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인연이 이어지다 (5)
만서각에 하나뿐인 강당, 운몽전은 덩치가 산만한 사내들로 가득했다.
구릿빛 피부의 남방인, 바로 호각대원들이었다.
쨍쨍…!
서로 부대낄 정도로 좁은 공간에 날씨까지 후덥지근해서 땀이 줄줄 흘렀다.
그러나 누구 하나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은 없었다.
“주군께서 방에서 나오지 않으신지도 벌써 사흘째! 홀로 가문의 명예를 짊어지셨으니 얼마나 괴로우시겠느냐?”
설영이 뜨거운 목소리로 유운의 처소를 가리켰다.
“평생 글로만 무공을 배우신 분인데.”
“서촌을 위해, 그 흉악한 적인걸과 싸우게 되었으니…”
“심적인 고통이 심하시겠지.”
“암, 그렇고말고.”
“그런데 요즘 어깨 많이 두꺼워지셨는데…”
조그마한 잡소리를 무시하고, 설영이 소리쳤다.
“그게 다 무엇 때문이냐?”
“서촌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백성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렇다. 모두 우리를 위해서다!”
설영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크흐흑. 속마음은 여리신 분인데. 그리 큰 짐을 짊어지시다니!”
“내가 조금만 더 힘이 있었다면. 못된 적가 놈을!”
민머리의 사내들이 흥분하니,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왔다.
“주군께서는 잠도 주무시지 못할 정도로 힘드신데, 우리가 몸 편히 있어서야 하겠느냐?”
“맞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겠느냐!”
“수련!”
“공부!”
“맞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설영의 말에 사내들이 뜨겁게 호응했다.
“옳소! 옳소!”
“힘을 키워서 그 적가놈을 혼내줘야지!”
“우리 공자님을 괴롭히는 놈들은 단칼에!”
“말로만 해서 되겠느냐?”
준엄한 설영의 외침에 사내들이 다 함께 외쳤다.
“내 오늘 혼신의 힘을 다해 불태우리라!”
“막힌 벽을 뚫고 경지에 오르리라!”
사내들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좋다. 나 역시 너희들을 훌륭한 무인으로 만들어 내겠다. 주군을 위하여. 백리세가를 위하여!”
설영은 유운의 처소를 보면서 뜨겁게 외쳤다.
“진정한 고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초가 튼튼해야 하는 법! 그러기 위해서는….”
오랜만에 이론 수업이 시작되었다.
음양오행부터, 기경팔맥을 거쳐, 인체의 삼백육십오 혈도까지!
귀 기울여 들으면 참으로 주옥같은 강의였다.
하지만….
드르렁, 드르렁~
쿵, 쿵!
술 취한 사람처럼 엎어지고, 화살을 맞은 사람처럼 고꾸라지고.
짝!
“조충, 네 이놈! 공자님께서 홀로 자신만의 짐을 짊어지고 계시거늘! 어찌 늘어지려 하느냐!”
스스로 뺨을 때리는 대원도 있었고,
“자지 않는다, 졸지 않는다, 흘려듣지 않는다!”
감기는 눈을 두 손가락으로 억지로 벌리는 대원도 있었다. 하지만….
“기는 대저 천지교통(天地交通)의 수단으로, 발바닥의 용천과 머리 꼭대기의 천령을 통해 물아일체를 이루는 것으로 목적으로 하며…. 이를 위해서는 충맥을 자극하여 양교맥으로 이끌고…”
스르륵. 스르륵.
곳곳에서 대원들이 땅으로 꺼졌다.
멀리서 보면 검은 고구마밭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렇게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났다.
“먼저 축기(蓄氣), 기를 몸 안에 쌓아야 하며, 이후 운기(運氣), 기를 순환시켜 강건하게 해야 하며. 그다음으로 발…. 네 이놈들!”
설영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대원들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조, 졸지 않았습니다!”
“멋진 강의였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어디까지 말을 했지?”
서릿발 같은 눈빛에 대원들이 버벅거렸다.
“어, 어디까지 했지?
“뭐, 뭔가 어지러운 것들이 많이 지나갔는데.”
“브…바…부…아, 맞다. 발! 발입니다!”
대원 하나가 환한 얼굴로 소리쳤다.
“맞아, 그거였어.”
“발 뭐시기였지.”
“발, 발입니다, 무사부님!”
“이어서 강의해주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사내들이 소리치자, 설영이 한결 풀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주 안 듣지는 않았구나. 그래, 축기와 운기의 다음 단계는 발… 크흠. 발…”
“발, 무엇입니까?”
설영은 초롱초롱한 사내들의 눈망울을 외면했다.
“커흠. 기를 발출하는 단계로 이어진다. 이 세 단계야말로 내공의 기초이자 전부! 이를 위해서는 내공 심법이 필요하며….”
강의를 이어가던 설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 주군!”
“고, 공자님이 나오셨어.”
“유운 공자님!”
“우와아아!”
며칠 만에 나타난 유운을 보고, 사내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수업 중인데 방해하였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모두 일어서서 공자님을….”
“천하를 얻는 데는 십 년이 걸리고, 검을 얻는 데는 평생이 걸린다고 하였습니다.”
유운이 미소 지으며 무공서를 가리켰다.
“오늘 하루 걷지 않는 자가, 어찌 길의 끝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일어서려던 사내들이 감격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내가 어리석었구나!”
“저희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아주십시오, 공자님!”
“저희도 마음먹으면 한 공부합니다!”
민머리 사내들의 외침에 유운이 빙그레 웃었다.
“그럼 잠시 참관하도록 하겠습니다.”
“주군께 최고의 수업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무려 주군이 지켜보는 수업이다. 설영의 얼굴도, 사내들의 민머리도 다 같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의지로도 거스를 수 없는 재난이 있는 법.
설영의 강의가 그러했다.
“천지의 음양을 흡(吸)자결을 통해 흡수하고, 폐(廢)자결을 통해 단전으로 유도하며, 의식을 관(觀)하여 내부에 흡착도록 하고…”
스르륵. 쿵. 딱!
스르륵. 쿵. 딱!
아이 열 딸린 아낙네의 빨랫방망이처럼 깊은 울림!
사내들이 화살을 맞은 듯 픽픽 쓰러졌다.
“이, 이놈들이 감히. 주군께서 보고 계시는데!”
설영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하, 하지만 설 사부의 수업은 너무 어렵습니다.”
“무슨 관이 어떻고, 흡이 어떻고. 솔직히 하나도 못 알아듣겠습니다.”
하늘은 공평한 법.
남방인들은 몸을 쓰는 일에는 타고났지만, 머리를 쓰는 일은 그렇지 못했다.
“그건 핑계다! 복잡한 초식의 변화는 그러면 어떻게 배워냈느냐?”
백리세가의 검법은 심오한 검의(劍義)를 품고 있으니.
단지 몸을 잘 쓴다고 경지에 오를 수는 없었다.
“그거야 공자님께서 가르쳐주셨으니까요.”
“공자께서 가르쳐 주시면 귀에 쏙쏙 들어오던데.”
“맞아. 그때만은 진짜로 이해가 되더라고.”
설영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본가의 아이들을 가르치듯 하였구나!’
어릴 때부터 정식 무가의 가르침을 배운 아이들이다.
가르치는 이도, 배우는 이도 복잡한 무학 용어나 추상적인 비유 등에 익숙했다.
하지만 이들, 남방인은 아니었다.
‘나 또한 이렇게 배웠는데…아!’
설영이 낭패한 표정을 짓다가 손을 마주쳤다.
“혹시 주군께서 이들을 가르쳐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니 될 말씀입니다. 어찌 무사부의 권한을 침범하겠습니까?”
“주군께서는 진정한 도(道)를 위해서라면 헛된 예를 따를 필요가 없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지나가듯 한 말이었는데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어찌 주군의 말을 흘려듣겠습니까? 혹여 잊을까 봐 매일 밤에 기록해두고는 합니다.”
설영이 흥분한 표정으로 외쳤다.
“이론만큼은 공자께서 가르쳐주셨으면 합니다!”
“맞습니다, 그래야 저희도 더 빨리 강해지지 않겠습니까?”
“사실 실전도 공자께서 가르쳐주시는 것이 더 나은데….”
크게 외치는 자부터, 중얼거리는 자까지.
무사부와 대원들이 하나같이 바라니, 유운도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럼 잠시 무례를 범하겠습니다.”
유운이 연단에 올라서 강의를 이어갔다.
“어디가 제일 이해가 안 되십니까?”
“기경팔맥이니, 축기니, 운기니…. 도통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겠습니다, 공자님.”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여길 보시지요.”
유운이 빙그레 웃으며 책상을 탁 쳤다.
책상 위에는 간단한 주전부리가 보였다.
“이게 무엇입니까?”
“딸기 갈은 거랑, 복숭아 졸인 거 같은데?”
“소화가 만든 특제 간식이라던데?”
“안 먹어봤나? 꼴깍, 엄청 맛있다고!”
몇몇 사내들이 군침을 흘렸다.
“기(氣)가 이와 같습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자연의 생명력이 이 과일로 옮겨갔고. 이 과일을 먹은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아, 기 역시 그냥 음식과 같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씹고 삼키는 대신, 들이쉬고 내쉰다는 점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설명에, 사내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결국 먹는 거구먼!”
“몸에 이로운 먹거리라는 소리지.”
“크흠. 이론은 몰라도, 먹는 거는 자신 있지!”
유운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나쁜 음식을 먹거나, 잘못된 방법으로 먹으면 탈이 날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공자님. 지난번에 상한 말고기 먹고 배탈 난 거 생각하면….”
“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있는 나쁜 기는 걸러내고, 좋은 기만을 몸 안으로 받아들이는 방법. 그것이 바로 내공 심법입니다.”
“아…!”
유운의 강의에는 어려운 말이 하나도 없었고, 복잡한 이론도 없었다.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쉬운 말로 가르치니, 남방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과일도, 곡식도 모두 자연에서 비롯됩니다. 이 딸기를 보십시오.”
유운이 싱싱한 과일을 가리켰다.
“고놈 참 맛나게 생겼네.”
“보기만 해도 건강해지는 기분이야.”
“기의 일부만 흡수해도 이렇게 생명력이 넘쳐나는데. 자연에 넘쳐나는 기, 그 자체를 흡수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유운이 의미심장하게 미소 짓자, 대원들이 잔뜩 흥분하여 외쳤다.
“건너 건너 먹는 것보다 훨씬 많이 먹을 수 있을 겁니다!”
“밥보다도 훨씬 영양 넘치는 게 바로 기로군요!”
“내공을 쌓는다는 건 결국 그런 엄청난 걸 먹는다는 소리니….”
“내공을 쌓은 고수가 셀 수밖에 없구만!”
이해가 되자, 조금씩 욕심도 났다.
“하지만 공자님, 내공심법의 구결은 진짜 어렵습니다. 특히 전신의 혈도는 너무 복잡해서….”
탁.
유운이 다시 책상을 두들겼다.
이번에는 책상 그 자체였다.
“이게 무엇입니까?”
“책상 아닙니까?”
“아무리 저희라도 그 정도는 압니다, 하하!”
“만약 책상이라는 단어를 모른다면, 이 책상을 쓰지 못할까요?”
“그럴 리가요.”
“암, 눈 두 개 달린 사람이라면 뭐에다 쓰는 물건인지 모를 수가 없지.”
“내공심법 역시 그러합니다.”
“……!”
“이론이란 결국 실체를 설명하는 방법에 불과합니다. 앎이 먼저지, 이론이 먼저가 아닙니다.”
학사답지 않은, 아니 학사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축기를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바르게 숨 쉬는 법을 배우면 족합니다.”
후흡.
호.
후흡.
호.
다 함께 유운을 따라 호흡하니.
시끌벅적했던 강당이 금세 조용해졌다.
대원들은 어린아이처럼 맑은 얼굴로 명상에 빠졌다.
호흡뿐만이 아니었다.
유운은 한 사람 한 사람 등 뒤에 손을 올리고, 내공의 기운을 느끼게 해주었다.
“아…! 이런 식으로 흐르는 거구나.”
“이런 느낌이구나, 이게 운기였어!”
몸으로 이해하는 데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들이 남방인.
대원들은 운기결 또한 금방 배울 수 있었다.
“기를 배출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어서 가르쳐주십시오!”
대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외쳤다.
수박 겉핥기로만 알다가 진짜 수박의 맛을 보았으니.
땅에 머리를 박던 돌덩어리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크으으! 과연 주군이시로구나!’
지켜보던 설영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번(一) 책상을 칠 때(打)마다, 제자들의 머리가 트이니.
이보다 더 뛰어난 강사(講士)가 어디 있겠는가?
‘이 사내가 내가 고른 주군이다!’
설영은 온 세상에 크게 외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