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무공을 드러내다 (2)
“그게 무슨 소리더냐?”
어른이었으면 편을 든다고 호통을 쳤을 것이나, 상대는 귀여운 꼬마가 아닌가?
백리순명이 인자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장인인지 뭔지 모르겠구요. 그거 왕씨네 아주머니가 쓴 글이에요.”
“왕가 성의 여성 장인이 있더냐?”
“아이, 참. 그게 아니고 우리 동네 왕 씨 영감님 며느리예요.”
“이 마을의 주민 말이더냐?”
실로 믿기 어려운 말.
하지만 아이의 눈망울은 티 없이 맑으니, 한점의 거짓도 엿보이지 않았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 이 웅혼한 글씨체가 어찌 여인의 것일 수 있단 말이냐?”
백리오혁이 다시 끼어들어 성을 냈다.
“내 눈이 옹이구멍으로 보이느냐? 분명 거금을 들여 장인을 초대했을 것이 분명하다.”
“에휴. 쯧쯧.”
조그마한 소녀가 늙은이처럼 한숨을 쉬더니, 혀를 찼다.
“이노옴. 어른에게 무슨 방자한 눈빛이더냐?”
아이가 자신을 한심하다는 듯 보니, 저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우리 공자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우물 속에 앉아서 위를 본 자는, 하늘에 고작 별이 몇 개뿐인 줄 안다고.”
“……!”
“소화는 커서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셨어요.”
소화가 간식을 먹을 때, 유운은 종종 재미있는 옛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했다.
“또한 군자는 마땅히 생각이 한쪽으로 치우침을 경계해야 한다고도 하셨고요.”
“오호. 좁은 시야에 갇혀 있지 말라는 뜻이로구나.”
백리순명이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초식에 구애받지 않는 경지의 무인.
나이와 걸맞지 않게 생각이 트여있었다.
하지만 백리오혁은 달랐다.
“어린 녀석이 못된 것만 배워서. 어디서 거짓부렁이더냐?”
“그럼 지금 같이 가볼래요?”
“어딜 말이냐?”
“왕 씨 할아버지네 집에요. 아주머니가 만드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면 되잖아요.”
조그마한 아이가 어깨를 편 모습이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은 백리오혁이 애써 잊으려던 모습과 겹쳤다.
“형님의 말씀은 이래서 옳지 않습니다.”
유운의 부드러우나 단호한 말투가 떠올렸다.
더군다나 백리순명의 눈초리가 꿈틀거리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흥. 본 공자는 바쁘다. 어린아이이니 넘어가도록 하마.”
백리오혁은 말을 삼키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두 사람의 충돌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귀한 손님을 안내하는 일에도 전문적인 교육과 학식이 필요합니다. 유운 쪽 사람들은 못 배운 시골 촌것들이라 본가의 명예를 떨어뜨릴 것입니다.”
잘 차려입은 흑산 상단의 하인들이 나와 입안의 혀처럼 굴었다.
명가에 가면 흔히 보는 전문 접객인. 손님들의 반응은 썩 나쁘지 않았지만, 그뿐이었다.
하지만 서촌 쪽 사람들은 달랐다.
“우리 공자님이 겉에 보이는 예의보다 속으로 전해지는 진심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과 염려.
그리고 마을 구석구석까지 빠삭하게 알고 안내하니.
손님들의 표정이 한결 편안했다.
“한낱 접객인의 의복에 무명이라니? 만서각의 예산을 허투루 사용한 것이 분명합니다.”
백리오혁이 흠을 잡기 위해 복장을 지적했지만.
“우리 마을 아주머니들이 짠 거예요.”
“호오. 직접 말이냐?”
“그럼요. 우리 옷을 누가 지어주겠어요?”
소화가 똘망똘망하게 눈을 빛내자, 백리순명이 흐뭇하게 웃었다.
조금 더 걷자, 음식을 파는 거리가 나타났다.
마침 시장기가 돌았는지 닭꼬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으음. 맛이 살짝 매콤하니 딱 좋구나.”
“백 씨 아주머니의 특제 양념이에요. 바르면 뭐든지 맛있어져요.”
“호호호, 우리 소화 왔니? 너는 공짜야.”
“히히히.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넉넉한 풍채의 여인이 두 손 가득 닭꼬치를 안겨주었다.
큰돈 주고 부른 상인이 아님을 백리오혁조차 알 수 있었다.
다소 기름진 음식을 먹었으니, 입가심을 해야 하는 법.
“흐으음. 향은 단아하고 맛은 잔잔하니. 참으로 좋은 차구나.”
백리순명이 차를 음미하더니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건 백호은침이 아니더냐? 이것도 이 마을에서 키웠다고 우길 셈이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백리오혁이 달려들었다.
“당연히 아니죠. 무슨 어른이….”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이 오른 백리오혁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상등품의 차이니, 못해도 한 근에 은자 수십 양은 넘을….”
“아닌데요?”
“뭐?”
“만보 아저씨네 상단에서 첫 거래라고 엄청 싸게 주셨어요.”
“이익!”
백리오혁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이곳만 들르신다면 종가인 흑산조가에서 섭섭하게 여길 것입니다.”
백리순명은 탐탁지 않았으나, 명분상으로는 맞는 말.
다 함께 흑산조가의 영역으로 이동했다.
겉보기로는 천막도, 복장도, 음식도 모두 훨씬 더 화려했다.
하지만 백리순명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흐으음. 보이는 곳은 잘해놓기는 했는데….”
바깥의 접객인과 달리, 안에서 일하는 하인들의 얼굴은 거멓고 초라했다.
귀빈에게 파는 차는 최상등품이었으나, 일반 관객에게 내놓는 차는 하등품에도 미치지 못했다.
“내실이 부족하구나. 새는 구멍이 많아 보여.”
종가의 체면을 보아 길게 말하지 않았지만, 속뜻은 명확했다.
‘중간 관리자들이 뒷구멍으로 예산을 빼돌린 것이 아니더냐?’
흑산병단은 살상 무기 전문.
상당한 돈을 주고 외부에 일을 맡겼건만, 결과가 이러하니.
‘이 새끼들! 감히 조씨의 돈을?’
백리오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장노, 고놈 참 똘똘하군.”
“우리 서촌의 자랑입니다.”
백리순명의 말에 장노가 흐뭇하게 웃었다.
“이건요, 박 씨 할아버지가 세운 기둥인데요, 술주정뱅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엄청 유명한 석공이었지 뭐예요. 다들 놀라서 뒤집어졌어요.”
조그마한 입을 열심히 놀리며 마을을 자랑하니, 보면 볼수록 귀여웠다.
‘허허허. 내가 혼인을 했으면 저만한 손녀가 있었을 터인데.’
형님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스스로 내린 결단이었다.
그럼에도 씁쓸함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작은 꼬마를 보니 어쩐지 마음이 따듯해졌다.
“그런데 옆구리에 그것은 무엇이냐?”
소화는 물론, 마을 사람 모두가 허리띠에 조그마한 천 조각을 달고 있었다.
징표 위에는 ‘연(緣)’이라는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이것도 왕 씨네 아주머니 작품이에요. 참 이쁘죠?”
소화는 연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었다.
“허어어. 연이라!”
백성이 대가 없이 나서고, 모두가 하나 되어 응원한다라?
근래의 백리세가에서 그런 일이 있었던가?
백리순명이 깊은 탄식을 터트렸다.
“백리세가가 어찌 일어났는지,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구나!”
백성을 위해 일어난 가문임을 자랑해왔으나.
지금은 다른 명문가와 다를 바 없이, 군림하는 자였다.
백리순명의 눈이 부드럽게 풀렸다.
“어쩌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구나.”
유운이 있을 대기실을 바라보며 말했다.
백리오혁은 초조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라고!’
가문의 최고 웃어른의 마음이 돌아선 게 눈에 보였다.
만인 앞에서 비참한 모습을 보이게 한다는 계획은, 시작부터 꼬였다.
‘으드득. 서문 소저, 끝내 이러시기요?’
게다가 기껏 초대한 서문요란은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백리순명은 시야가 좁은 백리오혁과는 달랐다.
주변을 매의 눈으로 살피다,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흐음. 저 아이는 서문가의 여식이 아닌가?’
서문가주가 팔불출이 아닌가 싶을 만큼 제 자식을 자랑했던 기억이 났다.
백리순명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살폈다.
* * *
“아, 꼬시다!”
서문요란은 백리오혁이 혼나는 장면을 보고 키득대며 웃었다.
“소, 소가주님?”
평소와 다른 언동에 동평이 적잖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동 호위. 오늘만이에요. 이렇게 변장한 때가 아니면, 언제 이렇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겠어요?”
서문요란이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면서 빙긋 웃으니.
칙칙한 비무대가 촛불 천 개를 켠 듯 환하게 빛났다.
“벼, 변장. 허허허. 그렇지요. 참으로 감쪽같습니다.”
처음 해 본 남장이 마음에 들었는지, 오늘도 같은 차림으로 나타났다.
동평은 식은땀을 흘리며 주변의 시선을 가렸다.
“그런데 왜 지난번과 달리 화려한 옷을 입지 않으셨는지요?”
비록 시골 마을이나, 오늘만은 각계의 유명인사가 가득했다.
“노련한 상인이나 무인 앞에서, 억지로 여인이 아니라고 우기는 게 더 약해 보인답니다.”
“여인의 미모 역시 무기이니, 쓰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오히려 압도적인 미모로 상대를 압도하고는 했다.
“오늘은 제가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요.”
“……!”
‘과연 소가주님은 속이 깊으시구나!’
동평은 속으로 감탄했다.
자신 대신 유운에게 이목을 쏠리게 하려는 배려였다.
“솔직히 변장이 재미있기도 하고요. 의외의 재능을 찾은 기분이에요.”
“하하하. 그렇지요. 마치 전혀 다른 사람과 같습니다.”
서문요란이 기분 좋게 웃는 모습에 동평은 어색하게 맞장구쳤다.
‘…벌써 들켰구나.’
백리순명이 이쪽을 보면서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다른 곳을 볼 때와는 확연하게 다른 태도였다.
‘사람이 백 가지를 잘하면 하나쯤은 못 해도 괜찮지. 암, 그렇고말고.’
다행히 동평은 체구가 크니, 잘 가리면 보이지 않을 터였다.
“흐음. 세가에 밀린 업무가 많은데. 너무 시간을 쏟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서문요란이 짐짓 관심 없는 척 말했지만, 동평은 속지 않았다.
‘새벽부터 일어나 줄을 서셨으면서.’
덕분에 귀빈석보다도 가까운 일렬에서 관람할 수 있었다.
코앞의 비무대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둥둥둥…!
휘리릭!
웅장한 북소리가 울리더니, 한 사내가 새처럼 내려앉았다.
긴 수염을 늘어뜨린 풍채 좋은 중년인이었다.
“오오오…!”
“놀라운 신법이로구나!”
“서, 설마 저분은?”
관중 중 몇몇이 알아본 듯 눈을 크게 떴다.
“과분하게도 오늘 비무의 승패를 판별하고, 공증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소. 무림 말학 정천수, 무림 동도 여러분께 인사 올리오.”
묵직한 목소리가 비무대를 가득 채우니.
수백 관중의 웅성거림을 압도하는 내공이었다.
“무림판관 정천수!”
“시시비비 정 대협이 아닌가?”
“우와아아아!”
사내가 정체를 밝히자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세가나 상단의 주요 인사들은 물론, 백리순명조차 놀란 표정이었다.
“호오. 정 대협이 이곳까지?”
“맙소사. 이게 저분까지 불러올 정도로 중요한 비무였던가?”
“뭐가 되었든 눈이 호강하는구만. 명성이 자자한 무림의 명숙을 직접 보다니.”
무림인의 별호에는 대개 무기가 들어간다.
무슨 검객이니, 무슨 도객이니 하는 식.
하지만 정천수만큼은 주 무기인 검 대신 다른 이름으로 불리웠다.
옳은 것은 옳다 말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하니 시시비비(是是非非)이며, 누구나 승복하는 판결을 내리니 무림판관(武林判官)이로다!
분쟁 현장에서, 누가 보아도 공명정대한 판단을 내리니.
정도의 마지막 양심이라 불리는 명사였다.
“허어. 엉덩이가 무거운 자이거늘. 용케도 불러왔구나!”
“그, 그렇게 되었습니다.”
감탄하는 백리순명과는 달리, 백리오혁의 표정은 썩어들어갔다.
‘젠장.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구나.’
적인걸이 이기리라 확신하지만, 무림의 일은 모르는 법.
혹시나 해서 공증인으로 적당한 무인을 물색해놓았다.
적당히 명성이 있고, 적당히 말이, 즉 돈이 통하는 인물로.
하지만 서문세가에서, 정확히는 서문요란이 이의를 제기했다.
“기껏 판을 키워놓고, 그런 인물이라니요? 비무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하지만 갈 대협 정도면 충분한….”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다는 흑견파와 관련 있다는 소문이 도는 자입니다. 백리세가는 물론 우리 서문세가까지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하면 더 좋은 인물이라도 있으신지요?”
“최고의 비무에는 최고의 공증인이 어울리는 법.”
“그 말씀은 설마?”
“무림판관, 정천수 대협이 어떤가요?”
“하하하. 그게 말처럼 쉽겠습니까? 그분이 얼마나 바쁘시고, 찾는 분이 많은데.”
공증인은 비무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니, 어지간해서는 맡으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서문세가라도 쉽게 부를 수 없으실 겁니다.”
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신을 내미니.
“이미 승낙하셨습니다.”
“…버, 벌써?”
백리오혁이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천하를 울리는 명망 높은 무인.
당연히 돈 따위가 먹힐 사람이 아니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비무는 그 어느 때보다 공정할 겁니다.”
“하하하, 걱정은요. 무슨.”
‘그래. 어찌 되었든 이기면 될 일이다, 이기면!’
백리오혁은 어떻게든 유운이 땅바닥을 기도록 만들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마침내.
쿠우웅!
휘리릭!
오늘의 두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