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무공을 드러내다 (4)
[일시 정지]
두루마리 속 영상을 멈추었을 때와 같았다.
물론 진짜로 세상이 멈춘 것이 아니라, 유운의 사고가 그만큼 가속된 덕분이었다.
‘오래가지는 못할 거야.’
유운은 적인걸의 손을 관찰했다.
겉보기에는 전력을 다한 주먹질 같다. 하지만 손가락 끝이 불그스름했다.
‘조법(爪法)을 숨기고 있었구나!’
손가락을 단련하는 무공으로, 익히기는 어려우나 위력은 매우 뛰어났다.
가까이 붙은 상황에서 모르고 당하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강호의 싸움이 음험하다더니.’
적인걸이 도법, 권법, 각법 등 여러 수법에 능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조법 이야기는 없었다.
‘아껴둔 수를 첫 초식에 바로 사용할 줄이야.’
유운을 당황하게 함과 동시에, 세상을 놀라게 할 속셈이었다.
마치 ‘재생’을 누른 듯, 세상이 다시 빨라졌다.
쉬이이익!
복부로 향하던 오른손이 새처럼 솟아오르더니.
늑대의 발톱으로 변하여 유운의 얼굴로 쏘아졌다.
스팟!
제대로 피했음에도 얼굴에 생채기가 날 정도.
대비하지 않았다면 끔찍한 꼴을 당했을 터였다.
“제법…!”
적인걸은 길게 말하지 않고 공격을 이어갔다.
휘이이익!
뺨을 후려갈기려는 듯 왼손으로 내리쳤다.
‘위험!’
스치기만 해도 얼굴에 다섯 줄기 흉터가 남을 터!
어쩌면 평생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리라.
스팟!
손가락 하나 차이로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피했다고 끝이 아니었다.
적인걸이 팽이처럼 몸을 회전시키더니, 거침없이 오른 팔꿈치를 뻗었다.
후우웅!
얼굴이 통째로 짓뭉개질 위기!
유운은 다급하게 두 팔을 교차했다.
콰아아앙!
주르륵….
막강한 내공에 묵직한 체중까지 실린 일격!
유운은 빗물 덮인 바닥 위로 그대로 밀려났다.
“…이걸 막아?”
적인걸의 흉터 가득한 눈썹이 꿈틀했다.
유운은 그 자세 그대로, 서너 걸음 너머에 서 있었다.
다만 공격의 여파로 하얀 옷이 찢어졌다.
“오오오! 저리 맹렬한 공격을 맨몸으로 막아내다니!”
“몸 좀 봐, 대단하구만!”
“학사라더니, 보기와는 완전히 다른걸?”
숨은 잔근육이 모두에게 드러났다.
눈이 좋은 자들은 몸에서 유운의 수련을 읽어냈다.
반면 유운의 태도는 더욱 신중해졌다.
‘고작 스쳤을 뿐인데.’
도검조차 어느 정도 버티는 피부이거늘.
고작 권풍에 깊은 생채기가 났다.
‘진짜배기 무인이로구나!’
낭인이라는 편견 때문에 가려졌을 뿐, 실제 실력은 명성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래도 세 개 초식을 잘 버텨냈구나.’
유운이 마음을 다잡을 때였다.
“인정하오. 소문과 달리, 공자는 꽤 훌륭한 무인이구려.”
“…….”
“아마도 백리 가주께서 남몰래 가르침이라도 베푸셨겠지.”
“오, 그랬구나!”
“그러니 어린 나이에 적 대주의 삼 초식을 받아낼 수 있었겠지.”
“과연 백리세가로구나!”
적인걸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운은 말없이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구나.’
두루마리 속 스승님 존함을 댈 수도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나는 공자가, 명가의 후손들이 싫소.”
“……?”
“그렇게나 강한 주제에 정작 위험한 일은 낭인들을 시키거든.”
적인걸은 죽어 나간 동료들을 떠올렸다.
뒷자리에 앉은 귀한 분이, 칼질 한 번만 했으면 살았을 목숨이었다.
“그러니 내가 어찌 용서할 수 있겠나!”
이글이글.
적인걸이 가면을 벗어던지니, 분노와 증오로 가득한 맹수가 눈을 떴다.
“…적 대협!”
유운이 오해를 풀 틈도 없었다.
“받아라!”
후우우웅!
적인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더니, 오른 다리를 내질렀다.
회전력까지 더해, 쇠몽둥이가 되어 유운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콰아아앙!
텅, 텅, 텅!
막아낸 유운이 공처럼 튕겨 나가며 서너 바퀴나 회전했다.
“맙소사!”
“엄청난 위력이구나!”
“저 다리로 붉은 늑대의 허리를 두 동강 냈다고 하지 않던가!”
딱히 이름도 없는 초식이나, 위력만은 명문세가의 무공을 능가했다.
“조심해라. 나의 손과 발에는 눈이 없다.”
살기 가득한 말과 함께 주먹과 다리가 쏟아졌다.
적인걸의 몸에 새겨진 흉터의 수가 곧 초식의 수이니.
파바바박!
견문이 넓은 편인 유운조차 처음 보는 초식으로 가득했다.
‘거리를 절대 내주지 않는구나!’
바싹 달라붙어서 피할 틈을 주지 않으니, 막는 수밖에 없었다.
콰왕! 쾅!
막을 때마다 튕겨 나갈 정도로, 한방 한방이 강력했다.
스팟!
주먹질인 줄 알았는데 손톱이 눈을 할퀴어온다.
후우우웅!
시야가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발로 허벅지를 내리친다.
‘빠르다!’
쏟아지는 공격을 막느라, 생각할 틈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평소의 수련이 빛을 발한다.
‘이래서 그런 훈련을 시키셨구나!’
종남일패가 가혹하게 몰아붙여서 실전 대응을 몸에 때려 박아 넣었으니.
유운이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차라리 맨손이라 다행이구나.’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어설프게 검에 의지했으면, 오히려 빈틈을 보였을 것이다.
- 막아내기만 해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 가능한 거리를 유지하고, 적의 공격을 피해내는 것이 좋다.
- 하지만 딱 붙은 상황에서는 그리할 수 없지. 그럴 때 이 방법을 써라!
종남일패의 가르침이 저절로 펼쳐졌다.
[흘리기]
휘리릭.
적인걸의 주먹을 막아내는 대신, 살짝 빗겨서 손목을 밀어냈다.
“……!!”
적인걸이 크게 성이 난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렇게 수십, 수백 번의 공방이 오갔다.
밀릴 듯 밀릴 듯하면서도 끝까지 꺾이지 않으니.
“맙소사. 저리 빠른 공격을 어떻게?
“눈으로 보기조차 쉽지 않은데. 실로 놀랍구나!”
지켜보는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 흐름이다. 박자다!
유운의 머릿속에서 환청처럼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정신없는 와중에 모든 공격을 읽고, 파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그렇기에 흐름이다.
- 초식 하나하나를 보는 게 아니라, 흐름을 읽어라!
그것은 마치 도도한 강물과 같았다.
아무렇게나 막 쏟아지는 듯하지만, 사실은 정해진 물길을 따라서 흐른다.
적인걸의 무공 역시 그러했다.
‘지금!’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주먹이 솟아오른다.
‘여기서는 상체보다는 하체가 더 자연스럽지.’
파앗!
마침 적인걸이 유운의 발목을 후려치고 있었다.
‘이 흐름에는 지금!’
모두 처음 보는 초식이니 손발이 어지러워야 정상이다.
하지만 하나, 박자만큼은 유운이 앞서고 있으니.
적인걸의 폭포수 같은 공격을 모두 막아내고 있었다.
콰아아앙!
적인걸의 내려찍기를 피하자, 비무대 가운데가 움푹 내려앉았다.
‘꿀꺽. 발차기로 바위를 가루로 만들다니!’
유운이 더욱 긴장감을 끌어올릴 때였다.
“실로 대단하구나. 시간이 있었으면 큰 인물이 되었겠어.”
무심한 말에 살의가 가득하니.
적인걸은 더이상 존대를 하지 않았다.
그가 보는 미래에, 유운의 미래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도 받아 보거라.”
지금까지와 달리 느릿느릿하게, 두 손을 원형으로 모으니.
우우우웅…!
안에서 막대한 내공이 물결쳤다.
* * *
같은 시각, 관객석에서도 난리가 났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거세지더니.
투두두두…!
솨아아아아…!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이쿠, 비가 심한걸?”
“아침까지만 해도 맑더니. 갑자기 왜?”
우르르릉!
멀리서 천둥까지 울리니.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젠장, 다 젖겠어!”
“저기 천막으로 피하세!”
힘들게 준비한 비무이고, 멀리서 온 걸음이다.
그랬기에 마을 사람은 물론 외부 손님 누구도 비무 관람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급히 천막 안으로 피했다.
투두두두…!
굵은 빗줄기가 천막을 두들겼다.
빗줄기가 점점 더 거세졌다.
비무대도, 관람석도 물안개로 가득 찼다.
“무슨 비가 아니고 우박 같네 그려.”
“진짜 이러다 구멍이라도…. 어이쿠!”
와르르…!
마침 흑산조가의 천막 하나가 무너져내렸다.
“으아악!”
“아, 안 다쳤나?”
“젠장. 긁혔어!”
“치료를….”
“무슨 소리인가? 비무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와르르…!
귀빈석을 제외한 일반석 천막이 마구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일반석 천막과 기둥에 싸구려를 쓴 탓이었다.
“제, 젠장! 이놈들 잡히기만 해봐라!”
백리오혁은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쪽으로 오시오, 어서!”
“어이쿠. 얼른 이동하세!”
흑산조가의 사람들이 멀쩡한 유운 쪽 관람석으로 이동했다.
“어서 이리로 오세요, 어서!”
조그마한 여자아이, 소화가 열심히 손짓했다.
“여기, 몸부터 닦으시고.”
“급한 대로 이것부터 걸치시지요.”
서촌 사람들이 우비와 마른 수건을 건넸다.
“고, 고맙소.”
흑산조가의 손님들은 얼떨떨하였다.
조금 전까지 상대편을 응원하던 적이었는데, 이리 친절하다니?
살벌한 검의 세계를 살았던 무림인들은 특히 놀랐다.
우르릉… 콰광!
하지만 비가 더 심해지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흑산조가의 객석은 텅 빈 반면, 유운의 객석은 사람으로 가득 들어찼다.
“위, 위험…. 옳지, 잘한다!
“어이쿠, 보기만 해도 살 떨리는 저 공격을 막아냈어?”
“나이도 어린 공자가 대단하구만, 대단해!”
자리가 바뀌어서일까, 아니면 약자를 가엽게 여기는 본성 때문일까.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유운을 응원하였다.
콰아앙!
흉터로 가득한 거한이 비무대를 거세게 내리밟으니, 청석이 모조리 깨져나간다.
막대한 힘이 허리를 타고 주먹에서 폭발했다.
“아아아…. 끝이로구나!”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미소년은 피와 살점이 되고 말 것 같았으나.
퍼어어엉!
한 손으로 팔뚝을 흘려내고, 다른 한 손으로 야수의 가슴을 가격하니.
역사 이전의 싸움을 보는 듯했다.
“이, 이게 진짜 비무라고?”
“마치 야수와 투사의 싸움과 같구나!”
“아아! 이것이야말로 사내의 싸움이지, 아암 그렇고말고!”
피를 끓게 ‘날 것’의 전투!
백성의 시름을 잊게 하는 데는, 먹을 쌀과 구경할 칼싸움만 있으면 충분하다!
오죽하면 고대의 왕이 그렇게 말할 정도였겠나.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잊을 정도로 두 사람의 전투에 몰입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관객석이 조용해졌다.
쿠르르…!
적인걸이 내기를 끌어올리니, 두 주먹 안에서 물과 바람이 회오리쳤다.
콸콸콸…!
회오리치는 폭풍 위. 커다란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흑산 제일의 내공을 가졌다더니…. 맙소사!”
“저, 저건 심상치 않아!”
“너,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사람들이 소리칠 때였다.
“이것도 받아 보거라!”
적인걸이 포효하며,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정점에 이른 순간, 온 힘을 다해 주먹을 내리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이제까지와 비교도 되지 않는 폭음!
비무대의 청석이 사방으로 튀면서, 폭풍이 일었다.
충격의 여파만으로 앞줄의 관객들이 쓰러졌다.
“마, 맙소사!”
“서, 설마 큰일이 난 것 아니야?”
그럼에도 사람들은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처절한 비무의 끝을 확인하고 싶었다. 설령 참혹한 광경을 볼 지라도.
하지만.
퍼어어엉!
뒤늦게 물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솨아아아…!
폭음과 함께 희뿌연 안개가 비무대를 뒤덮었다.
“저, 저건?”
“유, 유운 공자가 아닌가!”
상의가 완전히 찢겨나간 유운이 두 주먹을 교차하고 있었다.
전신에 늑대가 할퀸 듯한 발톱 자국이 가득하고, 두 팔은 잔뜩 부어올랐다.
그럼에도 유운은 투지를 잃지 않았다.
“얼마든지 받아내겠소. 오시오!”
어린 호랑이처럼 우렁차게 외쳤다.
그 순간 사람들은 깨달았다.
순하게 생긴 소년이 어느덧 어른이 되었음을.
연약한 학사에서, 당당한 무인이 되었음을.
“이거 모르겠군.”
“그럼. 승부는 끝까지 봐야지 아는 법이지.”
“어쩌면, 어쩌면…!”
모두가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처음으로 어떤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