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21화 (21/114)

제21화

인연이 이어지다 (3)

‘어둡구나.’

눈을 뜬 순간, 보이는 것은 오직 검은 안개뿐이었다.

스아아…!

온몸을 감싸는 냉기. 끈적거리고 어딘가 불쾌한 이물감.

평범한 사람이라면 겁에 질려 소리칠 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유운은 불가의 격언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스렸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다 하지 않았던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곳은 자신의 마음이 빚어낸 심상 세계임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두려움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어디에도 길은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아스라이 들려온, 스승의 마지막 말이 떠올렸다.

- …부디 멈추지 말고 나아가거라!

그리고 유운은 그렇게 했다.

저벅저벅.

한걸음, 한걸음.

스승의 말을 믿고, 자신을 믿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 안개가 유운에게 속삭였다.

“영약이라고? 순진하게 그 말을 믿니? 그 여자는 너를 해코지하려는 것이 분명해.”

기나긴 세가의 역사 속에서, 비열한 술수 또한 없지 않았으니.

전혀 가능성이 없는 말은 아니었다.

“무학사라니? 왜 자꾸 터무니없는 꿈을 꾸니? 안 돼. 될 리가 없어. 현재에 만족하렴.”

무학사는 말은 세상에 잊힌 지 오래.

이 또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스승이라는 자가 언제까지 네 옆에 있겠니? 흥미가 떨어지면 버리고 떠나갈걸? 그러면 넌 다시 혼자가 될 거야.”

안개가 유운의 아픈 부분을 콕 집어 쑤셨다.

그 순간 유운은 안개의 정체를 깨달았다.

의심. 안주. 두려움.

그것은 유운이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망념(妄念)이며, 상처였다.

유운은 빙그레 웃고는 말없이 걸어갔다.

“안돼, 가지 마!”

“넌 할 수 없어!”

“다칠 거야!”

안개는 소리 지르고, 잡아당기고, 화를 냈다.

하지만 유운은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솨아아…!

검은 안개가 차츰 희미해졌다.

안개가 사라진 공간 속, 한 사람이 보였다.

조그맣고 겁먹은 표정의 아이.

‘그때의…나로구나.’

바로 어린 시절의 유운이었다.

글을 읽는 것이 좋았다.

무를 익히는 것 역시 좋았다.

하지만….

“세상에는 결코 욕심을 내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명심하거라!”

준엄하고 차가운 목소리.

명문 무가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나, 무인의 길은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배우고 싶어요.’

그들의 생각처럼 권력이 탐나서가 아니었다.

‘무(武)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무를 완성한다면 선조들께서 얼마나 뿌듯해하실까?’

하늘 저 높이 별이 반짝였다.

그 별은 참으로 빛났고, 아름다웠다.

그랬기에 꿈을 멈출 수 없었다.

[ 백리활인법 ]

어렵사리 기초 동공(動功)을 구했다.

꼬마 유운은 그림을 따라서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피로했던 몸에 활력이 돌고, 고뿔을 달고 살았던 몸이 건강해졌다.

‘내가 수련하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을 텐데. 그분들께서 마음을 바꾸신 것이 분명해.’

희망까지 생기니, 더욱 신이 나서 수련했다.

활인법이 혈관과 근육을 깨끗이 씻어내고, 탁한 기운을 몰아내니.

마음속 세상 속에 조그마한 땅이 생겼다.

‘드디어 나만의 터전이 생겼구나!’

꼬마 유운이 기뻐하며 수련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수련해도, 텅 빈 땅뿐이었다.

‘책에 따르면, 땅이 생긴 후 자연스럽게 밭이 생긴다 하였는데…. 어째서?’

영특한 유운은 이내 그 이유를 깨달았다.

활인법은 자연의 기로서 호흡하는 법을 깨우치고, 몸 안의 나쁜 기를 배출하는 데는 더없이 훌륭했다.

하지만 활인법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없었다.

축기(蓄氣), 기를 몸 안에 쌓는 구결이 없으니.

단전(丹田), 기를 품은 밭이 생길 리가 없었다.

그랬기에 백리활인법은 내공심법이 아닌 도인술에 불과할 뿐이었다.

“오, 꽤 건강하구나? 학사치고는 말이야.”

“눈빛이 생생하니 좋구나. 학사치고는 말이야.”

칭찬을 가장한 모욕.

아비도, 어미도 잃은 어린아이에게는 가혹한 시간이었다.

엇나갈 법도 하지만, 유운은 그러지 않았다.

마음을 지키는 데는 한 사람의 온기만으로 충분했다.

그 결과가 곧 눈에 보였다.

‘얼마 전의 나로구나!’

유운의 눈앞에 훤칠하게 키가 커진 소년이 보였다.

소년의 눈빛을 본 자마다 속으로 감탄했다.

‘허어. 마음 뿌리가 단단하면, 결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더니.’

‘저 나이에 어찌 저리 흔들림이 없단 말인가?’

정심(正心), 마음이 올바르니 부끄러움이 없고.

정심(定心), 마음이 안정되기 쉽게 들뜨거나 흥분하지 않으며.

정심(精深), 마음이 깊으니 작은 것도 놓치지 않으니.

바로 장 노야가 바라던 그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상제께서 감동이라도 할 것일까.

하늘에서 황금 동아줄이 내려왔으니.

[ 조화무궁선법 ]

쿠구구궁…!

심상 세계 속 하늘과 땅이 뒤집히며 새로운 세상을 빚어냈다.

그것을 처음 본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단전이로구나!’

그토록 바라던 기의 밭이 생겼다.

그것도 무려 열 개나.

놀라운 재능과 끊이지 않는 노력의 결과였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 크기였다.

‘어째 다른 무서(武書)에서 말하는 밭과 크기가 다른데?’

단전의 크기는 무인의 자질에 따라 다르나, 적으면 두어 걸음, 많아도 열 걸음 이내라 하였다.

하지만 유운의 단전은 달랐다.

휘이잉…!

하나하나가 한참을 달려야 할 정도로 드넓었다.

유운은 자신이 일구어낸 밭을 걸었다.

땅 한 뙈기 없던 소작농에서 지주가 된 기분이랄까?

유운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어렸다.

‘열 개의 밭이라. 든든하구나.’

유운은 밭들을 거닐며 살폈다.

흙을 만진 후,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메말랐구나.’

푸석푸석.

땅은 물기 한점 없었고, 모래와 자갈로 가득했다.

만수신의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떠올랐다.

- 열 개의 땅이 형체를 갖추고, 밭까지 일구었다? 연자(緣子)여, 축하하네! 이는 어떤 상승 내공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성과이니. 누구도 닿지 못한 곳에 이를 수 있을 것일세.

이내 그의 목소리가 엄숙해졌다.

- 하지만 결코 안심하지 말게. 이는 커다란 여정의 첫걸음일 뿐이니. 밭에 물을 대고, 거름을 주고, 일구는 일이야말로 진짜 시작이라 할 수 있네.

‘이토록 넓은 밭을 일군다라….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리겠구나.’

유운이 한숨을 쉬었다.

물론 그 결과가 어떠할지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 각기 열 개의 밭에서 싹이 나고, 그 싹이 성장해서 나무가 되고, 그 나무들이 하나가 된 순간. 그 어떤 절대 고수도 이루지 못한 대공(大功)을 이루리니.

만수신의의 목소리가 뜨거워졌다.

- 그 어떤 고난과 역경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말게. 그래봤자 고작 백 년 혹은 이백 년! 짧은 시간의 고생으로 궁극의 도(道)를 이룰 수 있으리니…

‘휴우…. 백 년이라니.’

유운의 한숨이 한층 깊어졌다.

신선의 기준으로는 길지 않은 시간이리라.

하지만 유운은 인간. 그에게는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이었다.

물론 시간을 단축할 방법은 있다.

하지만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 깨달음은 비할 데 없이 뛰어나나,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구나. 명가에서 제대로 지원해주었더라면….

오죽하면 스승이 그리 한탄했을 정도였다.

천하제일의 목수라도 목재가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는 이치였다.

‘그런데 영약이라니….’

물론 서문요란이 귀한 영약을 주었을 리는 없다.

유운은 가문 내에서 세(勢)가 약하고, 무공 또한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렇다고 그녀의 말처럼 값싼 영약일 것 같지는 않았다.

‘결코 싸구려를 건네는 자의 눈빛이 아니었어.’

태도는 당당하고, 말투에는 품격이 넘쳐나니.

어쩐지 그 이상이 있을 것만 같았다.

‘조급해하지 말자. 착실히 나아가면 되겠지.’

유운은 애써 기대감을 억눌렀다.

‘지금쯤이면 영약의 기운이 돌 터인데.’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럼에도 유운은 원망하지 않았다.

설령 별것 아닌 영약이면 어떤가?

보여준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다.

그렇게 황량한 밭을 서성이고 있을 때였다.

톡.

하늘에서 빗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유운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더니 입술에 스며들었다.

‘어? 달아!’

혀끝에 감도는 맛은, 인세의 것이 아닌 양 달콤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물방울이 몸을 타고 내려가 밭에 떨어진 순간.

화아악!

땅에서 노란빛이 터져 나왔다.

‘따듯하구나!’

싱그럽고 온화한 기운이 느껴졌다.

일찍이 접해본 적 없는 생명력이 가득했다.

‘과연 놀라운 영약이었구나!’

빗방울에 닿은 부분마다 황금빛이 돌았다.

거친 자갈이 고운 모래와 점토로 뒤바뀌었다.

고작 한두 방울의 물방울.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몇 주, 아니 몇 달의 시간을 아낄 수 있을 정도였다.

‘서문 소저께 큰 은혜를 입었구나.’

유운이 감사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토독. 토독.

하늘에서 빗방울이 서너 방울 더 떨어졌다.

화아악!

빗방울을 맞은 땅이 황금빛을 내뿜더니, 생명력을 뿜어냈다.

‘영약의 기운이 과하구나. 무리하셨어.’

분명 서문요란이 한 말과는 달랐다.

하지만 유운의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기분 좋은 배신이었으니까.

하지만 서문요란의 배포는 유운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으니.

투두둑.

투두두둑.

빗방울이 점점 더 많아지더니.

투두두두…!

마침내 폭우가 되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 이게 대체!’

유운은 경악한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늘과 땅 모두가 빛나는 물방울로 가득하니.

땅 전체가 상서로운 서기에 휩싸였다.

‘과해도 너무 과하잖아!’

어느 정도 가치 있는 영약을 주었으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이 정도일 줄 꿈에도 몰랐다.

콸콸콸…!

폭우가 거세지니 곳곳에 물난리가 났다.

사방이 물, 아니 영약 천지!

‘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자칫 잘못하면 홍수가 날 판.

어서 땅을 파고, 막힌 곳을 뚫어 물길을 내야 했다.

철썩!

쿵!

맨손으로 땅을 파고, 자갈 더미를 등에 짊어졌다.

심상 세계는 곧 유운의 내부 그 자체.

굳은 땅은 오래된 육신이고, 자갈 더미는 숨어있던 노폐물이었으니.

한번 파헤칠 때마다 몸이 찢어지듯 아팠다.

거기에 별다른 도구조차 없었다.

‘물길을 막을 나무판자라도 있으면 큰 도움이 될 텐데.’

유운이 배부른 소리라며 고개를 가로저을 때였다.

퉁.

하늘에서 커다란 목재가 떨어졌다.

‘이, 이게 무슨?’

하지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콸콸콸!

사방에 물이 불어 넘쳤다.

‘이러다 영약에 익사하겠구나!’

유운은 다급하게 목재를 써서 물을 막았다.

하지만 몸은 하나요, 밭은 열 개. 그것도 터무니없이 넓은 밭이니.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아…!’

유운이 속으로 탄식할 때였다.

불쑥. 불쑥.

땅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놀랍게도 황금빛 서기에 휘감긴 어린아이들이었다.

맨들맨들한 머리 꼭대기에는 잎사귀 서너 개가 삐죽 솟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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