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인연이 이어지다 (4)
꾸잇. 꾸잇. 꾸잇.
코로로로~
아이들은 알아듣지 못 할 말을 흥얼거렸다.
그 모습은 마치 풀의 요정이 노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풀에 깃든 정령이라…. 설마?’
그때서야 유운은 깨달을 수 있었다.
천지를 뒤덮은 물방울은, 만물의 기운을 포용한다는 공청석유!
흑단보다 단단하고 아름다운 목재는, 삼백 년근 하수오!
잎사귀까지 황금빛으로 빛나는 아이들은 인형설삼이었다.
‘저 아이들이 이곳에 나타난 이유가 있을 터.’
유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도와다오.”
하지만 인형설삼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방실방실 웃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보여주는 수밖에.’
유운은 직접 몸을 움직여 땅을 일구었다.
“웃차!”
목재로 벽을 세워 물을 막고, 땅을 파서 물길을 내고, 자갈을 부수어 고운 모래로 만들고.
유운이 땀 흘려 일하는 모습이 재밌어 보였던 것일까?
꾸잇. 꾸잇. 꾸잇.
인형설삼들이 키득거리더니 유운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외형은 조그마한 아기지만, 실체는 희귀한 정령!
쿵쿵쿵!
휘리릭!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땅이 움푹 파이니, 마침내 거센 물길이 잡히기 시작했다.
‘휴우. 간신히 해냈구나.’
유운은 몸을 일으키며 땀을 닦았다.
온몸이 땀과 흙탕물로 가득했지만, 얼굴은 개운했다.
“고맙다, 얘들아.”
커다란 눈을 끔뻑이던 아이들은 조금씩 작아지더니, 마침내 사라졌다.
도도히 흐르는 공청석유에 녹아버린 것이었다.
어쨌거나 마무리가 된 셈.
그럼에도 걱정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과연 내 몸이 이 기운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심상 세계는 유운의 몸을 바탕으로 조화무궁이 이룩한 세계.
문제는 너무나 막대한 공청석유의 기운이었다.
어지간한 내공심법으로는 천분지 일, 아니 만분지 일도 채 흡수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이 이상은, 오직 조화무궁선법에 달린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쿠궁쿠궁!
다시 한번 심상 세계가 뒤집히고, 넓어졌다.
그리고 드러난 세상은….
‘아아…!’
유운이 탄성을 토했다.
땅은 황금 가루를 뿌린 듯 환하게 빛났다.
흙은 물기를 머금고 영롱하게 빤짝였다.
지잉!
휘이잉!
햇볕은 부드럽고, 바람조차 청량하니.
신선이 노닐법한 별세계가 펼쳐졌다.
‘그 많은 기운을 다 흡수했단 말인가?’
사람이 거대한 호수를 삼키는 일과 같았으니.
기존의 무학 이론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찌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온 천하가 황금빛으로 빛났다.
열 개의 단전은 모두 기름진 땅, 옥토(沃土)가 되었다.
‘설마 이것까지 예상하시고?’
문득 만수신의의 말이 떠올랐다.
- 백 년 혹은 이백 년.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성질 급한 친구들은 또 못 참을 터! 그러니 내 연자에게만 단축할 방법을 알려주겠네.
대체 무엇이길래?
영상을 보던 유운이 마른침을 삼켰다.
- 그것은 바로 돈일세.
‘……?’
유운은 황당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 참고로 내 심법이 말이야, 약빨이 무지 잘 받는다네. 껄껄껄!
만수신의는 의외로 장난기가 많아서 농담을 툭툭 던지고는 했다.
- 어떤 영약이든 직빨! 모조리 흡수하고 마니. 재료만 주어진다면, 놀라운 속도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일세.
‘……!’
- 물론 어지간한 영약으로는 땅 한 뙈기도 갈아엎지 못할 테니, 엄청난 돈이 필요할 터. 그러니….
그 순간 만수신의가 눈을 찡긋했다.
- 연자는 천하제일고수가 되기 전에 먼저 천하제일부자부터 되어야 할 걸세, 껄껄껄!
천하제일부자가 힘들게 무공을 수련할 리가 있겠는가?
절대 안 될 거라 믿고, 장난스레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속에는 분명한 진실이 담겨있었다.
‘아무래도 제가 천하제일부자를 만났나 봅니다.’
유운이 빙그레 웃었다.
휘이잉…!
청량한 바람이 황금빛 밭을 훑고 지나갔다.
드넓은 대지 위에, 누구도 상상 못 한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유운은 몸 안을 돌아보며 감탄했다.
‘실로 놀랍구나!’
어제까지만 해도 넓기는 했지만 황량한 돌밭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사방이 황금빛 옥토로 가득했다.
‘이래서야 밭이라는 말이 무색하구나.’
흙 알갱이마다 생명력이 넘치니, 기름지기가 논보다 더했다.
하룻밤 만에 옥토로 가득한 대농장의 주인이 된 셈.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저것은….’
열 개의 밭 중 하나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기해혈(氣海穴)이로구나!’
배꼽 한치 반 아래에 있는 혈도.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원래의 ‘단전’이었다.
기해혈은 온몸의 기가 모이는 곳이자 몸의 중심!
오죽하면 ‘기의 바다’라 부르겠는가?
그 기해혈 한가운데만 땅이 달랐다.
불룩 솟아오른 언덕 위.
고운 흙 사이로 조그마한 무언가가 보였다.
바로 ‘새싹’이었다.
‘저것이 바로 신의께서 말씀하신 싹이로구나!’
유운은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다.
기름진 밭 위에 새싹이 싹트니. 이를 일컬어 생명수(生命樹)라 하리라!
조그마한 새싹이나 그 뿌리는 몸 안은 물론 세상에까지 뻗어가리니.
세상 어떤 기(氣)도 생명수에서 나온 기에 비할 수 없으리로다!
생명수의 싹이 튼 순간이 바로 진정한 조화무궁의 시작이었다.
문득 유운은 궁금해졌다.
세상을 가득 채울 나무다. 그렇다면 세상에 없던 특별한 수종(樹種)이 아닐까?
유운은 새싹을 자세히 살폈다.
‘물푸레나무로구나!’
귀하기는커녕 흔하디흔한 나무였다.
그래서 오히려 더 감탄했다.
‘과연 신의께서는 신선이시로구나!’
물푸레나무는 단단하고 탄성이 좋아 농기구의 자루를 만들 때 많이 쓰였다.
의자나 식탁에 쓰이기도 하고, 심지어 창(槍)이나 곤(棍)과 같은 무기에 쓰이기도 했으니.
여러모로 쓸모 있고 이로운 나무였다.
이보다 생명수에 더 어울리는 나무가 어디 있겠는가?
촤르륵.
산들바람이 바닥을 훑고 갔다.
유운은 자신도 모르게 새싹을 만졌다.
온몸의 모공이 다 열리고, 세상과 직접 교류하는 느낌!
그 순간 유운은 깨달았다.
‘아아아…! 이것이로구나!’
기를 흡수하고, 운용하고, 발출하는 모든 단계를 뛰어넘었으니.
검기지경(劍氣之境)!
오랫동안 염원하던 경지에 올랐음을 깨달았다.
‘고작 이 새싹 하나로 이렇게까지…!’
만약 저 새싹이 자라난다면?
열 개의 밭에서 모두 싹을 틔운다면?
‘이제 시작이야.’
조그마한 새싹이지만, 언젠가 하늘 높이 자라나리라.
그리고 다른 나무들이 서로 어우러져,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리라.
그렇게 기분 좋은 상상에 빠져있을 때였다.
똑똑.
문 두들기는 소리에 유운의 정신이 돌아왔다.
“유운 공자, 기침하셨는지요? 잠시 얼굴을 뵐 수 있을까요?”
곱고 단정한 여인의 목소리.
서문요란임이 분명했다.
‘허업! 큰일이로구나!’
현실은 아름답고 깨끗한 심상 세계와는 달랐다.
깊은 곳에 숨어있던 노폐물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왔으니.
옷은 물론 앉은 자리까지,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검은 물로 가득했다.
학사로서 어찌 이런 모습을 여인에게 보이겠는가?
휘리릭!
유운은 황급히 치우고,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창문을 열어도 고약한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똑똑.
다시 한번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운은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볼 때마다 다른 것이 여인이라더니.’
붉은 연지와 하얀 분으로 화장했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민낯. 그럼에도 피부가 투명하게 빛났다.
‘서문 소저에게는 이 모습이 오히려 더 잘 어울리는구나.’
유운이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
“긴 여정, 적잖게 피곤하셨을 터인데. 잘 주무셨습니까?”
“생각보다 좋았어요. 객실이 화려하진 않지만, 깔끔해서 제 마음에 쏙 들었어요.”
유운은 한 사람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공자께서는 어떠셨는지요? 지난밤은 잘 보내셨나요?”
“덕분에 잘 보냈습니다.”
“그런데 왜 저를 방에 들이지 않고 복도에서?”
“그, 그건.”
서문요란이 순진하게 고개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흐응. 뭘까요. 혹시 여인이 보아서는 안 되는 물건이라도 숨겨놓으셨나요? 하긴 공자님도 사내이시니.”
“그, 그런 게 아니오라.”
서문요란의 눈빛이 조금씩 짓궂게 변해갈수록, 유운의 얼굴도 붉어졌다.
“어쨌거나 다행이네요.”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몰라볼 정도로요.”
“……!”
“지난밤, 좋았다는 뜻이겠죠?”
서문요란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자칫하면 오해받을 수 있는 말.
유운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좋, 좋았습니다. 서문 소저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비할 바 없이 큰 은혜를 입었다.
유운의 감사는 정중했고, 진심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거 비싼 거예요, 그것도 매우.”
“……?”
어쩐지 지난번과 말이 달랐다.
“분명 어제는 값싼….”
대꾸하려는데, 서문요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기서 따질 거예요?
무려 공청석유를 공짜로 먹고서?
설마 아니겠죠? 아니죠?
보이지 않는 힐난에, 저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비할 데 없이 큰 선물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이 정도 농쯤은 기꺼운 마음으로 받을 수 있었다.
“진정 감사합니다, 소가주. 확실히 귀한 영약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맞아요. 그거 진짜, 엄청 비싼 거예요. 하지만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어느 정도입니까?”
유운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서문세가의 기둥뿌리가 흔들릴 정도? 가주께서 하얗게 질려서 부들부들 떠실 정도?”
서문요란이 별거 아니라는 듯 중얼거렸다.
유운의 이마에 저절로 식은땀이 맺혔다.
- 저 소저가 얼마나 부유한 가문인지 모르지만…
매화검선이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 저 말은 무조건 진실일 것이다!
공청석유라니? 화산제일인 시절에도 한 방울 먹어본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한 병을 가득 채울 정도라? 거기에 인형설삼, 삼백 년 근 하수오까지?
- 평생의 은인으로 모셔라.
스승조차 그리 말하니.
무엇보다 유운 스스로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후훗. 알아주시면 감사하고요.”
서문요란은 어제와는 달리, 수수하고 담백한 복장이었다.
그래서인지 티 내는 모습조차 밉지 않았다.
다만….
“제가 아무리 유일한 후계자라고 하지만, 무림세가는 냉정해요.”
“……!”
“자칫하면 후계자가 방계로 바뀔지도 몰라요.”
서문요란이 짐짓 몸을 떨며,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아는 이야기와 조금 다른데?’
가주가 지명한 후계자라도 능력이 부족하면 바뀌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능력이 어지간히 부족한 때의 이야기.
이미 상단은 물론 무력 부대까지 서문요란이 전부 휘어잡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흔들리기는커녕, 역대 가장 강력한 후계자라고 하던데?’
방계들이 진작 단념하고, 앞다투어 충성을 맹세한다 들었다.
“설마 그 귀한 걸 먹고…우릴 외면하시려는 건 아니겠죠?”
서문요란은 아이를 밴 여인을 외면하는 남자를 보듯 보았다.
유운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제,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잘.”
“네?”
“앞으로 ‘잘’하시면 돼요, ‘잘.’”
“‘잘’이라….”
고작 한 글자.
하지만 수많은 해석이 가능한, 무거운 단어임을 모를 리 없다.
“좋습니다.”
유운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고작 ‘잘’. 그리고 ‘좋습니다.’
하지만 영특한 두 사람이, 그 짧은 단어 속에 숨은 뜻을 모를 리 없었다.
“그거면 됐어요.”
서문요란은 그때야 얼굴을 풀고 싱긋 웃었다.
“다음에 또 봬요, 제 투자 대상 일호 님!”
서문요란은 그렇게 말하고,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놀랍게도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고서.
‘홀린 기분이구나.’
그러나 그녀의 호감과 선의만은 명확히 알 수 있었으니.
유운은 두 주먹을 맞잡고 깊게 허리를 숙였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
은은하면서도 싱그러운 향기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