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30화 (30/114)

제30화

인연이 이어지다 (12)

“다행히 집에 남는 옷감이 있어 가져왔습니다.”

왕 영감이 눈짓하자 아들 내외가 짊어지고 있던 행랑을 풀었다.

쿠웅.

묵직한 소리가 나서 쇠붙이인가 했더니.

상자 안은 꼭꼭 눌러 담은 옷감으로 가득했다.

“이것은 베가 아닙니까?”

유운은 깜짝 놀라서 말했다.

적어도 수십여 필에 이르는 양이었다.

“바람이 솔솔 들어와 시원하고, 물에 젖어도 빨리 빠르니. 여름철 옷감으로 이만한 것이 없습니다.”

왕 영감이 자랑스럽게 펼쳐 보였다.

“모두 상등품은 족히 넘는 물건이로군요!”

대마 껍질을 손수 벗겨내고, 베틀로 짜야 하니 손품이 많이 든다.

그런데 가로로 뻗은 ‘날줄’과 세로로 뻗은 ‘씨줄’의 간격이 촘촘하면서도 일정하니.

베를 짠 이가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무명에 명주까지?”

무명은 목화에서, 명주는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직조하니, 보통 귀한 옷감이 아니었다.

왕 영감이 뿌듯한 눈으로 어깨를 폈다.

“왕 대인의 마음은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유운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부족해서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과해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옷 없이 살 수는 없으니, 옷감은 항상 가치가 높다.

시골에서는 철전 대신 옷감을 화폐로 쓸 정도.

게다가 왕 영감네 형편이야 뻔히 안다.

그러니 남는 옷감일 리가 있겠는가?

“휴우. 사실 장원을 되찾으려고 여기저기 과거의 인연에 손을 벌렸습니다.”

“짧은 시간에 이 정도나? 왕 대인께 덕이 있으셨나 봅니다.”

“은공만 하겠습니까. 덕분에 장원을 되찾았으니, 이 모든 것은 마땅히 공자님의 것입니다.”

“너무 과하니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공자님을 위해 준비한 것인데, 거절하신다니. 어쩔 수 없군요.”

타악.

왕 영감이 품에서 화섭자를 꺼내더니 불을 붙였다.

“무, 무슨?”

“주인이 거절하니 어찌하겠습니까? 모조리 태워 없애는 수밖에요.”

“…휴우.”

유운도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왕 대인.”

“하하하. 옷감뿐만이 아닙니다. 이리 와 보시지요.”

왕 영감이 둘둘 말린 무명 꾸러미를 펼쳤다.

펄럭!

하얀 깃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리(百里).

가문의 상징이자, 유운의 성이 수놓아져 있었다.

“이, 이것은?”

“어떻습니까? 마음에 드십니까?”

“…실로 훌륭합니다.”

유운은 진정으로 감탄했다.

“허허허. 빈말이라도 듣기 좋습니다.”

“빈말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왕 영감이 능글맞게 물었다.

“직물의 결이 고울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이 글씨!”

유운은 검은 실로 수 놓인 글씨를 손으로 매만졌다.

“글씨의 획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니. 마치 용이 살아서 하늘로 오르는 듯 힘이 넘칩니다.”

“오오…, 그 정도입니까?”

유운의 말에 왕씨 일가 모두가 환하게 웃었다.

“혹시 어디서 명인이라도 부르셨습니까?”

궁금한 마음에 묻자, 왕 영감은 다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천도 글씨도 모두 며늘아기의 솜씨입니다.”

“……!”

유운이 놀라 바라보자, 왕 씨의 며느리가 부끄럽다는 듯 말했다.

“어깨너머로 배운 솜씨입니다. 은공의 눈을 어지럽히지 않았다니 다행입니다.”

“태생이 학사라 글씨는 많이 보았습니다. 단언컨대 본가의 학사나 장인도 이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유운의 칭찬에 모두가 기분 좋게 웃을 때였다.

“아얏!”

조그마한 비명에 고개를 돌리니, 소화가 손가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히잉. 보기보다 어렵네.”

소화가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바늘과 실을 들고 울상을 짓고 있었다.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헤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재미 삼아 만들고 있었어요.”

“그것은 검의 수실이 아니냐?”

검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는 일종의 장식물이었다.

“다들 멋들어진 표식을 달고 있는데. 공자님께서는 아직 없잖아요.”

“……!”

실뭉치와 천을 엮어서 그 위에 이름을 새기려 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하는 거더라? 다들 이렇게 하던데.”

다시 바늘귀에 실을 꿰어 넣고 바느질하려 했다.

하지만 소화는 어린 나이에 만서각으로 옮겼으니, 바느질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아얏!”

조그마한 손가락에 금세 핏방울이 맺혔다.

“내, 내가 도와줄게, 소화야!”

“내가 하마, 이리 다오.”

박석호와 유운이 동시에 달려들 때였다.

“이리 주렴.”

왕 영감의 며느리가 냉큼 다가가서 실뭉치를 뺏어 들었다.

“그렇게 잡으면 예쁜 손가락 다친단다. 나도 이런 예쁜 딸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 계속 아들만 낳아서….”

“험험. 그게 뜻대로 되나.”

며느리가 잠시 원망의 눈길로 바라보자, 남편이 헛기침을 했다.

“자, 먼저 바늘은 오른손 엄지와 집게로 잡는 거야. 그다음, 실은 왼손 검지에 걸고…”

며느리는 설명하면서도 재빠르게 손을 놀렸다.

휙휙휙.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획이 생겨나니. 지켜보는 이들이 모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우와! 손가락이 안 보여요!”

“속도보다 중요한 건 안 다치는 거야. 이렇게 하면 돼. 알겠지?”

“네, 아주머니.”

휙휙휙.

짧은 대화가 끝나니 어느새 조그마한 표식이 완성되었다.

유운(流雲).

멋들어진 검은 글자 뒤로 하얀 구름까지 수 놓여졌다.

“정말 대단한 솜씨입니다!”

유운은 다시 한번 감탄했다.

단순히 속도와 정확도뿐이 아니었다.

여인의 수놓기에는 절묘한 균형, 아니 예술적인 아름다움까지 엿보였다.

“직물에도, 수에도 도가 있으니. 오늘 제 눈이 뜨인 기분입니다.”

“과한 칭찬이세요, 은공.”

“하하하, 우리 경매가 이 정도입니다. 제 부인이 이리 뛰어난 여인이지요.”

진심 어린 칭찬에 왕 씨 며느리보다 사내가 더 기뻐했다.

“공자님 검에 달면 진짜 멋있을 것 같아요!”

소화는 벌써부터 신이 났는지, 바로 만서각으로 뛰어갔다.

“으하하! 더 보시지요. 우리 경매가 워낙 솜씨가 좋아서…. 어이쿠!”

중년 사내가 신이 나서 옷감 상자를 옮기던 때였다.

우당탕.

옷감 상자에 발이 걸려서 넘어지고 말았다.

“또 제풀에 넘어졌어요? 이이는 낮에는 도통 쓸모가 없다니까.”

여인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사내의 얼굴에 오히려 화색이 돌았다.

“반대로 말하면 밤에는 쓸모가 있다는 말이지? 하하하. 경매의 진심은 그거였어. 제가 이 정도입니다, 여러분!”

사내가 외치자 여인의 얼굴이 빨개졌다.

짜악!

“아아악!”

“으이구 화상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니. 흰소리 하지 말고 짐이나 옮겨요.”

“하하하, 알겠소, 경매. 내 열심히 일하리다!”

사내는 싱글벙글 웃으며 상자를 들어 올렸다.

왕씨 가문의 도움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여기에 그렇게 옷감이 많다면서요?”

“손도 심심한데 잘되었네.”

왕 영감의 며느리를 따라 여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농사일로 바쁘실 텐데 어찌.”

“이게 뭐 대수라고요.”

“그럼요, 저녁에 남는 시간 많은데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며 손을 댔지만, 결과물은 그렇지 않았다.

깃발에는 멋들어진 글자가, 깃발과 휘장에는 아름다운 구름이, 천막과 의복에는 쓰임에 맞는 표식이 새겨졌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 화려하게 탈바꿈했다.

“등잔 밑이 어두웠습니다. 서촌 여인들의 솜씨가 이리 훌륭할 줄이야.”

장노가 감탄하자, 유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아비와 자식을 입히고, 보살핀 이들입니다. 그 세월이 어디 가겠습니까?”

하나같이 장인 못지않은 실력이었다.

아내들이 나서니 사내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어이, 정 씨! 나무를 그리 자르면 안 되지. 이리 줘보게.”

스으윽. 쿵!

나무꾼과 목수가 합류했고.

“얘야, 점심부터 배가 아프다고 했지? 여기 방아풀을 달인 물을 먹어보렴. 배앓이에 그렇게 좋단다.”

경험 많은 할머니가 아픈 이들을 보살폈으며.

“논에 물도 대야하고, 바쁜 시기 아닙니까? 품삯이라도….”

“농사일을 뭐 하루 종일 합니까? 껄껄.”

“그래도….”

“공자님 혼자의 일이 아니라, 서촌의 일입니다. 어찌 혼자 감당하려 하십니까?”

“……!”

농부들까지 빙그레 웃으며 나서니.

어느새 서촌 전부가 달라붙어 있었다.

“허허허. 살아생전에 이런 모습을 보다니.”

장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만 붉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기가 그렇게 유망한 땅이라면서?”

“호오. 마을 앞으로 강이 흐르고, 땅도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구만.”

“뿐만 아니지. 사방으로 커다란 현성 세 곳과 접하고 있으니 위치도 딱 좋구만.”

부유한 차림새의 상인들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돈이 흐르는 길과 물자가 흐르는 길이 만나니. 괜히 흑산에서 눈독 들이는 게 아니었어.”

“왜 이곳을 이때까지 몰랐지?”

“이름에 가려진 게지, 이름에. 서촌 말고 금촌이라고 불렀으면 진작에 향, 아니 현이 되고도 남았지.”

말하면서 지도를 확인하고, 마차와 수레의 짐을 푸는데, 물자가 산더미처럼 많았다.

“장날도 아니거늘. 대체?”

“설마…?”

장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반면 유운은 짚이는 바가 있었다.

“무엇보다 금 씨가 이름을 걸고 추천한 곳 아닌가.”

“아무렴. 상인이 신용을 걸었으면 전 재산을 건 것과 같지.”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자님.”

여유 있는 걸음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중년 사내.

바로 만보지류의 상인, 금만보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공자님의 가르침을 받고, 눈이 뜨이니. 덕분에 새로운 일에 도전하였습니다.”

“어떤…?”

“공자께서 사람이 전부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한평생 해온 일이 이것인지라, 아는 사람이라고는 상인뿐이더군요.”

“그 말씀은….”

“저는 상인들을 위한 상인이 되기로 했습니다.”

“…상단!”

유운의 말에 금만보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인들을 모아서 같이 고생하고, 같이 커나가던 차. 공자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희에게는 아직 드릴만 한 것이 없습니다.”

“왜 없겠습니까? 땅이 있고, 공자님이 있지 않습니까?”

“……!”

금만보는 서촌의 발전, 정확하게는 유운에게 자신의 미래를 건 것이다.

“물자가 부족하다 들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저희 상단의 상인들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노가 다가가서 가격을 묻더니, 얼떨떨한 얼굴로 돌아왔다.

“값이 터무니없이 싸고… 어떤 것은 마중물이라며 아예 공짜로 주는 상인도 있습니다, 공자님.”

“어찌 상인이 손해 보는 장사를 하신단 말입니까?

유운이 묻자, 금만보가 공손히 대답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공자 덕분에 삶이 바뀌고 있으니. 얼마나 큰 인연이겠습니까.”

“하나….”

“손해는 짧게, 이익은 길게.”

“……!”

“앞으로 서촌과 함께 큰 이익을 볼 터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자님.”

빙그레 웃는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서촌과 함께라.”

‘상인과 함께’ 성장하고, ‘마을과 함께’ 이익을 본다.

작은 이익을 탐하던 상인이 어느새 큰 인물이 되었으니.

유운은 그와의 인연이 가볍지 않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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