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28화 (28/114)

제28화

인연이 이어지다 (10)

쇄애액!

한 사내가 풀잎 위를 나는 듯 달린다.

이십여 명의 복면인이 그를 쫓았다.

「잡아라!」

「절대 놓치면 안 돼!」

칼로 가른 듯 날카로운 절벽 위.

사내와 추격자들이 마주했다.

「포기해라, 검마!」

「이미 천라지망이 펼쳐졌으니. 아무리 네놈이라도 살아날 길은 없다.」

추격자들은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끈질기고 독하구나. 부동명왕이 사냥개를 잘 키웠어.」

검마가 대놓고 도발했지만, 추격자들의 관심은 그에게 있지 않았다.

「네 놈은 교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감히 교주님의 물건을 탐하다니.」

「그것이 어떤 물건인 줄 알고 감히…!」

검마의 왼손.

불길한 기운을 쏟아내는 검은 책이 보였다.

사람의 피부를 종이 삼고 피를 먹물 삼아 쓴 책이었다.

무엇보다 책의 한가운데는 커다란 눈알이 박혀있었으니.

‘저토록 불길한 물건은 처음 보는구나!’

유운이 몸을 부르르 떨 때였다.

번쩍!

감겨있던 눈이 떠졌다.

새까만 눈동자 속에는 불길한 어둠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니.

무저갱(無底坑).

깊이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곳에서 무언가 유운을 바라보았다.

‘보, 보셨습니까, 스승님?’

유운이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모든 것이 안개처럼 사라졌다.

심지어 눈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 무엇을 말이냐?

“…아닙니다.”

여러 신선이 본 영상이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 분명했다.

유운은 한숨을 쉬고 영상에 집중했다.

「그러는 너희는 이게 무엇인 줄 아느냐?」

검마의 비웃음에 그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보기만 해도 두려운 귀물.

하나 누구도 정체를 아는 이는 없었다.

「이런 잡스러운 주술서가 천하를 되찾아 주리라, 정녕 그리 믿는 것이냐?」

「그렇다. 그 책만 있으면 교주님께서 별의 운명을 움직이시리니. 천하는 다시 교의 것이 될 것이다!」

「맹이 피를 흘려서 천하를 구했는데. 여기서 끼어든다? 너무 파렴치하지 않느냐.」

「감히! 교의 가르침을 받고, 보살핌을 받은 놈이 교를 모독하느냐?」

「내가 모독하는 건 교가 아니라, 교주지. 정확하게는….」

검마가 가당찮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죽을 때가 한참 지난 늙은이의 추한 욕망이지.」

「이 노오오오옴! 결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리라!」

「좋다. 너희도 내 손속에 자비가 없다고 탓하지 말아라!」

한 사람과 한 무리가 부딪히니.

현란한 검술과 놀라운 보법이 이어졌다.

번쩍!

콰득!

거침이 없고, 집요하며, 잔인한 검술!

이제껏 보아온 정도의 무공과는 결이 달랐다.

“실로 대단한 무공입니다!”

그동안의 훈련 덕분일까.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초식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기서 끝났다면, 여느 때처럼 감탄하며 끝났으리라.

영상은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콰득!

살기 위해서 적의 귀를 물어뜯고, 눈알을 후벼 판다.

서걱!

목이 날아가고, 배가 갈라지고, 뼈가 튀어나오는 광경이 이어졌다.

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날 것의 실전, 그 자체였다.

“사, 사람이 어찌 저럴 수가…!”

유운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저앉았다.

의서(醫書)에서 본 인체 도해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우웩! 우웨애애액!”

유운은 신물이 나올 때까지 토했다.

- 외면하지 말고 보거라.

“……!”

- 싸움에서 진 자들이 어찌 되었느냐?”

“주, 죽었습니다.”

- 이래도 무인의 검이 그리 고상하게 보이더냐?

“…….”

유운은 뭐라고 반박을 하고 싶었다.

검은 그런 게 아니라고. 더 높은 도에 이르는 길이라고. 사람을 이롭게 하는 힘이라고.

하지만 혀를 빼물고 죽은 시체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원한에 찬, 억울함에 찬 눈을 보니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 검마는 운이 좋았다. 습격이 이어졌지만, 모두 이겨내고, 마침내 신선까지 되었으니.

“…….”

- 하지만 패자는 다르다. 네가 저기 누워있는 시체가 된다면 어떻겠느냐?

유운은 처음 보는 ‘진짜 죽음’이었다.

- 아니지. 너 하나의 목숨으로 끝나면 운이 좋은 게다. 원수가 과연 하나의 목숨만으로 만족하겠느냐?

“…삭초제근.”

- 그래. 풀을 뽑을 때는 뿌리까지 뽑지. 그것이 무림이니라.

동영상의 마지막. 검마가 필사적으로 싸운 이유가 나왔다.

「아빠!」

「여보, 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딸이 검마를 맞이했다.

수많은 사람을 베고, 자신 역시 수십 군데를 찔렸지만.

「어디 다친 곳은 없소?」

「전혀요. 아무도 우릴 찾지 못했어요. 당신은 괜찮아요? 당신이 죽는 줄만 알고…흑흑.」

「이리 아름다운 부인과 딸을 두고 어찌 죽겠소? 하하하.」

냉막했던 검마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아아…!”

그때서야 유운도 이해했다. 아니 가슴으로 느꼈다.

만약 소화가, 장노가 땅에 쓰러진다면.

자신의 힘이 부족해서 그들까지 피해를 본다면. 어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검을 드는 진짜 이유를요.”

- 무엇이더냐?

유운의 눈빛이 굳건하게 빛났다.

“내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 그래, 그렇지!

종남일패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연이 닿은 소중한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검을 들 것이며. 검을 든 이상….”

채앵…!

유운이 검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습니다. 어떤 상황이라도 살아남겠습니다.”

- 그래, 그거다. 그것이 진짜 무림이고, 진짜 검이다!

유운의 확고한 말에 종남일패가 흥분해서 외쳤다.

처음으로 검의 무게를 깨달은 그 날.

마음이 강철처럼 단단해진 그 날.

학사는 무인으로 거듭났다.

* * *

“괜찮으세요, 공자님?”

소화가 걱정스레 묻는다.

“뭐가 말이냐?”

“요즘 얼굴이 부쩍 창백해지신데다, 가끔 허공에다 말까지 하시고.”

소화가 말끝을 흐리며 눈알을 굴린다.

“너무 마음고생이 심하면 헛것을 보기도 한다는데.”

헛것이니 귀신이니 입에 올리는 것도 두려워하는 아이였건만.

커다란 두 눈에는 유운에 대한 걱정만 가득했다.

“하하하. 녀석, 그런 것 아니다. 괜찮다.”

유운은 따듯한 손길로 소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본가에서 가장 오래 사신 유 씨 할머니한테 들었는데요, 머리가 복잡할 때는 단것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대요.”

소화가 품에서 조그마한 상자를 꺼냈다.

물엿으로 졸인 말린 귤과 감으로 가득했다.

“이것은 네가 가장 아끼는 당과 아니더냐?”

너무 맛있어서, 차마 먹지 못하겠다며 고이 간직한 간식이었다.

오죽하면 먹지도 않고 군침만 흘리면서 행복해할까.

“공자님이 사주신 것이잖아요.”

“사준 이상 네 것이지.”

“그럼 제 것이니 제 마음대로 인심 써도 되죠?”

소화가 의기양양하게 두 팔을 허리에 올렸다.

“딱 한 입만 드세요. 히히.”

소화가 얼마나 큰마음을 먹었는지 알기에 더욱 기꺼웠다.

유운은 빙그레 웃으며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히잉. 너무 큰 거 아니에요?”

“하하하!”

“그래도 공자님이니까. 특별히 한 입 더 줄게요.”

“그래, 고맙구나.”

평소 단 것을 즐기지 않았건만.

그날만은 맛있고, 행복했다.

“히잉. 다 먹어버렸어요.”

다음 날.

소화가 울상을 지으며 상자를 뒤집었다.

“허어. 텅 비었구나.”

“그동안 잘 참았는데. 공자님 먹는 모습이 너무 맛있어 보여서 그만….”

하나만 먹는다는 게 그만 모두 다 먹어버렸다고 했다.

“다시 사면 되지 않겠느냐?”

“그, 그럴 필요는 없는데. 괜히 저 때문에.”

소화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몸을 뺐지만.

눈에 가득한 기대감을 못 볼 리 없다.

“녀석, 앞으로 먹고 싶으면 먹고 싶다고 해라.”

“헤헤헤. 어떻게 아셨지?”

“마침 내일이 장날이니. 발 빠른 상인은 이미 도착했을 것이다. 어서 채비하거라.”

“히히히! 기다려라, 당과야. 이 소화님이 간다!”

소화가 번개처럼 전낭과 짐을 챙겨서 나왔다.

그런데 마을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성큼성큼.

커다란 도를 찬 무인들이 저잣거리를 활보했다.

“뭘 봐? 콱!”

“눈깔아!”

다행히 말뿐, 실제로 폭행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마을 분위기는 전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사내들의 가슴팍에는 모두 불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흑산병단이로구나!’

소화가 불안한 표정을 짓자, 유운이 소화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소화가 다시 안심한 표정으로 환하게 웃었다.

웅성웅성.

하지만 사람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무인들의 눈치를 보았다.

‘비무일까지 한참 남았건만. 저들이 왜?’

누가 뭐래도 흑산병단이다.

비무대쯤이야 뚝딱하면 만들어내고도 남을 터.

하지만 유운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 저길 보세요, 공자님. 엄청 커요!”

소화가 깜짝 놀라며 마을 출구를 가리켰다.

사람 키보다도 높은 대형 비무대에, 수백 명을 수용하고도 남을 관중석까지.

비무대라기보다는 차라리 경기장이라 불러야 할 정도였다.

“흑산병단이 부유하다더니. 적 행수는 통이 큰 사내로구나.”

소화가 놀랄까 봐 겉으로는 부드럽게 웃었지만, 속으로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작정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일반적인 비무라면 작은 비무대와 천막 정도면 충분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비무대는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쿵쾅, 쿵쾅.

공사하는 인부에, 감독하는 상인에, 감시하는 무인까지.

마을 분위기는 소란스럽고 어딘가 불안했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유운은 주민들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아이쿠, 아닙니다. 공자님께서 무슨 잘못이 있으시다고.”

“그럼요, 평화로운 마을을 헤집은 저 녀석들의 잘못이지요.”

유운에게 손사래를 하는 이도 있었지만.

“…….”

차마 원망은 못 하지만, 답답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는 이들도 많았다.

유운은 그런 이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인사를 건네고, 사과했다.

소화는 그 모습에 속이 상했다.

“왜 공자님이 고개를 숙여야 하나요? 잘못하신 것 하나도 없는데.”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였다.

“허면 저들이 무슨 죄가 있겠느냐? 무림의 일에 휩쓸려서 생업에 방해를 받은 백성 아니더냐.”

“하지만 공자님 때문은 아니잖아요.”

“모두 나를 목표로 삼아서 한 짓이니. 어찌 내 죄가 없겠느냐?”

“흥. 그래도 나빠요. 공자님은 죄가 없어요.”

소화는 홱 돌아서서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치 저 사람들에게는 삐뚤어질 거라고 말하는 듯했다.

“게다가 서촌은 애초에 만서각을 위해서 만들어진 마을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만 볼 것이 아니다.”

어린 소녀인 만큼, 본가 사람들의 생각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경우가 많다.

유운이 소화를 달래고 설명했다.

“마을이 백리세가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백리세가가 마을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지.”

“…아!”

근래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한 말 아닌가?

“그래도 저는 공자님 힘들게 하는 사람은 다 미워요.”

“하하하. 내 얼굴을 봐서 봐주려무나.”

“흐흥. 봐서요.”

소화가 조금 풀린 얼굴로 다시 손을 잡았다.

그렇게 비무대 주변에 이르렀을 때였다.

“껄껄. 오늘은 대운이 찾아든다더니. 유운 공자님이 아니시오?”

“적 행수, 다시 뵙습니다.”

제 덩치만큼 커다란 두 개의 도를 쥔 중년 사내가 등장했다. 바로 적인걸이었다.

“그래, 비무 준비는 잘하고 계시오?”

“나름 성취가 있었습니다. 인연이 닿은 분들이 도움을 주신 덕분에.”

유운은 스승들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남방의 전사 거암와 고독랑 설영이라. 흐음. 훌륭한 무인들이지, 아암, 그렇고말고.”

반면 적인걸은 두 젊은이를 떠올렸는지 피식 웃었다.

떠오르는 샛별이라고는 하나, 아직은 20대의 후지기수.

그 둘과 붙어도 승리할 자신 있는데, 그들의 가르침을 받은 학사라니?

지려야 질 수가 없는 승부였다.

“그런데 무슨 공사를 이리 거창하게 하십니까?”

남부에서만 나는 대리석부터, 바닷가에서만 자란다는 소나무, 해송(海松)까지.

아무리 흑산병단이라도 적지 않은 부담이 될 터였다.

“귀한 분들이 오실 텐데, 어찌 흙바닥에서 맞이할 수 있겠소?”

적인걸이 비무대 한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어? 그런데 뭔가 구조가 이상한데요?”

소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비무대를 중심으로 일반 관중석과 귀빈석이 둥글게 자리했다.

상식적으로 원형으로 건축해야 함이 맞을 터.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정확히 반만 짓고 있었다.

“이 적모가 직접 제안하였으니, 비무대까지는 인심을 쓰도록 하겠소.”

“서, 설마. 그럼 나머지 반은요?”

“꼬마야. 아무리 비무의 형식이라 하나, 서로 겨루지 않느냐? 그러니 적이 아니겠느냐?”

적인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눈빛은 더없이 사나웠다.

“그, 그럼 나머지는 어떻게 해요? 우리 손님은요? 본가에서 올 분들은? 마을 사람들은요?”

“그걸 왜 나한테 묻느냐.”

적인걸이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설마 내 돈으로 너희 손님맞이까지 하려는 건 아니겠지?”

“치, 치사해! 왕 치사! 못됐어!”

소화가 눈물을 글썽이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 정도쯤이야 공자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부유하고 강대한 백리세가의 혈손 아니시더냐?”

소화에게 말하는 듯했지만, 사실은 유운에게 하는 말이었다.

‘내가 순진했구나. 무림의 싸움은 칼뿐이 아닌 것을.’

고대 병법가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 대부분의 전쟁은, 시작하기도 전에 보급으로 이미 승패가 결정 난다.

그런데 이번 비무는 어떤가?

쿵쾅쿵쾅…!

서쪽, 흑산병단의 팻말이 달린 지역.

화려한 좌석에 음식을 즐길 탁자에, 고급스러운 귀빈석까지 완비되었다.

반면 동쪽, 만서각 지역은 달랐다.

휘이이잉…!

텅 빈 허허벌판뿐.

마을 사람은 물론, 본가 손님까지 모두 서서 구경해야 할 판이었다.

이대로라면 가문의 명예에 먹칠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시일이 많이 남지 않았으니. 아무리 돈이 많으셔도, 서두르셔야 할 것이오.”

적인걸이 짐짓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운이 가진 것이라고는 만서각뿐.

돈 나올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몰래 책을 팔아치우기라도 한다면 모르겠지만 말이야.’

설마 학사인 유운이 그리 타락할까 싶지만, 사람 일이란 모르는 법.

적인걸은 은밀히 만서각을 감시하라 시켰다.

“무림의 흉험함을 이리 깨우쳐주시니. 적 행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허어?”

오히려 유운은 깊이 깨달은 표정이었다.

무림의 싸움은 칼끝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었다.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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