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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학사의 무공백과-35화 (110/114)

제35화

무공을 드러내다 (3)

사람들의 시선은 먼저 중년 사내로 향했다.

“적랑쌍도 적인걸이다!”

“십대낭인 중 하나를 여기서 볼 줄이야. 먼 곳까지 온 보람이 있구나.”

“지난번 상행에서는 키만 이장(육미터)이 넘어가는 마수까지 잡았다지?”

“조가에서는 쉬쉬하지만 사실상 흑산 땅의 제일 고수지.”

키는 어지간한 사내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팔뚝 근육은 터질 듯 빵빵했다.

흉터로 가득한 얼굴에, 키만큼이나 큰 두 개의 도(刀)까지.

모르는 자가 보아도 고수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거기에 복장조차 평소와 달랐다.

“저건 붉은 늑대의 이빨이 아닌가?”

“맙소사. 대체 몇 개야?”

“어지간한 명문가의 고수들도 피한다는 마수를, 저리 많이 잡았다고?”

“과연 적랑 대주로구나!”

피처럼 붉은 무복 위. 팔뚝만 한 이빨로 만든 목걸이가 눈에 띄었다.

‘적랑의 어금니로구나.’

붉은 늑대가 맹수가 아닌 마수로 불리는 이유가 있었다.

어린 녀석도 일장(삼미터)이 넘을 정도로 컸으며, 이빨로 쇠를 끊어낼 정도로 물어뜯는 힘이 강했다.

그중 어금니에는 황홀한 붉은 기운이 감도니, 부유한 자들이 탐내는 보물이었다.

‘적어도 열 마리 이상을 잡았다는 뜻이로구나.’

유운은 어금니 개수를 센 후, 속으로 감탄했다.

하지만 유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허어. 소문은 들었는데. 정말로 저리 어릴 줄이야.”

“피부가 맑고 하얀 것이 어린 소저들이 좋아할 얼굴이긴 한데. 무인으로서는 영 아니로구만.”

학사복을 개량한 하얀 무복.

살짝 큰 키. 탄탄하지만 결코 두껍지는 않은 몸통.

무인에게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지만, 아무리 보아도 책만 판 학사처럼 보였다.

“승부는 보나 마나겠구만.”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꼴이야.”

“쯧쯧. 아무리 철이 없기로서니, 비무라니. 백리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명가의 자제들이 다 그렇지. 오냐오냐 떠받드니 다 자기 밑인 줄 알지 않나.”

귀빈석의 백리순명도 눈살을 찌푸렸다.

‘사사로이 가문의 이름을 걸고 싸우다니. 내 너를 그리 보지 않았건만.’

백리수호검의 명성은 하늘처럼 드높았다.

유운에 대한 정을 보이면, 오히려 아이에게 더 해로울 터.

그랬기에 안타까웠지만, 가만히 두고 보았다.

‘만서각주라기에 차라리 잘 되었다고 여겼거늘.’

유운이 얼마나 신중한 아이인지 안다.

분명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터.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가문의 이름을 걸어서는 안 되었다.

백리의 적손이 패배한다?

아무리 강하다고는 하나, 낭인 나부랭이에?

‘가문의 명예를 흙탕물에 처박는 일이지.’

욕을 먹더라도 비무를 막을 생각까지 하면서, 매의 눈으로 유운을 뜯어보았다.

그런데….

‘허어. 자세가 제법인걸?’

오른발은 몸통 반만큼 뻗었고, 왼발은 사선 방향으로 빼서 몸을 지탱했다.

앞으로 나가기에도 뒤로 빠지기에도 알맞은 형태.

‘무의식중에 저리 설 정도라니?’

유운의 발 모양을 보며 더욱 감탄했다.

뒤꿈치가 안으로 향하면, 힘이 밖으로 향할 때 몸에 적지 않은 부담이 가해진다.

하지만 뒤꿈치를 바깥으로 향하면, 엉덩이, 종아리, 발목까지 무게가 자연스럽게 분산된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손이었다.

‘숙련된 검수의 손이로구나!’

검술에 익숙하지 않은 자는 흔히 검을 잡는 엄지와 검지에 힘을 준다.

그리하여 당기는 근육, 굴근(屈筋)이 발달하게 된다.

하지만 더 중요한 손가락은 검을 받아주는 약지와 새끼.

그리하여 고수일수록 뻗는 근육, 신근(伸筋)이 발달한다.

바로 유운처럼.

‘어린아이가 그리 치열하게 살아왔거늘. 내가 둔하여 눈치채지 못하였구나.’

저 정도 몸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룰 수 없다.

적어도 수년 이상 남몰래 수련해왔다는 뜻이었다.

‘더 지켜보아도 되겠구나.’

처음과 달리 묘한 기대감이 생겼다.

* * *

“처음 본 사람들은 나에 대해 오해를 하고는 하오.”

정천수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무림판관이니 시시비비니 하는 헛된 명성 때문인지. 내가 알아서 판결하고, 양쪽을 강제로 화해시킨다고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이오.”

“……!”

“무림의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 있겠소?”

“그 말씀은?”

“서로 바라는 바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니. 원하는 마음 혹은 원망하는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면,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소.”

“……!”

수없이 많은 분쟁을 겪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서로 공개 비무까지 할 정도이니. 풀어야 할 원(願)이 있다는 뜻!”

적인걸이 유운을 노려보았다.

“마음껏 푸시오. 어지간한 상처쯤은 개의치 않을 터이니.”

“……!”

“공증인으로 약속하는 것은 오직 하나. 공정함뿐이오.”

정천수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무에 허락된 것은 자신의 몸뚱이와 검뿐이니. 그 외의 비겁한 술수는 허용하지 않겠소.”

“물론입니다.”

유운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승부가 완벽하게 가려졌다고 판단한 순간, 내가 언제든지 멈출 수 있소.”

“흐음. 좋소.”

적인걸이 마지못해서 대답했다.

“또한 승패를 가리기 애매할 경우에는 전적으로 나의 판단에 따르오. 두 사람 다 동의하시오?”

유운도, 적인걸도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비무대 가운데에 서시오.”

비무 직전. 서로 인사하고, 얼마간 대화를 나누는 것이 무림의 관례였다.

“백리세가의 유운, 적인걸 대협과 검을 겨루게 되었으니. 삼생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먼저 유운이 고개를 숙이고, 한 손을 감싸 쥐었다.

“명가의 후손은 과연 다르구려. 억지로 여기까지 끌어낸 나를 잔뜩 욕하고 싶을 텐데 말이오.”

“말은 그릇의 물과 같으니, 한번 쏟으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어찌 더러운 단어로 대협의 귀를 어지럽히겠습니까?”

“대협이라. 과연 비무 끝난 뒤에도 나를 그리 부를지 모르겠소.”

“만약 비무에서 진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때문이겠지요.”

유운이 빙그레 웃으니, 적인걸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마음에 안 들어.’

자신은 결코 갖지 못할 밝고, 올곧은 태도였다.

“놈을 짓뭉개고, 바닥에 처박아다오. 다시는 그리 재수 없게 웃지 못하도록!”

백리오혁의 부탁이 어쩐지 이해가 되었다.

“하긴 돈 받고 칼을 파는 낭인 따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리가 없지.”

유운이라는 거울이 못난 자신을 비추었기 때문일까.

평소와 달리 가식을 접고 비꼬았다.

“돈을 받는 일에 어찌 귀하고 천함이 따로 있겠습니까?”

“……!”

“다만 돈을 위해 남을 핍박하는 행위는 옳지 못합니다. 이는 의에 어긋나는 일이니….”

유운이 서촌에서의 일을 지적할 때였다.

“의니 협이니. 모두 배를 곯아보지 못한 자들이나 하는 개소리에 불과하오.”

적인걸의 표정이 조금씩 뒤틀렸다.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개를 잡아 먹어본 적 있으시오? 풀죽도 없어서 나무껍질을 벗겨 먹어본 적 있으시오?”

“……!”

“다들 신선놀음을 하고 계시는구려.”

백리오혁도 백리유운도 모두 짜증이 났다.

“적 대협,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더 말해 무엇하겠소? 나는 이미 오래전에 선택하였소!”

내 아이의 눈물을 보느니, 무고한 자의 피를 보겠다!

그리 맹세하지 않았던가?

오랜만에 비참했던 그때를 떠올리니, 가슴이 들끓었다.

쿠웅….

적인걸이 허리의 도를 풀어서 땅에 던졌다.

“대충 바닥에 메다꽂는 정도로 끝내려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소.”

의뢰인의 요청을 더 적극적으로 수행하기로 했다.

“적 대협, 도는 어째서?”

“과연 도까지 필요하겠소? 이 내가, 적랑쌍도 적인걸이 그리 우스워 보이시오?”

부욱.

적인걸이 상의를 찢어발기니, 상처 가득한 상체가 드러났다.

“맨손이면 차고 넘치지.”

“……!”

심장, 복부, 등뼈에 흉터가 가득하니.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툭. 투둑.

때마침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졌다.

달아오른 몸 위로 아지랑이가 일었다.

우드득.

적인걸이 두 손을 펼치자, 뼈 소리와 함께 붉은 기운이 일렁였다.

“잘난 명문세가 따위, 내 두 손으로 짓뭉개주겠다!”

가슴을 열어젖히며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행수라는 가면을 벗어던지니.

그 순간, 그는 맹수 그 자체였다.

스르륵.

정천수가 말없이 뒤로 물러나니, 비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절대 패배해서는 안 되는 대결!

실수하면 멋쩍게 웃고, 다시 기회가 주어지는 수련 따위가 아니었다.

검집이 짊어진 인연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졌다.

- 너의 준비는 완벽하다.

- 모두 두 분 스승님 덕분입니다.

- 마음을 놓지 마라. 첫 실전은 언제나 어렵고, 가혹한 법이니까.

- ……!

-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특히 첫 삼 초식을 조심해라.

준비한다고 해결된다면, 명문의 제자들이 첫 무림행에서 그리 죽어 나갈 리 없다.

‘맨주먹으로 패 죽일 기세로구나!’

서로 아끼며 조심하는 마음이 있었던 설영과는 전혀 달랐다.

꿀꺽.

적인걸의 주먹이 달덩이만큼이나 크게 보였다.

비무라지만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다.

유운은 긴장한 채로 상대를 살폈다.

후우웅…!

적인걸이 두 손으로 공을 감싼 듯 둥글게 휘감았다.

거센 바람이 불더니 바닥의 모래를 밀어냈다.

그의 등 뒤에 붉은 늑대의 환영이 보였다.

‘랑권!’

적인걸이 발을 내디딘 순간.

콰아앙!

단단하기로 유명한 청석(靑石)이 단번에 깨어졌다.

폭음과 함께 커다란 그림자가 쏘아졌다.

“과연 적 대주!”

“실로 성난 늑대와 같구나!”

명성도 실력도 모두 설영보다 훨씬 윗줄의 강자.

그럼에도 어떠한 양보도, 봐주기도 없었다.

후우웅!

적인걸의 주먹이 복부를 향해 날아왔다.

솥뚜껑처럼 커다랗지만, 포탄보다 빠르니.

빗물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오른 주먹으로 나를 허공으로 쳐올리면….’

적인걸에게는 딱 보기 좋은 그림 일터.

유운이 확신하며 두 손으로 복부를 막을 때였다.

- 낭인의 몸은 전신이 무기와 같다.

- 함부로 상대의 무공을 단정 짓지 말아라!

머릿속에서 스승님들의 호통이 울려 퍼졌다.

‘제대로 봐야 해!’

유운은 본능적으로 양기를 끌어올려 눈으로 보냈다.

명안명심법!

제갈 세가의 가르침이 마침내 진짜 모습을 드러내니.

수아아와…!

살을 에는 듯한 바람과 압력이 차츰 약해진다.

투둑, 투둑.

빗방울조차 느려지더니, 선명하게 보였다.

햇빛이 먹구름을 뚫고 쏟아지니, 하나하나가 투명한 보석처럼 빛났다.

‘조금 더, 조금 더!’

집중력이 극에 달한 순간, 비조차 내리기를 포기했고.

‘…맙소사!’

마침내 온 세상이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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