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37화 (89/114)

제37화

무공을 드러내다 (5)

흑산조가 쪽도 백리유운 쪽도 아닌 관람석 한가운데.

깊은 바다처럼 푸른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서 있었다.

투두두두…!

굵은 빗줄기로 곳곳의 천막이 무너졌지만, 이곳만은 달랐다.

따로 천막을 세우고, 등이 검은 고래의 가죽으로 뒤덮으니.

빗방울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소가주께서는 어느 쪽이 이기리라 보십니까?”

한쪽 눈에 안대를 한 중년인이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푸른 눈의 청년이 비무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백리가 젊은이의 실력이 생각보다 놀라우나, 적인걸이라는 사내 역시 소문보다 훨씬 강하더군요.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 한들, 생사를 넘나든 세월을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중년인의 말에 주변 무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목숨을 걸고 싸워온 자만이 진정한 무(武)가 무엇인지 알지요.”

“적인걸의 주먹에 담긴 살기와 패기는 진짜이니. 어린 청년이 당해내기 힘들 것입니다.”

남해의 패자, 청해오가다운 대답이었다.

“무림에 채 피지도 못하고 저문 꽃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소가주님.”

“맞습니다. 본가만 해도 아까운 녀석들이 많았지요.”

사내들을 숙성시킨 것은 거친 바닷바람뿐만이 아니었다.

잔혹한 해적의 칼날과 이성을 마비시키는 마물의 공포 앞에 무너진 무인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보면 그게 맞는 말이긴 한데….”

미청년이 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투두두두…!

천막 밖은 폭우가 한창이니 한바탕 난리가 날법한데.

무형의 막에 가로막혀서, 청년에게 닿지 못했다.

놀라운 광경에 가까이에 있던 관객들이 입을 떡 벌렸다.

“오가가 해룡(海龍)의 피를 이었다더니….”

“세상 어떤 물도 침범하지 못한다는 소문이 정말이었구나!“

청해오가의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는 하지.”

평화롭던 바다에 갑자기 용오름이 생기기도 하고, 버려진 난파선에서 놀라운 보물이 나타나기도 한다.

소가주는 예측할 수 없는 바다를 누구보다 더 잘 읽는 사내였다.

“어쩌면 오늘이 그날이 아닐까 한다.”

“……!”

“……!”

청년의 말에는 신비로운 기운이 어려 있으니, 내뱉은 말은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소가주님이 그리 말씀하실 정도라니….”

“저 청년에게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단 말인가?”

소가주의 말에 모두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청해오가보다 비무대에 가까운 관람석.

물을 두려워하지 않는 고수가 하나 더 있었다.

“하필이면 이때 비가 오다니. 첫 실전을 경험하는 아이에게 너무 가혹하구나.”

백리순명이 혀를 차며 한숨을 쉬었다.

폭우로 인해 비무대는 뿌연 물안개로 가득했다.

어지간히 안력이 뛰어난 자가 아니면, 꿰뚫어 보기 힘들 터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따듯한 불에 몸을 말리세요.”

조그마한 소녀가 사람들을 천막으로 이끌었다.

“아이구. 고맙소. 미처 우비도 준비 못 했는데. 덕분에 살았구려.”

중년 상인이 아이를 안고 난로 옆에 바싹 붙었다.

“그러게 아이까지 왜 데려오셨어요? 고뿔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소문이 어찌나 돌던지. 놓치면 한이 될 것만 같았네. 아이에게도 좋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했고.”

“에휴. 사내들 칼질하는 게 무슨 볼거리라고. 공자님 일만 아니었으면….”

소화는 투덜거리면서도 알뜰살뜰 아이들을 챙겼다.

외부 손님만 수백이 넘었다. 소화는 자리에 앉을 틈도 없이 바삐 움직였다.

천막 바깥으로 나가기 일쑤였다.

투두두두…!

얇은 우비뿐, 우산도 없으니 흠뻑 젖어야 마땅하건만.

소화는 햇빛에 말린 이불처럼 뽀송뽀송했다.

모두 백리순명이 따라다니며 비를 막아준 덕분이었다.

“우와, 아빠. 보세요, 신기해요!”

아이는 히히 웃으며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꿀꺽. 어, 엄청난 무공! 역시 백리수호검이로구나!”

중년 상인의 눈동자는 사정없이 흔들렸다.

본인은 물론 옆의 소녀까지 무형의 막으로 감쌀 수 있다니?

사방에 젖은 사람들로 가득한데, 두 사람의 옷만은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깨끗했다.

“이만하면 되었다. 너도 들어가려무나.”

“할아버지는요?”

“나는 조금만 더 보고 들어가마.”

“빨리 와야 해요, 날이 추워요.”

소화를 들여보내고,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쉐애애액!

터어엉!

붉은 늑대의 날카로운 이빨이 물어뜯으려 했지만, 학사가 바람처럼 몸을 날려 피해냈다.

‘정녕 형님께서 도움을 주셨다는 말인가? 나조차 모르게?’

백리순명조차 그리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유운의 움직임이 뛰어났다.

퍼어어엉!

다시 한번 충격파가 터졌다.

그리고 비무대 위의 상황 역시 바뀌었다.

* * *

“이것까지 받아낼 줄이야.”

적인걸의 목소리에 은은한 감탄이 깃들었다.

솨아아…!

뿌연 물안개 속에서 유운이 걸어 나왔다.

“적 대협께서 손속에 사정을 봐주신 덕이지요.”

“아직도 그런 말을 할 여유가 있더냐?”

유운의 말에 오히려 적인걸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적 대협, 작은 오해가….”

“내가 실수했어. 처음부터 최선을 다할 것을.”

“……!”

“오히려 호랑이 새끼를 키워준 꼴이 되었구나.”

한 차례 고함을 지른 덕분일까.

긴장했던 몸이 풀어지고, 초식이 조금씩 눈에 익으니.

유운의 대응이 점점 더 능숙해졌다.

직접 맞상대한 적인걸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인걸아, 인걸아. 아직도 멀었구나. 알량한 권력과 명성에 취해, 체면 따위를 염두에 두다니.”

적인걸이 스스로를 탓하며 두 개의 도를 꺼내 들었다.

스르릉.

칼끝부터 날밑까지 긴 홈이 파여 있었다.

날 무늬가 염료로 물들인 듯 붉었다.

‘마수의 피로구나!’

동시에 적인걸의 눈빛이 바뀌었다.

“부러진 팔은 고칠 수 있으나, 잘린 팔다리는 붙일 수 없으니. 조심하거라.”

“……!”

목소리는 찐득한 살기로 가득했고, 시선조차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태어나 처음으로 맞이하는 날 것의 살의!

온몸의 솜털이 올올히 곤두섰다.

후우웅.

적인걸이 비스듬히 서더니, 도를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두 개의 도를 앞을 향해 뻗으니, 늑대의 송곳니처럼 보였다.

“저 자세는 적랑혈도가 아닌가!”

“적 대주가 마침내 본신의 무공을 드러내는구나!”

검을 잡은 자세만으로 사람들이 알아볼 정도이니.

적인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절기였다.

우우웅…!

적인걸의 눈이 붉어지며, 검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솟아났다.

마치 늑대가 커다란 마수로 변하듯, 옷과 공기까지 부풀어 올랐다.

“받아라!”

한 줄기 고함과 함께 도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콰아아앙!

천둥소리와 함께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폭음이 일었다.

그러나 적인걸의 공격은 고작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콰아아앙!

번쩍!

칼날이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고, 사방으로 돌조각이 튀었다.

“위, 위험해!”

“뒤로 오게, 뒤로!”

맨 앞에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뒤로 몸을 피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후, 비가 조금 잦아들 때였다.

“맙소사!”

“저게 사람의 도가 만든 위력이라니.”

“마수조차 두 동강 낸 도가 아닌가.”

“단단한 청석이 아예 가루가 되었구만!”

사람들은 눈을 부릅떴다.

비무대 곳곳. 화탄이 터진 듯 움푹 패였다.

“쿨럭.”

유운의 입가에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렀다.

제대로 막아냈음에도 몸 안이 진탕될 정도였다.

“잘 버텼는데. 아쉽구만.”

“그래, 적 대주가 진짜를 드러냈으니. 곧 끝이 나겠지.”

“억지로 버티면 위험해. 이쯤에서 끝을 내야지.”

관중들이 입맛을 다시며 이야기했다.

대다수가 유운의 패배를, 누군가는 죽음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백리오혁은 달랐다.

‘왜 이렇게 안 끝나는 거야?’

그의 계산대로라면 유운은 진즉에 쓰러져야 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큰 상처 없이 서 있었다.

‘젠장, 예감이 좋지 않아.’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퍽퍽!

어른들의 눈을 피해 유운을 두들겨 팰 때였다.

“그렇게 말했거늘, 너 혼자만 숙제를 해와? 그렇게 잘난 척하고 싶어? 좋아, 이걸 버티면 인정해주지.”

아직 어설펐지만 무공을 익힌 주먹이었다.

반면 유운은 어리고, 연약했다.

그럼에도 녀석은 굴하지 않았다.

“힘으로 뜻을 꺾으려 하시다니. 이는 옳지 않습니다.”

잘못했다고 빌기는커녕, 꼿꼿한 자세로 말했다.

아무리 괴롭혀도 소용없었다.

흙바닥을 구를지언정 부러지지도, 휘어지지도 않았다.

불길하게도 그때가 생각났다.

“…어떻게?”

폭풍처럼 몰아치던 적인걸이 처음으로 멈추어 섰다.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오른쪽 신발 위. 유운이 남긴 발자국이 선명했다.

‘내가 도를 뻗기도 전에 막아내다니!’

바위조차 가루로 만드는 힘에는 독특한 수법이 필요했다.

발끝 용천혈에서 샘솟은 기운이 허리를 타고 회전하면서, 마지막으로 팔에서 폭발한다.

그런데 유운이 시작점인 오른발을 막아버렸으니.

도를 튕겨내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놀라운 수법이었다.

“오른쪽 디딤발이 도법의 중심축이 아닌지요?”

“그걸 어떻게 알았지? 설마….”

적인걸이 눈을 부릅떴다.

“다행히 같이 무를 겨룬 시간이 짧지 않았으니. 초식이 눈에 조금 익었을 뿐입니다.”

“나의 도법을 읽었다고? 고작 두어 번 본 것이 전부일 텐데?”

적랑혈도는 12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졌으며, 하나하나가 복잡하고 정교했다.

“도법은 처음이나 사람은 처음이 아니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냐?”

“이미 깨달은 무공을 어찌 잊겠습니까? 주먹과 다리를 놀리는 수법에도 이미 적 대협의 도법이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적인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고작 반 시진도 채 되지 않는 동안에 그걸 다 읽었다고?”

내공 구결을 알려준 것도 아니고, 초식의 모든 변화를 보여준 것도 아니다.

그랬기에 실전에서 본 무공을 파해하는 데는 수년도 부족했다.

그런데 고작 이 짧은 순간에?

‘말도 안 되는 재능이로구나!’

소문으로도 들어본 적 없고, 이야기책에서조차 본 적 없으니.

실로 하늘이 내린 천재라 할 수 있었다.

“아쉽구나.”

“……?”

“너에게 시간이 있었다면, 놀라운 경지에 도달하였을 것을.”

안타까운 듯한 표정과 달리, 목소리는 서늘했다.

“하지만 너에게 그 시간은 주어지지 않으리라!”

명가에서 자신들의 무인을 아끼는 이유가 있었다.

낭인도 산적도 명가의 무인과 다르다.

칼이 안 통하면 돌멩이로 내리치고, 그도 안 통하면 이빨로 물어뜯는다.

‘곱게 자란 명문의 후손이 실전의 흉험함을 알 리가 없지.’

초식조차 아닌 변칙이자, 임기응변!

그렇게 무너지는 명가의 무인을 많이 보았다.

적인걸의 수법이 완전히 바뀌었다.

휘이익!

도를 뻗는 척하면서, 바닥의 돌을 차올렸다.

‘위험!’

유운이 고개를 돌려 피하는 곳에는, 적인걸의 머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후우웅!

뜻밖의 박치기!

유운조차 완전히 피해내지 못했다.

콰아앙!

“쿨럭.”

가슴을 맞았는지, 순간 유운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적인걸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퍼어억!

적인걸이 가차 없이 무릎을 들어 올려 고간을 노렸다.

“저저저! 명성 높은 적 대주가 어찌 저런 수법을?”

“비무에서 너무하지 않은가!”

“적랑대의 명예를 흙바닥에 집어던지는구나!”

적인걸은 비난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파아앙!

발을 세게 굴러 돌가루와 빗물을 유운의 얼굴로 튕겼다.

심지어 유운의 팔을 이빨로 물어뜯으려고까지 했다.

“아아… 끝이로구나.”

“세월이 아쉽구나, 세월이.”

“세가 무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면 좋았을 텐데.”

명문의 자제가 어찌 저런 추잡한 싸움을 경험해보았겠는가?”

모두가 유운의 패배를 예상했을 때였다.

“이보게들, 저걸 보게!”

“저, 저건?”

- 투웅!

고간을 파고드는 적인걸의 오른 무릎을 왼 무릎으로 막아낸다.

돌가루가 눈앞을 스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퍼어억!

이빨을 드러낸 상대의 얼굴을 오히려 후려치기까지 했다.

“……!”

“……!”

명가의 후손에게 가장 불리하다고 여겨지는 막싸움!

그 막싸움에서 조금씩 우위를 잡더니.

어느새 적인걸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