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무공을 드러내다 (1)
째잭째잭.
소화는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났다.
“맙소사. 오늘이에요, 어떡하죠? 벌써부터 떨려요.”
“긴장을 풀어라, 얘야. 순리대로 풀릴 것이야.”
장노는 여유있는 척 말했지만, 정작 본인은 잠을 설쳤는지 눈 밑이 거뭇거뭇했다.
“공자님은…?”
소화는 침소의 문을 두드리려다 멈칫했다.
유운은 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중요한 비무를 앞두셨으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시도록 비켜드리자꾸나.”
무가에서 평생을 살아온 장노의 말이다.
소화는 고개를 끄덕이고, 발꿈치를 들고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유운은 두 사람의 생각과 달리, 혼자가 아니었다.
- 반드시 칼을 맞대야만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매화검선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 서로 싸우겠다는 마음을 드러냈고, 간접적이나마 기세를 겨루었으니. 비무는 이미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유운은 두 손을 모으고, 귀를 기울였다.
- 함께 걷고자 하는 너의 마음은 잘 안다. 하지만 비무만은 다르다. 비무대 위에 선 순간, 오직 의지할 것은 오직 하나뿐이니.
“……!”
- 너의 검! 네가 갈고 닦은 무공만이 전부이다.
거기에 종남일패가 말을 보탰다.
- 세상에 무(武)보다 솔직하고 잔인한 것이 없다. 강한 자는 스스로 우뚝 설 것이며, 약한 자는 비참하게 바닥을 구를 것이니.
장난기 하나 섞이지 않은 진지한 목소리였다.
- 당황하지 않도록, 후회하지 않도록 너의 검을 되짚어보아라!
- 미리 마음속에 그려보아라. 최대한 구체적으로. 네가 직접 검을 들고 서 있는 그곳을 상상해라.
두 스승이 동시에 말했다.
첫 실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의 조언이었다.
“말씀 받들겠습니다, 스승님.”
후흡. 호. 후흡. 호.
유운은 심호흡하며 명상에 빠져들었다.
바람이 뺨의 솜털을 간지럽힌다.
손안의 검이 조금은 무겁다.
등 뒤에서 수많은 시선이 느껴지니.
유운의 마음은 이미 비무장 위에 서 있었다.
* * *
“와, 마을에 사람이 엄청나게 많아요.”
“허허허. 나도 가주님 생신 말고 이렇게 많이 모인 것은 처음 보는구나!”
와글와글.
서촌 거리마다 사람이 가득했다.
어마어마한 인파에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곳에서 신양일검을 뵐 줄이야. 유씨세가까지 거리가 상당하거늘. 여기엔 어인 일이십니까?”
“하하하. 그러는 양씨 세가에서도 오지 않으셨습니까?”
“백리의 그늘 아래 있는 자로서 어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년의 무인들이 서로 손을 맞잡으며 인사를 나눈다.
백리세가의 종가뿐만이 아니었다.
“흑산에서 재미있는 일을 벌이고 있군.”
“승부야 볼 것도 없네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호화로운 복장을 한 상인들이 배를 두들기며 말했다.
비무의 승패는 뻔하니, 관심사는 오히려 다른 곳에 있었다.
“요즘 흑산상단의 성장세가 무섭지 않은가.”
“종가 중 제일이라는 서문을 위협할 정도라니. 과연 정말인지 오늘 알 수 있겠군.”
흑산의 비상이라는 단어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파란 옷을 입은 무인들이 나타나는 순간, 흑산의 이름조차 사라졌으니.
“맙소사. 청해오가까지!”
“머나먼 바닷가에서 어찌 알고?”
바다의 모든 배가 오가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고의 배는 모두 오가의 것이다.
오가 무인이 손짓하면, 파도가 일고 태풍이 부니. 바다에서만은 오가가 천하최강이다!
대륙의 해양 물류를 손에 꽉 쥐고 있는 남해의 강자!
백리세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문세가였다.
“이거 바람 쐬러 나왔는데, 생각보다 거물들이 많구만.”
“그러게. 여기 모인 이들 이야기만으로, 몇 년 술안주로는 충분하겠어.”
장노의 얼굴에 긴장이 감돌았다.
“이거…. 더욱 일이 커졌구나.”
예상은 했지만, 그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으니.
더이상 백리세가만의 행사가 아니게 되었다.
“어허. 고작 한 달 남짓인데, 생각보다 정비가 잘 되어있는걸?”
“그러게. 비무대 규모도 상당하고, 갓길까지 다 포장되어있구만.”
곳곳에 안내인이 서 있고, 사방에 깃발이 나부끼고, 시설 역시 웅장하니.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별 볼 일 없는 촌이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행사라는 게 상당히 손이 많이 가는 일인데. 확실히 명가는 다르구만!”
“백리세가의 행사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고 하더니만, 헛소문이었군.”
“그럼 그럼. 웅풍백리라 하지 않은가. 백리가 괜히 백리가 아니지.”
관람석을 꼼꼼히 살핀 상인들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히잉. 그거 아닌데. 전부 다 우리가 한 건데.”
소화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억울해했다.
“그런데 들어간 물자가 아깝구만. 배보다 배꼽이 더 커.”
“뻔하디뻔한 비무에, 투자가 과했어.”
“그렇지. 아무리 백리라지만, 고작 학사가 아닌가.”
유운은 학자로는 나름 명성이 높았다.
그래봤자 무인의 눈에는 학사 나부랭이에 불과했다.
“소문에는 무슨 무학사인가 뭔가라는데?”
“무공을 연구한다? 자네, 정말 무공을 고작 책으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하긴. 책상물림이나 할 법한 생각이지.”
“흥, 나는 같잖은 평판 따위 믿지 않네. 이번에 밑바닥이 드러날 것일세.”
얼굴에 칼자국이 난 무인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결국 칼을 맞대는 게 두려워서, 책 사이로 도망친 것이 아닌가?”
“이 친구, 말조심하게.”
백리세가의 눈치를 보아 말리긴 했지만, 표정만은 무인과 똑같았다.
학사라는 이름으로 가문의 의무에서 도망친 자.
피를 두려워하는 비겁자.
나지막한 비웃음에 소화가 불같이 화를 냈다.
“이, 이, 이! 참을 수가 없어요. 말리지 마세요!”
“녀석아, 조금만 참거라!”
장노가 튀어 나가려는 소화를 힘겹게 말리고 있을 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입니다, 어르신.”
백리세가의 손님을 모시러 간 설영이었다.
“잘 되었어요, 설 사부! 글쎄 이 사람들이….”
소화가 쪼르르 달려가서 혼내 달라고 부탁하려던 때였다.
“어?”
‘윗사람 보기를 돌같이 하라!’를 좌우명으로 삼는 설영이, 그 어느 때보다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백리오혁 때문이 아니었다.
이십여 명에 이르는 일행의 중심.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타는 불에 기름을 부은 듯 시끄러워졌다.
“우와아아!”
“백리 노사께서 오셨다!”
“맙소사, 백리수호검!”
“저분의 존안을 여기서 뵐 줄이야!”
사람들이 환호하며 몰려들었다.
하지만 감히 먼저 말을 걸거나, 다가가지는 못했다.
백리순명.
노가주의 하나뿐인 동생이자, 이름 높은 무인이었다.
“가주께서 병환이 깊으시니, 세가의 앞날이 어둡습니다.”
“어르신께서 나서신다면, 저희가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명분도 실력도 충분했다.
아들들은 다 죽고 젊다 못해 어린 손자들만 남았다.
그가 가주가 되겠다 나서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는 것이 자연이 순리다. 나더러 어찌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란 말이더냐.”
백리순명은 오히려 호통을 치고 검을 뽑았다.
“앞으로 내 앞에서 삿된 말을 입에 올리는 자는, 그 자리에서 참하리라!”
단호한 선언에 누구도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그리고 본인은 오히려 모든 직분을 내려놓고 뒤로 물러섰다.
가문의 법도를 어기는 자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검조차 뽑지 않았으니.
살아있는 가문의 정신으로서 존경받았다.
‘젠장. 일이 어쩌다가 여기까지.’
백리오혁은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눈알을 굴렸다.
적당히 소문을 퍼트리고, 세가의 중진급을 데려와서 유운이 망신당하는 장면을 구경시킬 생각이었는데.
흑산상단이 일을 너무 잘했나 보다.
소문이 들불처럼 번지고, 그 과정에서 터무니없이 부풀려졌다.
그 결과 여기저기서 거물들이 움직였다.
심지어 가문의 최고 웃어른까지도.
“헤헤헤. 촌구석이라 눈에 차지 않으시죠? 변변한 객잔조차 없으니. 따로 준비한 숙소가 있으니, 그곳에서 여독을 푸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작은할아버지이기 이전에, 가문의 숨은 권력자다.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눈치를 보며 손까지 비비며 아부했다.
“사내 녀석이 함부로 허리를 숙이고, 쓸데없이 이곳저곳을 엿보다니. 백리의 후손이 어찌 그리 경망되이 행동한다는 말이냐?”
오히려 불호령만 떨어지니.
‘젠장. 나 보러 어쩌라는 거야!’
백리오혁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모두가 백리순명의 눈치만 보고 있을 때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노사.”
장노가 다가가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껄껄껄. 이 친구, 한동안 얼굴이 안 보이더니. 여기 있었구만. 편하게 말하게.”
“백리의 녹을 먹는 이로서 어찌 그러겠습니까?”
“에잉. 고지식하기는.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무슨.”
서로 얼굴을 마주한 지 50년이 넘는다.
원수라도 편해질 법한데.
장노는 단 한 번도 예를 잃지 않았다.
“허어. 그 아이는 누군가? 손녀인가?”
소화를 보더니 딱딱한 얼굴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제게 무슨 피붙이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친손녀처럼 아끼는 아이입니다.”
“허어. 고놈 참 귀엽게…. 커흠.”
순간 눈을 반짝였지만, 억지로 참았다.
‘사회적인 지위와 체면이 있지. 순명 이놈아, 안된다, 안돼!’
뺨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하고, 젖살도 빠지지 않은 얼굴은 동그라니.
자꾸만 눈길이 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참으로 귀여운 아이로구나! 뺨을 쭉 잡아당기고 싶….’
저절로 나아가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잡았다.
“생각보다 많은 손님이 모였네. 준비는 차질없이 잘 되었는가?”
백리순명은 근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순간 그는 친한 친구가 아닌 백가의 웃어른이었다.
“물론이에요, 저희가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다고요.”
소화가 앞서서 냉큼 대답했다.
“철없는 어린아이가 무얼 안다고.”
기회를 노리던 백리오혁이 말을 가로챘다.
“사람이 이리 모인 것만으로도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칼 든 무인이 한둘이 아니니. 여차하면 큰 사고가 날 터. 이는 유운, 그놈뿐 아니라 본가의 명성에도 누를 끼칠….”
“말만 하지 말고 주변을 보세요, 좀.”
“노옴, 감히 어른의 말을….”
화를 내려던 백리오혁이 말을 멈추었다.
쿠우웅…척!
묵직한 창의 울림.
“저리 두껍고 무거운 창을 한 손으로?”
“저렇게 덩치 큰 사내들은 처음 보는구만.”
일정 간격으로 높은 단이 있고, 그 위에 구릿빛 피부의 사내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남부 제일의 전사라더니. 과연 남방인답구만!”
“남방인은 마물을 산채로 뜯어 발긴다지?”
“살벌하구만, 살벌해.”
아무리 내공의 중요성을 알아도, 겉모습을 무시할 수가 없다.
하늘의 신장과 같은 외모로, 무인들을 감시하니.
어지간한 이들은 사고 칠 생각도 못 했다.
“허어. 몸의 균형이 실로 절묘하구나!”
백리순명이 그들을 보고 감탄했다.
남방인은 타고난 신체는 뛰어나나 무식하기 그지없다.
제대로 된 수련법도 없으니, 무가의 외공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남방인을 낮춰보는 이들이 많았는데, 실제로 보니 달랐다.
“모두 헛소문이었구나.”
큰 근육과 작은 근육이 골고루 발달했고, 몸의 대칭이 완벽하며, 속 근육마저 탄력이 넘치니.
상승의 외공을 체계적으로 단련한 것이 분명했다.
“그래봤자 야만인입니다. 대륙의 무인만 하겠습니까?”
백리오혁은 억지로 깎아내리느라 바빴다.
“게다가 손님을 맞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말을 하던 백리오혁이 멈칫했다.
펄럭, 펄럭!
웅풍백리, 숭정백리
마을 입구. 커다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획이 살아있으니, 마치 용이 춤을 추는 듯하네!”
“허어. 명인의 글이 분명한데. 처음 보는 유파인걸?”
눈이 높은 상인이나, 문인들이 한마디씩 했다.
“명인이라니? 헛된 치장을 위해 과한 돈을 썼구나. 내 유운, 이 녀석을 그리 보지 않았건만.”
백리순명이 오히려 눈살을 찌푸릴 때였다.
“아니에요. 우리 공자님은 그런 분이 아니에요!”
소화가 허리에 두 손을 올린 채 뺨을 빵빵하게 부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