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인연이 이어지다 (11)
“흑산 놈들이 그리 염치없이 굴 줄이야. 미리 대비하지 못한 저의 불찰입니다, 공자님.”
“어찌 장 노야의 잘못이겠습니까? 사람 일은 어떻게든 풀리게 마련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유운은 빙그레 웃으며 장노를 위로했다.
“확인해보니 보통 큰 공사가 아닙니다. 게다가 놈들이 바람잡이를 고용해 마을마다 소문을 내고 다니니. 찾아올 손님이 얼마나 많을지…, 휴우.”
장노가 어두운 얼굴로 종이 위에 항목을 적어갔다.
적어도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관람석.
마을 입구에 놓일 안내판과 비무대의 깃발.
관객이 쉴 수 있는 휴게 공간 및 먹고 마실 식당.
비상시를 대비한 의약품.
우비에, 의복에, 각종 장구류까지.
“당장 생각나는 물자만 해도 이 정도입니다.”
“휴우. 만만치 않군요.”
“거기에 사람은 별도입니다.”
건설 인부, 요리사, 짐꾼, 안내인 등도 필요했다.
“만서각의 재정으로는 이들의 하루 품삯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급한 일부터 먼저 해결해야지요. 관중석부터 지어야 할 터인데.”
“휴우. 돈도 돈인데. 건설이란 게 보기보다 고된 일입니다. 장정이라도 단련된 자가 아니면 하루도 버티지 못합니다. 당장 어디서 인부를 구할지….”
두 사람이 한숨을 쉬며 고민할 때였다.
“우리 돈 없어요? 큰일인데. 그러면 안 되는데.”
소화가 시무룩한 얼굴로 물었다.
동그란 눈동자가 또르륵 굴러가더니 밝게 빛났다.
“제가 보탤게요.”
“으음? 무슨 말이냐?”
“아껴놓은 쌈짓돈이 있거든요.”
소화가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조그마한 주머니를 꺼냈다.
티잉!
그곳에는 손때 묻은 철전 수십 개가 들어있었다.
“이건 설마. 월봉을 아껴 모은 게냐?”
“으으. 당과도 안 사고 모은 돈이에요. 부디 잘 써주세요.”
소호가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내밀었다.
“녀석. 마음만 받으마.”
유운은 빙그레 웃으며 소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철전의 무게는 가벼우나, 그 안에 담긴 마음은 실로 무거우니.
덥힌 차를 마신 듯 뱃속이 따듯해졌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소화는요 힘이 엄청 세거든요.”
소화가 씩씩하게 말하며 팔을 걷어 올렸다.
“이익!”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힘을 주자, 조그마한 알통이 쏘옥 솟아 나왔다.
“하하하!”
“허허허!”
유운도 장노도 시름을 잊고 크게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다 방법이 있을 게다. 정 안되면….”
“공자님. 설마 그들에게.”
유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 챘을까.
장노의 눈가가 파들파들 떨렸다.
“공자님을 그리 괴롭히고 멸시하던 자들입니다. 겨우 이런 일에 그런 수모를….”
“서촌의 이름이 인근 마을에 다 퍼졌으니. 저 하나만의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못된 놈들에게….”
하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장노는 차마 말리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자존심이 무슨 대수겠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뒤에서 비웃은 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앞에서 모욕한 자에게 허리를 굽히고.
어쩌면 무릎까지 꿇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벌어진 일에는 책임을 질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각주님, 이거 섭섭합니다.”
“이런 중요한 일에 어찌 저희를 빼놓으셨습니까?”
쿠우웅…!
문 앞에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내려놓고 들어서는 사내들.
거암과 호각대원들이었다.
“허어. 한층 더 커졌구나!”
장노가 남방인의 몸을 보며 감탄했다.
타고난 골격이 큰데, 근육량조차 많아졌다.
그런 이들이 체계적으로 수련하니, 잘 닦인 흑요석 검을 보는 듯했다.
“힘쓰는 일이라면 저희를 불러주셔야지요.”
“어찌 무인에게 막노동을 부탁하겠습니까?
유운은 직업에 귀천이 없다 믿으나 사람들은 아니었다.
무인에게 돌을 짊어지고 건물을 지으라 한다면, 누구나 모욕이라 여길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수련이 지겨워서, 새로운 놀이가 필요하던 참이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요 예쁜 녀석들, 모두 각주님께서 키워주신 아이들 아닙니까?”
남방인들이 팔뚝을 드러내고 힘을 주니.
불끈!
팔뚝에 커다란 봉우리들이 솟아올랐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저희를 남으로 여기시지 않는다면 받아들여 주십시오.”
“계속 말씀하시면 대장이 삐질걸요? 하하하.”
호각대원들이 열성적으로 외치니, 유운 역시 도리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와아아아아!”
“새로운 놀잇거리로구나!”
“가자! 어서 아이들에게 맛을 보여주자꾸나!”
구릿빛 근육을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더니, 다 같이 환호하면서 떠났다.
“허허허. 모두 공자님의 복입니다.”
장노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어찌 저 혼자만의 복이겠습니까. 저도 빨리 가야겠습니다.”
유운은 시켜놓고 뒤로 빠지는 이가 아니었으니.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나도요, 나도! 같이 가요!”
- 나도 빼먹지 말게!
- 나도! 나도 보고 싶구나!
소화에 두 명의 스승까지 함께 성화였다.
“다 함께 가시지요. 아니 가자.”
유운은 빙그레 웃으며 공사장으로 향했다.
* * *
“우와. 구릿빛 피부와 근육 좀 보게.”
“저리 큰 석재(石材)를 단번에 들어 올리다니? 과연 남방인일세.”
“심지어 지치지도 않으니. 타고난 장사들이로구만.”
호각대원은 고작 십여 명.
하지만 일꾼 삼사십 명보다 더 많은 일을 해냈다.
그중 마을 사람의 눈길을 가장 많이 끈 이는 따로 있었다.
“허어. 귀한 신분의 공자께서 직접!”
“겉보기엔 호리호리하신데, 남방인 두 몫을 넘게 하시는걸?”
“어머. 얼굴은 저리 고우신데, 어쩜 저리 사내다우실까.”
자기 몸통만 한 석재를 번쩍 들어 올려 양어깨에 올리니.
사내들은 부러움에 눈을 반짝였고, 여인들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유운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휴우. 힘으로만 될 일이 아니구나.’
건축에도 일가견이 있으니, 오히려 문제점이 눈에 보였다.
뒷자리에서도 비무를 볼 수 있도록 관람석을 비스듬히 쌓아 올려야 하니, 생각보다 어려운 공사였다.
더 큰 문제는 석재였다.
건축용 석재가 다 떨어졌으니, 남은 건 돌덩이들뿐이었다.
콰아아앙!
거암이 화강암을 내려치자, 돌이 반으로 쪼개졌다.
“우와아아아!”
“역시 대장!”
남방인들은 환호했지만, 유운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저래서는 자재로 쓸 수가 없겠어.’
돌을 결을 따라 반듯하게 자르고, 거친 면이 없도록 다듬고, 서로 맞물릴 수 있도록 홈까지 새겨야 하니.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로구나.’
무게 배분과 균형 감각, 전체 구조를 그리는 능력까지.
책으로는 가르칠 수 없는 현장 경험이 필수였다.
그때였다.
“허어. 돌을 그리 험하게 다루어서야 쓰나. 쯧쯧. 아이가 상했잖은가.”
키 작은 노인, 박 씨가 거암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어, 돌멩이 할아버지다!”
“요 녀석, 돌멩이라니! 에끼!”
소화가 손으로 가리키자, 노인이 짐짓 화난 척을 했다.
하지만 눈가는 풀려있는 것이, 귀여운 손녀를 보는 듯했다.
“히히히. 돌멩이 할아버지 맞잖아요. 맨날 돌 자랑만 하고.”
“그거야 눈먼 자들이 알아보지 못하니까 그러지.”
“그런데 진짜 석공(石工) 맞아요? 아저씨들은 허풍이라고 하던데.”
“고얀 녀석들. 에잉. 우물 속에서만 사니 큰 세상을 모르지.”
박 씨 노인은 술만 취하면 옛날 일을 자랑했다.
“내가 젊었을 때는 말이야, 이 서촌보다도 큰 성을 지었지. 직접 보면 뒤집어질 거다, 껄껄껄.”
향급 장원만 지어도 숙련된 장인이라 불린다.
그런데 현급 성을 지었다니? 사실이라면 큰 도시에서 명인으로 대접받으며 살 터였다.
“술 취하면 무슨 소린들 못하겠어.”
“젊었을 때는 우리 모두 천하를 주름잡았지, 껄껄.”
서촌 같은 시골에서는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래도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호기심 많은 소화와 인내심 많은 유운이었다.
“내 이야기 값으로 조언을 좀 하지. 돌은 말일세, 살아있는 꽃과 같다네.”
“꽃 말씀이십니까?”
딱딱한 돌과 가장 거리가 먼 이름 아니던가?
유운이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자, 본격적으로 옆에 자리를 폈다.
“그렇지. 꽃마다 향기가 다르듯, 돌마다 풍기는 냄새도, 굳기도 다 다르다네. 요 녀석들을 어떻게 다루냐면 말이야….”
“어떻게 다뤄요? 궁금해요, 궁금해요!”
소화가 눈을 반짝이자, 박 씨 노인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흐흐. 요 귀여운 녀석. 말로만 해서는 아쉬우니, 내 직접 보여주마.”
휘릭.
박 씨 노인이 팔을 걷고 정과 망치를 잡았다.
나이답지 않게 탄탄하고, 체구보다 커다란 이두근이 모습을 드러냈다.
뚝딱뚝딱.
후드드득!
어린아이가 찰흙을 만지듯 몇 번 주물럭거렸을 뿐인데.
순식간에 잘 다듬어진 석재 기둥이 완성되었다.
“…오오오!”
“달라, 대장이 만든 것과는 비교도 안 돼!”
“이 돌이 저리 깔끔하게 잘릴 수 있는 거였어?”
균형이 잘 맞음은 물론, 중간 중간 화려한 꽃무늬까지 조각되어 있었다.
“우와아아! 대단해요!”
“어흠! 내가 돌 좀 만지지.”
소화까지 감탄사를 터트리자, 박 씨 노인이 흐뭇하게 웃었다.
“이건 겨우 기둥에 불과하단다. 각 층마다 몸돌과 지붕돌이 있는데….”
박 씨 노인이 손을 대자, 이번에는 평평하고 널찍한 돌이 태어났다.
“우와아아!”
“어흠!”
“우와아아!”
“어흠!”
소화가 한번 탄성을 지를 때마다, 멋진 석재가 태어났다.
하지만 나이는 속일 수 없는 것일까.
“아이구, 삭신이야. 이십 년 전만 해도 밤을 새워도 끄떡없었건만.”
“아버지, 몸도 편찮으시면서. 제가 할게요.”
어느새 박 씨의 아들이 나타나서 도왔다.
두 사람의 석공이 나서자, 석재도, 건축도 놀랍도록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빠, 저도 할아버지를 도울래요!”
열 살 남짓한 소년까지 나섰다.
“너도 돕고 싶으냐?”
“네. 설마 어리다고 빠지라는 말씀은….”
“아니다. 너에게 맞는 일이 있다.”
유운은 빙그레 웃으면서 소화를 가리켰다.
임시로 마련한 천막.
소화가 어른들을 위해 탁자를 정리하고, 음식을 차리고 있었다.
“넌 누구니?”
“너부터 말해.”
“난 소화.”
“난 박석호야.”
“돌 호랑이? 이름 한번 이상하네.”
“그러는 너는? 작은 꽃? 후후. 이름처럼 정말 작네.”
“이익! 야아!”
서로 티격태격하는 것도 잠시였다.
무언가 쿵쾅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바로 마주 보고 웃었다.
“히히히. 네 얼굴에 밥풀 묻었다.”
“킥킥킥. 너도. 고양이 수염 같아.”
“넌 똥 같은데?”
“그럼 넌 오줌!”
“히히히!”
서로 마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고작 밥풀이거늘, 저리 할 말이 많을까.’
어른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
하지만 유운은 어쩐지 흐뭇했다.
“허어. 박 씨에게 선수를 빼앗겼구먼.”
“그러게요. 저희도 서두를 걸 그랬어요, 아버님.”
왕 영감과 그의 아들 내외였다.
“뭐, 굳이 그렇게 서두를 필요까지는….”
중년 사내가 어물쩍 넘어가려던 때였다.
“네 이놈, 은공께 무슨 말버릇이냐!”
왕 영감이 비무대가 떠나가라 호통을 쳤다.
“온 가족이 살 터전을 되찾아주셨거늘. 평생 종으로 살며 은혜를 갚아도 모자랄 판에!”
“뭐 고맙죠, 어찌 모르겠어요.”
“네 놈이 사람이라면 어서 정신을 차려야지!”
“도박 같은 거 다시는 안 할 거예요. 말씀드렸잖아요.”
“손목 자른다고 해도 그 짓을 벌인 놈이. 에잉. 내가 애미를 볼 낯이 없구나.”
왕 영감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하자, 며느리가 부드럽게 웃었다.
“아니에요, 아버님.”
“그러니 다음은 없다, 이놈아.”
왕 영감이 아들을 노려보았다.
“다시 도박에 손을 댔다는 소리가 들리면, 내 너를 안고 강물에 뛰어들 것이다.”
서슬 시퍼런 말에 아들이 움찔거렸다.
“휴. 손자들만 아니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렀을 것을. 능력도 없는 놈이 밝히기만 밝히니.”
“아, 아버지. 사람들 앞에서.”
왕 영감의 말에 아들이 얼굴을 붉힌다.
부부간의 금실은 나쁘지 않아 애는 줄줄이 낳았으니.
벌써 아이만 다섯이었다.
짜아악!
“낳았으면 책임을 져야지, 이 웬수야!”
중년 아낙네가 사내의 등짝을 후려쳤다.
“으윽, 좀 살살!”
“당신은 그냥 입 다물고 있어요!”
왕 영감과 며느리가 유운에게 다가왔다.
“천과 옷감이 부족하다 들었습니다, 공자님.”
“그건 어찌 아시고?”
비를 피할 천막, 소속을 알릴 깃발, 세가의 휘장에 의복까지.
베 한 필조차 아쉬운 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