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25화 (25/114)

제25화

인연이 이어지다 (7)

위엄 넘치는 외모나 고풍스러운 의상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술 닷 말은 마신 듯 불콰한 얼굴.

근육을 살포시 덮는 뱃살.

적어도 신이라면 저따위로 생겨서는 안 된다!

“눈부셔, 너무 아름다워!”

“오오…. 힘이 샘솟는구나.”

시커먼 사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근육을 만지며 황홀해했다.

‘저 미친놈들이 근육을 숭상하는 줄은 진즉에 알았지만….’

신의 형상조차 근육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너, 너희들의 믿음은 존…중한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느라 입술이 거세게 떨렸다.

“하지만 이곳은 무림! 믿음이 아니라 칼로서 자신을 증명하는 곳!”

“……!”

“그렇다면 증명해봐라, 외공이 내공 못지않다는 사실을.”

설영이 거암에게 수련검을 툭 던졌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는 시간.

“좋다!”

거암이 팔을 휘휘 돌리며 나섰다.

꿀꺽.

“대체 어찌하려고?”

“아무리 대주라도 저런 검으로는….”

날이 서지 않은 검은 몽둥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반면 갑급(甲級) 목각인형은 몇 번을 말리고, 약을 바르고 발라 방어력을 강화한 물건.

진검으로 내리쳐도 흠조차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후흐흡…!”

거암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가슴을 부풀렸다.

동시에 양팔의 이두박근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온몸에 새겨진 짐승 문신 또한 같이 기지개를 켰다.

흉포한 곰이 성을 내는 듯 위협적인 모습이었으나….

‘아무리 거암 너라도 안돼.’

사람의 육체로 오를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설영은 기존 무학 이론을 바탕으로 확신했다.

그리고 거암의 근육이 폭발했다.

펑!

한참이 지나서야 거센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은 처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마, 맙소사.”

“역시 대주님이야!”

“와아아아…!”

놀랍게도 목각인형이 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비록 철로 만든 뼈대는 상하지 않았으나, 흉부가 쩍 갈라졌으니.

사람이라면 심장이 쪼개져서 죽은 꼴이었다.

“미, 미친놈이…!”

여기서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진 지 알아챈 사람은 둘뿐이었다.

“실로 놀라운 탄력이로군요!”

유운은 날라진 파편을 살피며 감탄했다.

근육을 압축하여, 압도적인 속력을 뽑아냈다.

힘으로 몽둥이를 신검으로 만든 꼴이었다.

“이익…. 아직 끝이 아니다!”

설영이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섰다.

솨아아…!

파아앙…!

설영의 전신에서 한차례 거센 바람이 터져 나왔다.

설영이 지그시 눈을 감자, 검 위에 하얀 기운이 어렸다.

살짝 어둡기는 하나,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선명했다.

“저, 저건 뭔가 달라!”

“눈에 이리 잘 보일 정도의 기운이라니.”

“심백(深白, 어두운 백색)검기!

설영의 검이 또다른 갑급 목각인형을 향했다.

정성 들여 무두질한 소가죽 갑옷을 입은, 가장 값비싼 인형이었다.

“설마 저걸…?”

“아무리 설 사부라도 저건 안돼. 검으로 아무리 내리쳐도 생채기밖에 안 나는 물건인데….”

무인이 아닌 이들은 고작 가죽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소가죽 갑옷은 전력을 다한 진검조차 막아낼 정도로 훌륭한 방어력을 자랑했다.

일반 무인들에게는 사실상 최고의 방호구였다.

하지만 설영이 검을 내리친 순간….

스팟!

목각인형이 수평으로 갈라졌다.

“맙소사. 정 영감의 가죽 갑옷을 저리 쉽게 벤다고?”

“가죽을 이중으로 덧대서 화살에도 뚫리지 않을 거라 자신했는데.”

충격을 받은 호각대원들이 수군거렸다.

“저, 정말 검기라는 게 엄청난 거였구나!”

“설 사부, 정말 대단한 고수였잖아?”

쇠로 만든 뼈대에 베인 흔적이 남을 정도였으니.

설영을 보는 대원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하지만 설영의 속마음은 조금 달랐다.

‘주, 죽다 살았다.’

최근 유운과의 논검을 한 후, 간신히 오른 경지였다.

겉보기와 달리 아슬아슬한 시연이었다.

“자, 보았느냐, 이것이 검기지경의 삼단공(三段功)으로….”

하지만 거암도 가만 보고 있지 않았다.

“후우우우우웁!”

곰 같은 사내가 한껏 숨을 들이켰다.

들이쉬는 동작만으로, 사람들의 솜털이 곤두섰다.

‘뭔가…. 온다.’

‘말도 안 되는 게 온다!’

그리고 거암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후우우웅…!

집채만 한 사내가 태양을 가리니, 바닥에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그리고 하늘의 신장(神將)이 수련검을 내리쳤다.

콰아아아아앙…!

화탄이 폭발하는 듯한 굉음!

순간 공기가 증발했다가 뒤늦게 채워지니.

가까이 있던 대원들 서너 명이 튕겨 나가버렸다.

휘이잉…!

한차례 바람이 휩쓸고 갔다.

질기다는 소가죽은 통으로 터져나갔고, 수련용 목각인형은 폭발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직 크게 휜 철제 뼈대만이 남아 바닥을 굴렀다.

“우와아아아!”

“대, 대단해! 역시 우리 대주님.”

“보았느냐, 오만한 맹의 무인들아! 이것이 남방의 기상이다! 으하하하!”

남방인들이 다 같이 환호하며 거암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미, 미, 미친놈아…”

설영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찢기지 않아야 할 가죽이 찢어졌고, 쇠기둥조차 휘어졌다.

“기 하나 실리지 않은, 얇은 가검(假劍) 따위로 이걸?”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천하의 무인들과 의원들은 인간 근력의 최대치를 일단공으로 정의했다.

그러니 이론적으로, 삼단공의 검기를 맨몸으로 상대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이, 이건 반칙이야. 반칙이라고!”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

여인의 허리보다도 두꺼운 팔뚝.

그러면서도 몸놀림은 범처럼 날렵하니.

거암은 존재 자체가 인간의 한계에 대한 도전이었다.

“으하하하! 보았느냐, 이 얼음덩이야! 이게 바로 나다.”

“멋있습니다, 대주님!”

“역시 우리의 신이 옳았습니다.”

둘 다 갑급 수련 인형을 해치웠으니, 본질적으로 결과는 같았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결과는 차이가 컸다.

한쪽은 깊은 칼자국이 난 반면, 다른 하나는 뼈만 남고 산산조각이 났으니.

누가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는 뻔했다.

“근육을 믿느냐?”

“믿습니다!”

“수련하면 너희도 가질 수 있다. 이 강력한 힘을 말이다!”

“우아아아!”

거암이 외치자 남방인들이 광적으로 환호했다.

“안돼, 거짓말이라고, 거짓말!”

설영이 애타게 외쳤다.

다른 사람이 수련한다고 거암과 같은 몸을 가질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근육이 우리를 부른다. 가자, 얘들아!”

“근육! 운동!”

“근육! 운동!”

“으아아! 가자!”

“가자아아아!”

누가 말릴 새도 없었다.

남방인들 모두가 집단 광기로 하나가 되었으니.

우르르…!

순식간에 강당이 텅 비어버렸다.

“미친 돌덩어리 새끼들.”

설영은 징그럽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차돌처럼 단단한 몸.

그 돌보다 더 단단한 머리.

칭찬이자 욕이었다.

“죄송합니다, 주군.”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설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무엇이 말입니까?”

“직속 수하라는 놈이 이리 못난 모습을 보였으니.”

가문에서 기재라고 떠받들어 주니 착각했나 보다.

아무리 남방인이고, 친우라 하나 겨우 외공 수련자에게 질 줄이야!

“옛말에, 과한 겸손은 예가 아니라 하였습니다. 아직 이립(而立, 서른)도 되지 않은 검수가 삼단공에 올랐는데, 누군들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주군! 크흐흑.”

유운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설영이 감격하여 눈물을 글썽거렸다.

“하지만 진 건 진 것입니다. 사내로서 승복을….”

“한번 지면 영원히 진 것입니까?”

“네?”

“설 사부는 한번 무너지면 일어서지 못하는, 그런 약한 사내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 설영은…!”

설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다음에 이기시면 됩니다.”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거암은 순수한 육신만으로 삼단공 못지않은 힘을 발휘했다.

거기에 체력조차 넘쳐나는 괴물이었다.

반면 자신의 내공에는 한계가 있었다.

“같은 위치에서 상대하기 힘들다면, 한 단계 더 올라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그 말씀은…! 아아, 설마 제가 다음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설영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그러나 간절히 바라는 듯한 얼굴로 유운을 바라보았다.

사단공!

무른 쇠조차 가르는 지고한 경지였다.

“고독랑 설영이 못한다면, 백리의 어느 젊은이가 할 수 있겠습니까?”

“주우우구우우운! 크흐흑!”

쿵.

설영이 거의 울 듯한 얼굴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 설영, 기필코! 목숨을 다하여 이루겠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한계를 지었다.

하지만 지금은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주군! 바로 오늘부터 수련하겠습니다!”

설영 역시 잔뜩 흥분해서 뛰어나갔다.

목표를 잃고 방황하던 천재가 다시 뜻을 세웠으니.

“설 사부라면 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유운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강당에는 유운만이 홀로 남았다.

“태풍이 쓸고 간 것만 같구나.”

친우가 술에 취하면, 안 취한 사람이 뒷정리하는 법.

유운은 무에 취한 친우들을 위해 강당을 정리했다.

조각난 나무 부스러기들, 찢긴 가죽 조각들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뼈대만 남은 수련 인형이 보였다.

“무인은 칼로서 자신을 증명한다!”

설영의 말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유운은 자신도 모르게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후흡.

한줄기 청량한 바람이 입에서 단전으로 흘러들어왔다.

조화무궁선법이 바람을 이끄니.

바람이 머금은 기는, 황금빛 밭으로 흡수되었다.

유운은 문득 궁금했다.

‘나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유운의 의지가 일자, 단전의 기 또한 같이 일어나니.

잠들어있던 새싹이 머리를 들어 올렸다.

콸콸콸….

도도한 기운이 일더니, 조화무궁의 흐름을 따라 흘러갔다.

그리고 검 위에 옅은 안개가 서렸다.

“…이건 대체?”

검기의 경지를 나누는 척도는 두 가지.

첫 번째 기준은 검기의 응집도.

기가 뭉쳐있으나, 아직 연하고 단단하지 않으니 일단공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두 번째 기준은 색깔.

보통 일단공 검기의 색깔은 탁한 회색일 터인데.

“어찌 이리 맑단 말인가?”

어두운 빛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심회검기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생각에 잠긴 유운은 곧 이유를 깨달았다.

“과연 신의의 조화무궁은 비할 데가 없구나.”

유운의 단전은 완벽하게 정화된 옥토와 같으니.

거기서 자라난 기의 새싹에 탁한 기운 따위가 묻을 리 없었다.

“어디 한번….”

유운이 수련검을 들고 뼈대에 가져다 댔다.

삼단공의 검사조차 생채기만 냈고, 신력을 타고난 장사조차 휘게 만든 것이 고작이었던 무쇠 덩어리.

마땅히 아무런 흔적도 남길 수 없어야 하지만….

스르륵.

뎅강!

어이없게도 쉽게 베어졌다.

이 광경을 본 무인이 있었다면, 경악하여 외쳤으리라.

“마, 말도 안 돼! 일단공의 검기로 어찌?”

“무학 이론상 절대 불가능하거늘!”

“만약 이게 정말이라면… 무림의 역사에 새로운 이름이 새겨질 것이오!”

하지만 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현의 말씀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구나.”

배우고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그러니 자랑할 것도, 아쉬울 것도 없지 않은가?

유운은 담담히 웃고는 옷자락을 털며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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