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무공을 드러내다 (7)
차 한잔 마실 시간 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내 예상 밖이로구나.’
적인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가 아무리 살벌하게 도를 휘둘러도, 유운은 침착하게 검으로 퉁겨냈다.
‘나의 초식이 이미 다 읽혔구나!’
심지어 자신도 모르는 습관이나 약점까지 꿰뚫어 보니.
이제는 채 칼을 다 뻗기도 힘들 정도였다.
반면 유운의 공격은 달랐다.
사르르르…!
번쩍!
유운의 검은 마치 물과 같았다.
적인걸의 도가 만들어낸 그물을 막힘없이 지나쳐서, 몸통을 가격한다.
옆구리의 상처가 점점 더 늘어났다.
‘평범한 백리팔검이거늘. 어찌 이리 다르단 말인가?’
제자리에서 팽이처럼 회전하는 초식, 선풍회선.
숨겨진 이빨 세 개를 가진 초식, 맹호출동.
적인걸조차 익히 아는 초식이거늘, 막을 수가 없었다.
‘검술에서 향기가 나는 검술이라니?’
거기에 생전 처음 보는 검술까지!
초식 이해도만큼은 적인걸보다 압도적으로 위였으니.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승기가 기울었다.
“말로만 들어보았지, 처음 보았구나.”
적인걸이 도를 멈추었다. 유운 역시 잠시 숨을 고르며 검을 거두었다.
“무슨 말씀인지요?”
“세월을 뛰어넘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 말이다.”
“……?”
“천재라고도 하지.”
“……!”
적인걸이 적인 유운을 극찬하고 있었다.
“흐름은 이미 너에게 넘어갔구나.”
아직은 작은 우세에 불과하다.
하지만 경험 많은 낭인이기에 오히려 더 확신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약해지고, 적은 강해진다.
정상적인 비무라면 여기서 패배를 시인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흑산조가, 그리고 백리오혁과의 ‘계약’이 걸린 상황.
완수하지 못할 경우, 너무나 중요한 것을 잃게 될 터였다.
“나는 질 수 없다!”
‘빼앗기 위한 싸움’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남들이 욕해도 상관없다. 더 나아가 처벌을 받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적인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고통과 번민…. 그리고 결심이었다.
“비무는 네가 이겼으나, 싸움은 내가 이길 것이다!”
적인걸이 살기 어린 외침과 함께 내공을 폭발시켰다.
우우웅…!
공기가 떨릴 정도의 막대한 내공!
우윳빛 도기가 맑고 투명해지니, 마치 새벽에 마주한 백화(白花)와 같이 변했다.
“결백(潔白)검기!”
“적인걸, 저자가 실력을 숨기고 있었구나!”
검기지경 오단공!
순수한 백색의 검기는 무른 쇠조차 두부처럼 가르니.
한 문파의 주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적인걸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이잉…!
커다란 도 위로 이글거리는 기운이 덧씌워졌다.
바닥의 돌덩이들이 마치 모래처럼 녹아내렸다.
관중들은 어마어마한 열기에 숨조차 쉬지 못했다.
“……!”
“…가, 강기!”
대장장이가 쇠붙이를 달구고, 두들겨서 명검을 완성하듯.
내공을 끝없이 압축하고 정련해야만 간신히 만들어낼 수 있는, 지고한 절기였다.
“겨우 불혹(사십)의 나이에 강기라니…!”
“낭인계의, 아니 유주의 판도가 바뀌겠구나!”
유력 가문의 가주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렸다.
심지어 겁에 질려서 슬금슬금 뒤로 빠지는 자까지 있었다.
같은 강기지경의 고수가 아니면 막을 수 없다는 것이 강호의 상식.
적인걸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이곳이 피바다가 될지도 몰랐다.
파사삭…!
커다란 도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니.
단단한 비무대의 청석이 바스러졌다.
‘공개 비무에서 강기라니!’
유운은 차가운 쇳덩이를 삼킨 듯 가슴이 무거웠다.
종남일패조차 지나가면서 잠깐 언급만 했을 뿐이었다.
- 강기라? 네가 아무리 천재라 해도, 지금은 무리다.
- ……!
- 섭섭해하지 말거라. 이는 땅에 씨를 뿌리고, 싹을 튀우고, 커다란 나무를 키우는 것과 같으니. 오랜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일이니라.
- 강기를 쓰는 자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강기는 강기가 아니면 막을 수 없다.
- ……!
- 또한 강기를 쓰는 자들끼리도 아차 하면 목이 날아가니.
- 그 말씀은?
- 도망가라. 무조건. 멀리.
- ……!
-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호랑이를 만났는데 몸을 피하지 않는 것이 더 어리석은 일 아니더냐?
- 만약 비무에서 만난다면….
- 강기를 비무에서? 그건 이미 비무가 아니라, 생사결이겠지.
- ……!
- 허나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무림 공적이 되고 싶지 않다면….
무엇보다 낭인 출신 적인걸이, 강기지경에 올랐으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상식은 종종 안 좋은 쪽으로 깨지는 법.
‘위험해!’
등줄기에 소름이 돋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강기는 백번 담금질한 백련 정강조차 베어내니.
날도 서지 않은 수련검 따위는 종잇장이나 다름없었다.
저벅저벅.
화르르르…!
마치 태양을 도 안에 가둬둔 것만 같다.
불타는 용암이 유운에게 쏟아졌다.
“멈춰요!”
“이건 아니오!”
“멈추어라!”
서문요란, 동평, 백리순명뿐만이 아니었다.
“적 행수, 멈추시오!”
공증인 정천수가 경악하며 외쳤다.
- 서로의 원을 마음껏 푸시오! 그리해야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리니!
어지간한 중상을 입더라도, 외부에서 비난하더라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강기만은 다르다.
명백히 목숨만을 노리는 수법이니.
누구도 강기가 난무하는 싸움을 비무라 부르지 않으리라.
하지만 말리기에는 이미 늦었다.
쐐애애액!
강기를 품은 도가 유운의 목을 노렸다.
피하기에는 너무 가깝고, 막기에는 너무 강한 공격이었다.
‘막을 수 없어. 아니 막으면 죽어!’
흔히 강기지경을 일컬어 ‘운명을 뒤트는 힘’이라고 표현하고는 했다.
그만큼 규격 외의 힘!
그 힘이 강제로 유운의 운명을 뒤바꾸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 끝이라고? 아니, 그럴 수 없어!’
유운은 굳은 다짐을 떠올렸다.
“절대로 지지 않겠습니다, 아니 이기겠습니다.”
“저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인연이 닿은 사람들을 위해서. 아끼는 사람들을 위해서!”
의지가 불꽃이 되어 타오르는 순간.
시간이 느려지고, 세상이 멈추었다.
‘마지막이로구나!’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유운이 떠올린 것은 적이 아니라, 자신.
정확히는 몸 안의 신비로운 기운들이었다.
솨아아아…!
콸콸콸.
청량한 바람과 따스한 햇볕 그리고 기름진 흙.
유운은 어느새 심상 세계 속 밭 위에 서 있었다.
풍요로운 밭이 무려 열 개나 펼쳐져 있었지만….
‘부족해!’
싹이 튼 밭은 오직 두 개뿐이었다.
현실적으로 낼 수 있는 힘은 고작 이단공 수준.
하지만 조화무궁선법이기에, 천하에서 가장 정순한 기운이기에….
사단공을 버텨냈다. 어쩌면 오단공조차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기지경만은 달랐다.
아무리 조화무궁이라도, 겨우 두 포기의 새싹만으로는 불가능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새싹이 쑥쑥 자라서 성목(成木)이 되고, 하늘까지 닿는 거목(巨木)이 된다면?
혹은 열 개의 밭이 모두 싹을 틔운다면?
아직까지는 가능성일 뿐이었다.
‘방법을 찾아야 해.’
풍요로운 밭 너머.
도랑길을 따라 푸른 물이 흘렀다.
비록 시냇물처럼 조그마했지만, 생명의 기운과 활력이 느껴졌다.
‘열 개의 밭 모두 조금씩 다르구나!’
배꼽의 기해혈에서 흘러나온 푸른 기운은 단단하고 따듯했다.
반면 가슴의 옥당혈을 지나는 붉은 기운은 뜨겁고, 자유로웠다.
미간의 인당혈의 노란 기운은 달콤하고, 황홀했다.
거기에 발꿈치의 용천혈부터 정수리의 백회혈까지.
열 개의 단전에서 흘러나온 기운은 서로 다른 색깔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서로 개성이 달라서 함께 할 수 없다고만 생각했는데….’
문득 만서각에서 읽은 한 책의 내용이 떠올랐다.
- 아무리 맑은 소리를 내는 악기라도 한 가지 음만으로는 음악을 빚어낼 수 없네.
이름 높은 예인(藝人)이 죽기 전에 남긴 음악서였다.
- 궁, 상, 각, 치, 우. 이 다섯 가지 음(五音) 없이 어찌 감정을 전할 수 있겠는가?
- ……!
- 이는 열두 가지 음계로 이어지니. 가슴 아픈 사랑 노래인 연가도, 사내의 피를 끓게 만드는 진군가도 결국 다섯 음의 조화에서 나온다네.
‘극과 극은 통한다더니….’
놀랍게도 만수신의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 핵심은 열 개의 단전이 각각 품은 힘이 아닐세. 오히려 단전과 단전이 만나고 어우러지는 ‘조화’에 있다네.
만수신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제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단순히 무공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인생과 천하를 관통하는 깨달음이었다.
- 조화를 이루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니. 모두가 함께 어우러진다면, 얼마나 많은 것을 해낼 수 있겠는가?
지금은 만수신의조차 뾰족한 방법이 없을 터였다.
새싹이 성장하려면, 나무들이 하나가 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그런데 정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일까?’
싹이 트지 않은 밭들을 돌아보며, 지난 한 달을 떠올렸다.
관람석을 만들고, 천막을 세우고, 깃발을 만들고, 징표를 수놓았다.
혼자서는 결코 해낼 수 없는, 방대한 양이었다.
‘모두가 함께하니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이었어.’
두 사람이 모이면, 한 사람이 이틀 걸릴 일을 반나절도 안 돼서 해낼 수 있었다.
네 사람이 모이면, 한 사람이 열흘 걸릴 일을 하루도 안 돼서 끝낼 수 있었다.
어른뿐인가?
‘아니지. 그 아이들이 없었더라면….’
바늘에 손가락을 찔리면서도 끝내 옷을 수선해냈던 소화.
혼자 낑낑대더니 그럴듯한 조각을 해낸 박 씨네 손자.
엄마를 돕겠다며 옷감과 음식을 나르던 왕 씨네 아이들까지.
아이들 역시 큰 역할을 했다.
‘만약 무공 역시 이와 같다면?’
유운의 머릿속에서 환한 빛이 터졌다.
음악이 그러하다면, 인생이 그러하다면.
검술이라고 안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후흡. 호.
흐흡. 호.
유운이 눈을 감고 깊게 호흡했다.
유운의 기운이 대지 깊은 곳을 더듬었다.
‘있구나!’
싹이 튼 밭 두 곳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아무것도 없는 밭.
솨아아…!
창시자인 만수신의조차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그 땅에서, 약동하는 생명력이 느껴졌다.
새싹은커녕 아직 씨앗조차 되지 못한 아이들.
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녀석들이었다.
‘얘들아, 힘들겠지만 조금만 도와주지 않겠니?’
아직은 미약하다. 아직은 세상이 두렵다.
그래서 도망칠 줄만 알았는데….
톡.
물 한 방울이 흘러들어왔다.
톡톡.
그리고 두 방울.
토도도독….
그리고 셀 수 없는 물방울들이 기꺼운 마음으로 모여들었다.
유운은 그중 하나를 검 위에 덧씌워보았다.
‘미약하구나.’
하나하나는 보잘것없는 기운이었다.
심지어 개성조차 강해서, 서로를 밀어내기 일쑤였다.
‘당연하지.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자르니.’
천하 각지에서 뽑힌 악사(樂士)와 같았다.
고고한 자존심으로 뭉친 자들이니 서로 데면데면, 얼굴을 마주쳐도 획 돌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들을 이끄는 자가 있다면, 어우러지게 하는 자가 있다면?
‘열 가닥의 기운을 하나로 뭉친다면…!’
두 줄기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여덟 줄기를 새끼줄처럼 꼬았다.
태앵!
역시나 서로를 강하게 밀어냈다. 토라진 듯 돌아가려는 아이들도 있었다.
“억지로 하나의 소리를 내라는 말이 아니다. 너희는 지금 모습이 가장 아름답단다. 그러니 그 모습대로 같이 어울려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유운은 여덟 아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본래 조화무궁은 서로 다른 단전을 하나의 기운으로 묶는 방법.
하지만 유운은 달랐다.
‘서로 다를 뿐, 누가 틀린 것은 아니지.’
같은 목소리를 내는 열 명의 아이들보다,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열 명의 아이들이 더 멋진 노래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유운의 마음이 닿은 것일까.
뽀드득. 뽀드득.
기이익…. 쿵.
서로 다른 아이들이 얽히더니 각자의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서로 다른 음색으로, 그러나 하나의 노래를 불렀다. 마침내….
화아악!
한 줄기 찬란한 빛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들려오는 노래는….
‘아아! 천상에 온 것만 같구나.’
이 순간의 기쁨을 뭐라고 표현할까?
깨달음의 희열이 유운을 관통했다.
티이잉!
분명 하나하나는 가느다랗고, 약했다. 검강은커녕 검기에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함께하는 순간 달랐다.
서로가 함께 밀고, 함께 당기고, 함께 견디니.
마치 용의 힘줄처럼 단단하고, 질겼다.
차아아…차아아…!
검이 맑은 소리를 냈다.
이제껏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검명(劍鳴)이었다.
그리고 멈추었던 시간이 다시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