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31화 (31/114)

제31화

인연이 이어지다 (13)

“유운 공자께서 큰 곤경에 처해있다고 합니다. 저희를 보면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그렇겠지요. 행사 규모가 커진 만큼 막대한 물자가 필요한데. 학사가 그만한 돈을 마련하기는 불가능하니까요.”

호위 동평의 말을 서문요란이 받았다.

“이랴!”

두 사람의 뒤.

수십 여대의 마차가 언덕을 올랐다.

마차 위에 당당히 깃발이 휘날렸다.

서문(西門).

물자뿐 아니었다. 마차마다 서문세가의 상인과 장인이 가득 들어찼으니.

서문요란이 작정하고 데려온 보급 상단이었다.

“이 언덕만 넘으면 바로 서촌입니다.”

두 사람이 언덕 위에 올라섰을 때였다.

“동 호위, 잠시만 행렬을 멈추세요.”

갑작스러운 지시였지만, 동평은 곧바로 따랐다.

“전원 정지!”

“정지!”

“정지!”

상단 전체가 멈추어 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소가주님?”

“선객이 있군요.”

“흐음! 설마 유운 공자가 부른 이들일까요?”

서촌은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니, 오가는 상인들은 금방 눈에 띄었다.

“아니. 불렀다기에는 이상하군요. 저건 마치 자원해서 돕는 모양새예요.”

“상인이 스스로 돕다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자세히 살펴보세요. 만서각 사람들이 궁하거나 다급해 보이나요?”

서문요란의 말에 동평이 내공을 돋우어 살폈다.

“막가철방에서 가져온 철입니다.”

“호오. 가볍고 튼튼하니, 귀빈석의 뼈대로 삼기에 이만한 물건이 없겠군요.”

“이건 북방에서 가져온 가죽인데, 얇으니 다듬어서 우산이나 우비로 만들면 좋을 겁니다.”

“이걸 그냥 주신다고요?”

“이번 달까지만입니다. 다음에는 당연히 돈을 받을 예정입니다, 허허허.”

상인과 석공이 마주 보고 웃으며, 함께 물건을 옮겼다.

“확실히 상행위로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이미 서문이 이곳에 왔거늘.”

“서문이라….”

“유운 공자 역시 저들보다 우리를 더욱 반길 것입니다.”

“그럴까요? 지금 서문이 끼어드는 것이, 본가에 그리고 유운 공자에게 이득이 될까요?

서문요란의 말에 동평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골 상단치고는 물건의 질이 상당히 훌륭합니다만. 어찌 서문세가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서문의 마차에는 값비싼 재료들, 천하에 이름 높은 장인들이 그득하니.

서문이 움직이면, 저들보다 훨씬 더 화려한 작품이 나올 터였다.

“물건 말고 사람의 얼굴을 보세요.”

“……!”

자세히 볼수록 동평의 눈이 커졌다.

“이건 말이다, 비무일에 팔려고 새로 만든 딸기 당과인데. 너희들이 한번 먹어보지 않을래?”

“우와아아! 진짜요?”

“엄청 맛있다! 소화가 알면 난리 나겠네, 하하.”

뱃살 두둑한 상인과 아이들이 어울리고.

“이렇게 모두 함께 일을 해본 게 얼마 만인가?”

“은근히 재밌어. 마치 모두가 함께 살 집을 짓는 기분이야.”

“이거 비무 끝나고 나서는 다 같이 쓰면 좋겠는걸?”

마을 사람들이 서로 어깨를 두들기고, 하나 되어 움직였다.

일이 힘듦에도 모두가 환한 얼굴이니.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하던 광경이었다.

“허어. 어떻게 이런 일이? 유운 공자가 저들의 마음을 얻었군요.”

동평은 뒤늦게 감탄했다.

“동 호위, 혹시 분재를 키워보신 적 있나요?”

“없습니다.”

“생명이란 참으로 신비하답니다. 조그마한 화분에 나무 묘목을 심고, 물과 거름을 주면, 스스로 자라나지요.”

“……!”

“그런데 물을 더 많이 붓고 거름을 잔뜩 주면, 어찌 되는지 아세요?”

“어찌 됩니까?”

“오히려 시들어 죽는답니다.”

“……!”

그제야 동평은 깨달을 수 있었다.

“때로는 그저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요. 마침 볕도 좋으니. 그저 구경하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서문요란의 지시에 따라 상단이 발길을 돌렸다.

‘허어. 앉은 자리에서 미래를 보시니. 과연 소가주님이로구나!

동평은 속으로 감탄했다.

당장은 손해지만, 결국은 큰 이득으로 돌아오리니.

지금은 돌아가지만, 인연은 이어질 터였다.

* * *

- 살아생전에 이런 광경을 본 적 있느냐?

- …없지. 없어.

매화검선의 말에 종남일패가 힘들게 대답했다.

백성은 언제나 보호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명령을 받드는 존재였다.

정파의 협객조차 그리 생각했다.

그런데 이곳, 서촌만은 달랐다.

“어쩜 이리 고울까. 역시 왕 씨네가 짠 베가 최고야.”

“그것만 최고야? 아들을 줄줄이 낳는데.”

“깔깔깔. 우리한테도 비법 좀 가르쳐줘.”

“아이참. 무슨 소리세요. 힘들기만 한걸요.”

아낙네들이 모여서 함께 베를 짠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이 아님에도, 활기가 넘쳤다.

펄럭, 펄럭!

곳곳에 백리를 수놓은 깃발이 나부꼈다.

비록 값비싼 베는 아니었으나, 정성이 가득하니 보기가 좋았다.

“손 씨네도 꽤 하는데?”

“모두 언니의 가르침 덕분이죠.”

“어이구. 벌써 이만큼 만들었어? 남아돌겠네.”

“남으면 뭐 우리 애들 입히면 되겠네요.”

“호호호. 이러다 우리 마을의 특산품이 옷감이 되는 거 아니야?”

기익. 털그럭.

기익. 털그럭.

여인들은 수다를 떨면서도 쉴 새 없이 손을 놀려 베를 짰다.

씨줄과 날줄이 만나서 옷감이 되고, 그 옷감은 튼튼한 천막이 되고, 깔끔한 옷이 되고, 멋들어진 휘장이 되었다.

- 이야기책에서나 나오는 광경인 줄 알았거늘.

종남일패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영약 한 알을 위해 사형제들끼리 싸우고, 주루 하나의 이권을 차지하겠다고 칼부림이 나는 게 무림이다.

비정한 강호를 살아온 그에게는 너무나 낯선 광경이었다.

-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바름(正)이고 협(俠)이지, 껄껄껄.

매화검선이 뿌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바로 내 제자, 유운이 해낸 일일세. 껄껄껄.

- 크크크. 내 제자이기도 하지.

종남일패가 씨익 웃으며 끼어들었다.

- 어허! 어딜 숟가락을 얹으려고! 자네는 임시 사부 아닌가? 이번 일만 끝나면 손 떼야지.

- 사람이 물건인가? 손 떼면 끝나게. 한번 제자는 영원한 제자지!

- 어허, 이놈이?

- 이놈이라니? 말 다 했는가!

- 커흠. 그건 내 실수…. 아무튼 안되네, 안 돼!

- 안되긴, 크크크.

말다툼을 하면서도 두 사람 모두 눈을 거두지 않았다.

- 실로 보기 좋구먼.

- 그래. 이런 곳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싸웠던 게지.

두 사람은 마을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 * *

“비록 제가 상인은 아니나. 이번 투자는 정말 잘하신 결정 같습니다.”

동평이 서문요란에게 말했다.

천하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이렇게 마음이 하나 된 곳은 처음 보았다.

“동 호위가 보아도 그렇죠?”

“…그런데 꼭 보셔야겠습니까?”

동평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보통 언덕 위에서 멋있게 사라지면, 그것으로 끝이 아닌가?

- 거액을 투자한 재산목록 1호잖아요.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요!

서문요란은 그렇게 말하며 몰래 돌아왔다.

‘마음은 알겠는데…. 굳이?’

서촌에는 이미 서문의 눈과 귀가 넘치도록 많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보고서가 쌓일 터인데?

하지만 당장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제 변장술이 이리 뛰어날 줄이야. 정말 감쪽같지 않나요?”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며 뿌듯해했다.

“정말 감…. 쪽 같습니다.”

동평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로 변장한다면서 세 줄기 염소수염에, 흉터에, 영웅건까지 둘렀지만.

고운 얼굴과 몸매의 선부터 다르니.

누가 봐도 천생 여자였다.

“…완벽합니다, 모두 깜빡 속을 겁니다.”

“후후후. 그렇죠? 절대 모를 거예요.”

‘완벽한 소가주님에게 이런 약점이 있을 줄이야.’

동평은 취미로 작성하고 있던 ‘서문요란 연대기’를 떠올렸다.

그동안 ‘냉정, 침착, 야망’을 중심으로 적어왔는데.

오늘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었다.

- 변장에는 소질이 없으시다. 의외로, 눈치도 없으신 듯하다….

오죽하면 유운조차 눈치챘겠는가?

두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모르는 척해주십시오.’

‘모르는 척하겠습니다.’

두 남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서문 소저에게 저런 취미가 있을 줄이야?’

유운은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남장 여인.

남자 주인공 곁에 있으면서도 여인임을 끝까지 숨기니.

주인공은 남자에 끌리는 마음을 억지로 부정하며 고뇌한다.

협객전에 종종 나오는 상황 아닌가?

‘하나 이야기와 현실은 다르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하얀 피부, 고운 몸매.

여인임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다만 품이 넓은 옷과 길게 늘어진 모자가 미모를 가려주니.

호위가 잘만 가린다면 눈에 띄지는 않을 터였다.

‘이리 보니 서문 소저가 달리 보이는구나.’

차가운 표정으로 관찰하는 눈빛을 보냈던 첫 만남보다.

화려하고 압도적인 미모를 자랑했던 두 번째 만남보다.

어설프게 남장을 한 지금이, 오히려 더욱 그녀답게 보였다.

깜빡, 깜빡.

하지만 잠시라도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면, 동평이 열심히 눈으로 신호를 보내니.

유운은 애써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마음껏 드십시오.”

공사를 마무리한 날.

서촌 유일의 주루에 모두가 모였으니.

유운이 얼마 안 남은 예산을 모두 털어 술과 요리를 샀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잘 먹겠습니다!”

“어이쿠. 뱃속에서 식충들이 난리를 치네.”

“후후후. 오늘만은 먹을 자격이 있지. 당당하게 먹어보세나.”

“여기 주인장 솜씨가 끝내줘!”

유운이 특별히 신경 써달라 부탁한 덕분인지, 탁자마다 음식이 가득했다.

사람들이 흥겹게 젓가락과 술잔을 들 때였다.

“자자자, 주목하세요!”

탁탁탁.

조그마한 인영이 숟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긴 후, 탁자 위에 섰다.

“다 같이 의논해야 할 일이 있어요!”

회의를 이끄는 자는 상인도, 촌장도, 호위대장도 아닌, 소화였다.

귀여운 여자아이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여니, 모두가 흐뭇하게 웃으며 귀를 기울였다.

“그게 무엇이오, 꼬마 소저?”

왕 영감이 짐짓 정중하게 손을 모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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