추었다.
“……!”
“……!”
아스라이 저무는 해를 배경으로, 석류 같은 붉은 입술이 은은하게 빛났다.
윤기 있는 검은 머리 위에는 꽃잎 모양의 잠(簪)이 꽂혀 있었다.
사아아…!
바람이 불 때마다 연분홍빛 소매가 하늘거리고.
고혹적인 몸의 선이 드러날 듯 말 듯 하니.
실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 같은 모습이었다.
“지, 지난번과 조금 달라지셨군요.”
“별말씀을. 급하게 오느라 신경을 못 써서 죄송할 따름이에요.”
서문요란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하며 면사를 내렸다.
그러자 곳곳에서 진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신경을 못 쓰기는!’
듣고 있던 동평은 기가 막혀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온몸을 치장한다고 난리 친 것이 누구던가?
간편하게 입고 다니던 평소와 달리, 비단 허리띠에, 목걸이에, 귀걸이에, 화장까지.
준비에만 세 시진이 넘게 걸렸다.
“이것 역시 업무의 일환이에요. 사람은 보이는 데로 평가하기 마련이니까요.”
서문요란이 빙긋 웃으며 강조했다.
“무엇보다 이것은 저의 마지막 시험이기도 해요.”
“……!”
화려한 미모 속에 칼이 숨겨져 있었다.
‘하긴 소가주님 말씀대로이긴 했지.’
적당히 예쁘면 모를까, 너무 미모가 압도적이니.
평소 문 앞에서 기다리며 어떻게든 말을 건네려던 남자들이 감히 시선도 못 마주칠 정도였다.
그녀가 가진 아름다움은 위엄이었고 동시에 무기였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소가주?”
그러나 유운만은 달랐다.
흔들림도 잠시. 금세 평온한 얼굴로 물었다.
‘호오. 역시.’
서문요란은 속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가문의 주력 품목이 무엇인 줄 아시나요?”
“약초와 비단 아닙니까?”
“아니에요. 그건 결과에 불과하지요.”
“……?”
“서문의 주력은 투자입니다.”
땅이나 건물을 말하는 것은 아닐 터.
유운의 표정이 저절로 진지해졌다.
“정확히는 사람의 미래에 대한 투자예요.”
“……!”
“귀한 약재, 사치스러운 옷감, 막대한 돈. 모두 그 뒤에 따라오는 결과물에 불과하죠.”
유운은 서문요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왜 하필 저입니까?”
“왜일까요?”
서문요란이 대답을 하지 않고 묘한 미소만 지었다.
“공자가 처한 상황을 들었어요. 그래서 작은 도움을 드릴까 해요.”
서문요란이 품에서 호리병 하나를 꺼냈다.
작지도 크지도 않으니, 애주가가 딱 좋아할 크기의 약병이었다.
“이것은?”
“영약입니다.”
“…허억!”
“…오오오!”
유운을 대신해서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하지만 정작 유운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서문세가가 드린 것이 없거늘, 어찌 받겠습니까?”
“별거 아니에요. 그다지 비싸지 않은, 하급 영약이니.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서문요란의 말에 동평이 격하게 몸을 떨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고! 아니야아아아!’
여기서는 오직 그만이 아는 진실.
동평은 홀로 비명을 질렀다.
“어디 한 번 냄새나 맡아보세요. 썩 나쁘지 않답니다.”
서문요란이 병뚜껑을 열자.
화아아악!
청량한 향기가 각 안을 가득 채웠다.
“오오오…!”
“이런 향기는 처음이야.”
“그러게. 냄새를 맡기만 해도 건강해지는 기분인데?”
“에이,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기분 탓이겠지.”
“그렇겠지? 하하하.”
모두들 그냥 웃고 말았지만.
‘그거 맞아, 그거 맞다고!’
동평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영약의 주재료는….
공청석유!
한 방울만 마셔도 전신의 세맥이 뚫린다는 전설의 영약이었다.
한 방울이 백 년짜리 하수오보다 비싼데, 그걸 한 병을 꽉 채웠으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설의 영약이라 알아볼 리는 없지만. 대비해서 나쁠 것 없지요.”
소가주는 다른 영약까지 섞어서 특징조차 지웠다.
‘과해도 너무 과하잖습니까, 소가주님!’
동평은 속으로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삼백 년 묵은 하수오!
사람을 닮은 산삼, 인형설삼까지!
부유한 서문세가의 뿌리가 흔들릴 정도의 보물이 저 한 병에 들어갔다.
오죽하면 가주까지 나서서 말렸을 정도였다.
‘무림에 알려졌으면, 진짜 피바람이 불고도 남지!’
당연히 향만 맡아도 기운이 성하고, 몸이 건강해졌다.
스으윽.
유운은 슬쩍 품속의 두루마리를 살폈다.
스승이 어찌 생각하는지 궁금했는데.
- 으허허허… 허허허허!
매화검선은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스승님, 이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유운은 잠시 고개를 숙이는 척하면서 조그맣게 물었다.
- 모, 몰라! 나는 아무것도 몰라!
매화검선이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 하지만!
한 마디를 덧붙였으니.
- 일단 먹어라. 몸에 좋은 거니. 내가 보증하마.
“네? 분명 모르신다고….”
- 일단 먹어! 먹고 나서 얘기해! 무조건 먹어!
매화검선이 어찌나 크게 소리치는지, 유운이 움찔할 정도였다.
“소가주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고, 공자님!”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좋아요. 일단 물건부터 확인하셔야겠죠?”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하루 묵을 방, 있나요?
서문요란의 말에 장노가 얼른 대답했다.
“있습니다, 없어도 있습니다, 허허허!”
“그럼 내일 뵐게요, 공자. 좋은 밤 보내세요.”
서문요란이 야릇하게 웃고 사라졌다.
* * *
‘설마 이게 공청석유는 아니겠지?’
의서에 나온 물건과 빛깔이 상당히 닮았다.
하지만 유운은 픽 웃고 말았다.
‘무슨 흰소리를. 내가 협객전을 너무 많이 보았구나.’
현실에 존재하는지도 불분명한 물건이다.
한 방울만 해도 난리 날 것이 분명한데, 이렇게 병째로 공청석유다?
이야기꾼도 그렇게 터무니없는 말을 꾸며내지는 못하리라.
- 어서 가부좌를 틀거라.
두루마리 속 매화검선이 엄숙하게 말했다.
“네, 스승님.”
유운은 가부좌를 틀고, 두 손을 자연스럽게 배꼽 위로 늘어뜨렸다.
눈에는 은은한 현기가 흐르고, 피부에 맑은 빛이 감도니.
평생 곡기를 끊고 참선한 도인과 같은 모습이었다.
-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으니. 좋구나, 참으로 좋아.
매화검선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꿀꺽꿀꺽.
청량한 액체가 몸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순간, 유운은 눈을 감았다.
- 참된 나를 깨우치는 자만이 경지에 오르리니. 얼마나 얻을 지는 오로지 너에게 달렸으니….
매화검선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사라졌다.
관조(觀照).
고요한 가운데 깊은 생각에 빠져, 온전한 나를 돌아보고, 비추니.
어느덧 사위가 고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