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인연이 이어지다 (14)
“저들이 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셨나요?”
“…흑산 놈들 말인가?”
“그래요. 그들이 옆구리에 무얼 달고 있나요?”
“무슨 호패 같은 거였는데.
“아니야. 무슨 글자가 새겨진 매듭이었는데.”
“맞아. 그랬어.”
마을 사람 대부분이 까막눈이라 정확하게는 몰랐다.
“문파나 세가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징표’인데요. 보통 그 무리를 상징하는 문구를 적어넣어요.”
“오, 꼬마 아가씨가 엄청 똑똑하구만!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소화는 아저씨의 칭찬에 어깨를 으쓱하고 말을 이었다.
“그들이 우리를 보는 시선, 어땠는지 기억하시죠?”
“나다마다. 그놈들을 생각하면 복장이 터질 지경이지.”
“젠장, 결국 그 못된 놈들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닌가!”
규모로 만서각과 서촌을 압도하려 했는데, 결과적으로 실패하였으니.
틈만 나면 아니꼬운 눈으로 보며 시비를 걸기 일쑤였다.
“그 못된 놈들조차 징표를 달고 마음을 하나로 모았어요.”
“……!”
“그러니 우리도 무언가 있어야겠다, 그런 생각 안 들어요?”
“옳거니, 꼬마 아가씨가 말 한번 잘하는구나!”
“옳소! 우리 마을도 다 같이 멋있는 거 달아보자구!”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르니, 징표를 만드는 것에 모두가 찬성을 표했다.
문제는 그 문구였다.
“놈들은 뭐라고 하고 다닙니까?”
“병단의 상인들은 허리띠에 ‘흑산제패’를, 조씨세가의 무인들은 검에 ‘조가천하’라는 문구를 달고 다닙니다.”
마을 사람의 질문에 유운이 대답했다.
“허허. 제패니, 천하니. 역시 그놈들답구만.”
“그래. 그릇은 간장 종지만 한 놈들이 욕심만 그득하니.”
“쯧쯧쯧. 천하는 무슨. 우물 안에서만 살다 죽어라, 퉤!”
모두가 함께 흑산병단과 조씨세가를 욕했다.
“징표라. 우리 마을 이름은 어때?”
“서촌? 너무 평범하잖아.”
“그럼 만서는 어때? 만서각이랑 유운 공자님이랑 같이 떠오르잖아.”
“나쁘지는 않은데.”
“웅풍백리는 어떤가?”
“웅장한 바람이 백리에 이른다…. 아니면 백리세가가 그런 바람을 일으킨다? 좋은데요?”
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호각대원, 거암까지 참여하여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떤 결론이 나올지 궁금하군요, 소가주님.”
“나도 그래요, 동 호위.”
쨍.
주루의 가장 구석진 곳.
두 사람은 취객인 척 잔을 부딪쳤다.
서문요란은 술인 척 맹물을, 동평은 물인 척 화주를 마셨다.
하지만 애초에 이방인은 눈에 띄기 마련.
모두 모른척하라는 유운의 부탁 덕분이었다.
‘유운 공자,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요?’
서문요란은 눈을 빛내며 유운을 관찰했다.
서촌의 주민은 평범한 농부와 아낙이 대부분이고, 호각대는 외모부터 이질적인 남방의 이민족.
장노와 소화는 백리세가의 종복이며, 유운은 귀한 명문의 혈손이다.
스승과 제자도 아니고, 혈족도 아니며, 몇몇을 빼면 주종관계도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애매한 관계군요.”
“맞아요. 집단의 정체성이 모호하지요.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중요한 순간이에요.”
주인과 종의 관계임을 명확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대가를 주고받는 계약관계?
그도 아니면 가르침을 주고 이끄는 스승이 될 것인가?
벌컥벌컥.
서문요란은 목이 탔는지 계속 물을 들이켰다.
“바름을 숭상하라는 ‘숭정백리’ 어떤가? 아무리 그래도 서촌 역시 백리세가의 땅이니 말이야.”
“그럴 바에야 웅장하고 거센 바람을 뜻하는 ‘웅풍백리’가 더 낫지. 더 멋있지 않은가?”
논의 끝에, 두 단어가 최종 결선에 올라왔다.
하지만 누구도 끝까지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모두가 이 자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자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조금씩 말수가 줄어들 때쯤, 장노가 물었다.
“맞습니다, 공자님이 결정해주셔야죠.”
“공자님, 어서 말씀해주십시오.”
모두 유운의 입을 바라보았다.
유운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불가에는 이런 단어가 있습니다. 인연.”
“인연이라…”
“흔히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를 뜻하는 단어로 여기지만. 사실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글자로 이루어져 있지요.”
유운은 주인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한 후, 탁자 위에 글자를 새겼다.
인(因).
연(緣).
유운의 손가락이 지나가자, 표면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와아, 신기한 재주예요.”
“공자님이야 워낙 재주가 많으시니, 뭐.”
“서화에도 원래 조예가 깊으셨지.”
마을 사람들은 하하 웃으며 넘겼지만, 무림인은 달랐다.
‘저리 부드럽게 새기시다니. 각주님의 무공이 한층 더 높아지셨구나!’
‘검도 아니고 손가락으로? 그런데도 힘들어하는 기색조차 없다니. 놀라운 경지로구나!’
거암과 동평이 각자의 이유로 눈을 빛냈다.
여기서 두어 발자국만 더 나아가면, 손에서 강기를 내뿜는 지고한 경지였다.
“인은 스스로를 돕는 내적인 힘이고, 원인이니. 씨앗과 같습니다.”
스윽스윽.
유운의 손가락이 움직이자 탁자 위에 조그마한 씨앗이 생겨났다.
“연은 인을 돕는 외적인 힘이자, 조건이니. 씨앗을 싹틔우는 땅과 물, 햇빛과 같습니다.”
스윽스윽.
손가락에 따라 맑은 강물이 흐르고, 푸르른 산이 생기고, 따스한 태양이 생겨났다.
“…오오오!”
“…실로 아름답구나!”
탁자 위에 한 폭의 산수화가 그려졌다.
손에 잡힐 듯 생생한 그림이었다.
“이 둘이 만나 씨앗이 나무가 되니.”
스윽스윽.
어느덧 씨앗이 자라나 커다란 나무가 되었다.
나무 밑에 시원한 그늘이 생기니, 아이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뛰어놀았다.
“인과 연 모두가 중요하나….”
꿀꺽.
모두가 침을 삼키고 유운을 바라보았다.
무인이라면 응당 스스로 일어서야 하니, 인을 강조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유운이 강조한 것은….
“저는 그중에서도 남을 돕는 힘, 연에 더 마음이 끌립니다.”
“……!”
“……!”
“그리하니 연이라는 글자가 어떨까 합니다.”
유운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이 참아왔던 감탄을 터트렸다.
“아아…! 어찌 이런 생각을?”
“명가의 후손답구만. 속이 저리 깊으시니.”
“무 이전에 사람이라. 과연 공자님일세.”
사내들은 믿음직한 눈으로 올려다보았고.
“허허허. 듣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지는구나.”
“뭔가 부드럽고, 푸근한 글자네요.”
“그러게요. 우리 여인들 귀에도 착 달라붙네요.”
노인과 아낙네들 역시 모두 따뜻한 눈으로 유운을 바라보았다.
“히히히, 역시 우리 공자님!”
소화가 자랑스럽게 어깨를 펴고, 사람들과 눈을 마주쳤다.
“공자님 의견이 어때요?”
“더 말할 거 있나?”
“의미도 깊고, 듣기에도 좋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지.”
“하하하, 한 글자라서 외우기도, 수놓기도 쉽겠구만.”
생각이 깊은 자들은 ‘연’에 담긴 의미를 알아챘다.
“결국 공자가 선택한 것은 가문도, 자기 자신도 아니었군요.”
동평의 말에 서문요란이 흥분해서 말을 받았다.
“그래요.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남을 돕는 자가 되겠다, 함께 이루어 나가겠다는 뜻이에요.”
개인과 가문만을 생각하는 무림인이라면 하지도 못할 생각이었다.
“소가주님, 얼굴이 빨갛습니다. 술도 안 하셨는데….”
“후. 덥네요. 여름은 여름인가 봐요.”
서문요란이 재빨리 손부채질을 했다.
“한여름은 아직 멀었는데….”
동평은 마지막 말은 삼켰다.
“우와, 벌써 만드셨어요?”
“고작 한 글자인데 뭐.”
말하는 사이, 왕 영감의 며느리가 글자가 새겨진 징표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인과 연이라. 서로 영향을 미치니. 결국 내가 베푼 것이 그대로 돌아온다는 뜻 아닌가?”
“그러지. 착하게 살아야겠어, 착하게.”
깃털만큼이나 가벼운 글자였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태산보다 무거웠다.
사람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선을 한 곳으로 향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공자님.”
“흑산 놈들도, 외부 사람들도 누구도 트집 잡지 못할 겁니다.”
“못된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십시오!”
“우와아아아아!”
“가자! 이기자!”
뜨거운 눈길에는 승리에 대한 확신이 가득했다.
그들이 무림인이 아니라서, 무공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백리유운, 그 소년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두근두근.
태어나서 처음 받는 절대적인 신뢰.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수십, 수백 명의 마음이니.
유운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실망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저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
저들의 믿음에 보답하고 싶다!
자신이 진다고 해도 실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위로해줄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고 싶지 않다. 아니 이기고 싶다!
유운은 처음으로 강렬하게 욕망했다.
“…습니다.”
유운이 조그맣게 말하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이기겠습니다.”
“……!”
“모두를 위해서, 반드시 이기고 돌아오겠습니다!”
평소 말과 행동이 무거운 유운이다.
단정적으로 말하는 모습은 모두 처음 보았다.
“우와아아아아아!”
“유운! 유운! 유운!”
“할 수 있다! 해내자! 아자! 아자!”
“서촌 만세! 만서각 만세! 공자님 만세!”
“와아아아아!”
그 순간 열광적인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흥분해서 머리에 술을 붓기도 하고, 양손에 고기 뼈를 들고 탁자를 두들기기까지 했다.
‘시조께서도 이런 마음이셨을까?’
유운은 무학사가 굳이 세가를 세운 이유를 생각했다.
책과 함께 도를 닦는 것보다, 사람을 구하고, 사람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기고 싶다!’
유운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비무에서 싸우는 것은 유운 혼자가 아니었다.
그러니 나를 위해서가 아닌, 우리를 위해서였다.
‘누구도 저들을 해하지 못하리라.’
감히 그런 생각을 하는 자들에게 똑똑히 보여주리라.
백리유운이 누구인지, 서촌이 어떤 곳인지.
그렇게 뜨거운 여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