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인연이 이어지다 (6)
‘무리하시면 아니 될 터인데….’
설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유운을 바라보았다.
무사부로서의 자존심, 혹은 시기심 때문이 아니었다.
“기를 쌓고, 단련하고, 발출하고. 이러한 단계를 통해 신체는 더할 나위 없이 강건해지니, 무공에 입문했다 말하기에 충분합니다. 허나…”
유운이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진정 놀라운 경지는 그다음부터입니다.”
“놀라운 경지라 하심은…?”
“검기지경!”
“……!”
“거, 검기!”
“들어본 적은 있어. 칼이 엄청 날카로워진다던데?”
“뭐든 썩둑 썩둑 잘려나간다더니만.”
대원들이 수군거렸다.
‘검기라니…. 아직은 아니야.’
설영은 초조한 마음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대원들에게 운기 경로를 알려주는 것을 보니, 생각과 달리 내공을 익히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제대로 무공을 익히신 지 몇 개월 되지도 않으셨을 터인데.’
본가에서는 온갖 이유를 들어 진짜 무공을 익히게 하지 못했을 터.
‘당장 적랑쌍도를 이길 수는 없겠지. 허나 협객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 했으니.’
자신은 십 년 넘게 걸렸지만, 주군의 재능은 뛰어나니…. 넉넉잡고 오 년!
자신과 함께라면 그 정도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주군을 지켜야 한다!’
혹시나 생각 없는 이가 ‘검기를 보여주십시오, 공자님!’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주군이 망신을 당하게 할 수는 없는 법.
“명색이 무사부이거늘. 계속 주군께 수업을 맡겨놓을 수는 없지요.”
설영이 앞으로 성큼 나섰다.
‘내가 곤란을 겪을까 봐 배려하는 것이로구나.’
유운의 입가에 절로 따스한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며칠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유운은 달랐다.
“괜찮습니다, 설 사부. 제가 계속”
“아닙니다, 어찌 주군에게만 짐을 지울 수 있겠습니까?”
“이제 저도….”
“아닙니다,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설영의 얼굴에 굳은 결심이 가득하니, 유운도 더는 말릴 수 없었다.
“검기라 함은….”
벌써 학습이 된 것일까.
대원들은 설영이 입을 열자마자 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번엔 다를 것이다.’
스르릉.
설영이 칼을 뽑자, 다들 화들짝 놀랐다.
“서, 설 사부. 진정하시오.”
“다, 다시는 졸지 않겠습니다, 설 사부!”
설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아무리 말로 해도 못 알아들으니, 보여줘야겠지. 자, 보거라.”
설영이 검을 잡고 지그시 눈을 감자….
스으으…!
검 위에 뿌연 안개가 어리는 것이 아닌가?
탁한 회색빛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오오! 저게 말로만 듣던 검기인가?
“신기하구만, 신기해.”
“시장통에서 보여주면 동전 깨나 받겠구만.”
전혀 긴장감 없는 소리에 설영의 눈썹이 꿈틀했다.
설영은 말없이 두꺼운 서책을 들더니 검 위에 던졌다.
스르륵. 팟!
그러자 놀랍게도 서책이 반으로 갈라졌다.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무슨 전설의 명검인 건가?”
“보면 몰라? 우리랑 똑같은 수련검이잖아. 날도 안 세웠다고.”
“그런데 저게 된다고? 대단한걸.”
호각대원들 역시 무인. 예리함이 갖는 유리함을 모를 리 없었다.
모두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설영을 바라보았다.
‘크으. 그래, 바로 이 눈빛이야. 내가 바로 고독랑이다!’
설영이 자신감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를 일컬어 검기지경의 일단공(一段功)이라 한다. 진기가 막 응집하기 시작하는 단계로, 심회(深灰, 어두운 회색)검기라 칭하기도 한다. 검기의 숙련도는 기의 명도(明度)로서 측정할 수 있는데….”
“…….”
“…….”
다 같이 자연스럽게 유운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다 주길 기다리는 아기 새들과 같았다.
“어렸을 때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보물을 품고 있는 하늘 탑.”
“들어보았습니다, 공자님.”
“저도요!”
보물 이야기에 사내들이 흥미를 보였다.
“그 보물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탑의 첫 번째 층에서 만나는 보물이 바로 검기입니다. 검을 더없이 날카롭게 만들지요.”
“오오오!”
“물론 보물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보통 다섯 개의 계단을 올라야 완전한 보물을 얻을 수 있다고들 말합니다.”
“그럼 일단공이라는 말이…?”
“일 층에 닿기 위해 걸어야 하는 첫 번째 계단이라는 뜻이지요.”
“아! 그럼 심회진기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세상천지에 가득한 것이 기입니다. 눈이 많이 온 날, 땅에서 막 파낸 눈은 어떠합니까? 새하얗습니까?”
“흙이 묻어 더럽습니다!”
“일단공이 바로 그렇습니다. 몸 안의 기를 처음으로 끄집어내서 뭉쳐내는 단계이니. 나쁜 기를 완전히 털어내지 못해, 조금은 뿌옇게 탁하게 보이는 것이지요.”
“오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과연 공자님!”
유운의 쉬운 설명에 사내들이 무릎을 ‘탁’ 쳤다.
“설 사부, 그렇게 안 봤는데 참 재주가 없구만.”
“맞아. 이렇게 쉬운 이야기를 그리 어렵게 해? 참 이상한 사람이로구만.”
설영의 표정이 떫은 감을 씹은 듯 떨떠름해졌다.
‘본가에서도 다들 이리 설명한다고! 나도 이렇게 배웠다고!’
한쪽 마음은 억울한데, 한쪽 마음은 주군의 뛰어난 강의에 감탄하니.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좋다, 이번엔 제대로 보여주마!’
설영이 진중한 표정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검 위에 뿌연 기가 어리자, 대원들이 눈을 빛냈다.
“오, 검기가 조금 더 선명하고 밝은걸?”
“량회(亮灰, 밝은 회색)검기라는 말이 딱 맞겠어!”
“그럼 저게 바로 이단공(二 段功)인가?”
“저걸로 뭘 할 수 있는 거지?”
뚜벅뚜벅.
설영이 뒤돌아 걸어가더니, 수련용 인형 앞에 섰다.
숙련된 장인이 신경 써서 만든 을급(乙級) 목각인형이었다.
무인이라도 날 없는 검으로 어찌해볼 대상은 아니었건만….
스팟!
놀랍게도 두꺼운 나무 흉갑이 단번에 갈라졌다.
목각인형의 심장 어림에는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힘주어 휘두른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정 영감이 어지간한 칼질에도 끄떡없다고 자신하던 물건 아니야?”
“날 세운 검으로도 어려울 터인데…. 대단한걸!”
호각대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리 나무라도 사람 모양의 ‘적’이다.
종이를 벴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반응이었다.
“과연 백리세가의 무사부답구만.”
“그럼 그럼. 무사부는 아무나 하나?”
“역시 고독랑이야.”
“그냥 바보…. 아니 소화의 밥만은 아니었어.”
삐직!
마지막 말에 설영의 이마에 힘줄이 솟아올랐다.
‘이 빙호, 아니 고독랑 설영을 뭐로 보고!’
한때 범접 불가였던 자신이 어찌 여기까지 추락했단 말인가?
설영은 원흉의 모습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진정해라, 심장아! 주군께서 보고 있지 않으냐!’
유운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맴돈 것을 보니, 자신을 좋게 본 것이 분명했다.
설영의 입꼬리도 저절로 올라갔다.
“내공 심법의 훌륭함은 이와 같다. 외공(外功)수련은 결국 내공(內功) 수련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하니. 백날 근육을 단련해봤자 한계가 있는 셈이다.”
설영의 말을 들은 유운은 살짝 걱정이 들었다.
‘설 사부께서 실수하셨구나.’
근육을 숭상하는 남방인들에게는 언짢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유운의 생각은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쿵!
강당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한 사내가 들어섰다.
“무슨 개소리냐!”
커다란 문을 꽉 채우는 거구의 사내.
바로 호각대주 거암이었다.
방금까지 산을 타고 왔는지 온몸에 김이 펄펄 났다.
“주군, 돌아오셨군요! 마중하지 못한 죄는 있다가 청하겠습니다.”
거암은 유운을 보고 기쁜 얼굴로 인사한 후, 다시 안색을 굳히고 설영을 노려보았다.
평소라면 설영도 살짝 굽히며 친구의 체면을 세워주었을 터.
그러나 이곳은 자신의 영역인 강당이었다.
무엇보다 주군의 앞이 아닌가?
설영은 물러나지 않고 얼굴을 굳혔다.
“듣기 불편한 말이지만, 진실이 그러한 것을 어찌하겠느냐.”
“외공이 내공만 못하다? 너는 네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느냐?”
“물론이다.”
“설영, 네 놈이…!”
“그 전에…. 거암, 네 이놈!”
설영이 냉엄한 표정으로 호통을 쳤다.
“이곳은 무사부의 강의실이고, 나는 백리세가의 무사부다. 네가 감히 가주께서 부여하신 무사부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냐?”
평소라면 아무리 화가 나도 무사부의 권위를 존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거암 역시 평소와는 달랐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너야말로 지금 가문의 시조께서 내리신 교지를 어기고 있음을 모른다는 말이냐?”
거암이 성큼 다가오더니 양팔을 걷어 올렸다.
낙타처럼 불끈 솟아오른 이두박근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근육이야말로 인간과 신이 맺은 신성한 계약의 증거! 너는 그런 신앙의 상징을 모욕하고 있다.”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터무니없는 말에 설영이 발끈했다.
자신을 놀리려 말을 지어냈다고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이대로 두면 두 분의 사이가 크게 상하겠구나.’
유운이 쓴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분명 시조께서 이리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문도, 민족도, 믿음도 다른 이들이 오직 천하를 위해 하나로 뭉쳤으니.
사백 년 전, 천하는 극심한 혼란에 시달렸다.
사방에서 마두와 효웅이 몸을 일으키고, 마수들까지 날뛰니.
기나긴 맹의 치세가 마침내 끝난다고 말하는 자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런 암흑기에 분연히 몸을 일으킨 자가 바로 백리세가의 시조, 백리선휘였다.
백리세가의 울타리 아래 있는 자들은 마땅히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라.
백리세가의 아래에는 종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양한 토착 민족은 물론 남방의 이민족까지.
피부색도, 언어도, 종교도 다른 이들이 태반이었다.
특히 사상과 종교로 인한 다툼을 경계해야 하니.
아무리 이해가 되지 않는 생각이라도 남을 해치는 사상이 아닌 한, 절대적으로 존중하라!
그렇게 가문의 시조가 세가의 모든 구성원 앞에서 교지(敎旨)를 내렸으니.
설령 가주라도 고유한 신앙에 대해서는 간섭할 수 없었다.
무사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 알겠느냐, 반쪽만 아는 녀석아?”
“미, 믿지 못하겠다!”
시조의 교지나, 유운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세상에 그런 신이 어딨어?’
신의 상징이 성스러운 불도, 무기도, 지식도 아니고 근육이라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어리석은 놈. 그렇다면 신의 형상을 보여주마.”
거암이 당당히 말하며 가슴팍을 뒤척였다.
남방인들의 얼굴이 설렘으로 달아올랐다.
“설마 신의 형상을 여기서 뵐 수 있을 줄이야!”
“대주께서 그것을 가지고 계시다니!”
아마도 신의 형상을 새긴 신물(神物)이리라.
‘남방인들의 신이라.’
유운조차 글로만 보았을 뿐, 직접 그 형상을 본 적은 없었다.
대체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는 신은 어떻게 생겼을까?
근육의 신!
남방 민족의 수호자는….
반짝!
제일 먼저 드러난 것은, 둥글둥글한 민머리!
얼마나 정성스럽게 문질렀는지, 환하게 빛이 났다.
몽실몽실.
그다음은 풍성한 수염이었다.
얼마나 숱이 많은지 부풀어 오른 실뭉치와 같았다.
마침내 전신이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구릿빛 피부!
터질듯한 근육!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이게 너희들의 신이라고?”
휘청!
설영이 넋을 잃고 비틀거렸다.
단지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걸린 것은, 오직 국부를 가리는 얇은 천 조각뿐!
게다가 자세조차 요상했다.
척!
한쪽 무릎을 굽히고, 몸을 활처럼 굽힌 후, 두 팔로 커다란 원을 그린다.
누가 봐도 온몸의 근육을 과시하는 모양새.
거기에 입가에는 보름달 같은 웃음이 가득하니.
장난기 가득한 ‘근육의 요정’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무, 무슨 신이 저따위로 생겼어!’
하지만 미(美)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른 법이다.
“으하하, 참으로 근육이 영롱합니다, 대주!”
“오랜만에 뵈었는데도 이리 위엄 넘치시니.”
“역시 신의 형상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습니다!”
남방인들이 잔뜩 흥분해서 신물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근육으로 육신을 정화하여, 천국에 이르리니!”
“근육!”
“근육!”
덩어리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서 환호하니.
보고만 있는데도 가슴이 콱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