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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학사의 무공백과-41화 (93/114)

제41화

무공을 드러내다 (9)

재미 삼아 산 골동품이 알고 보니 명인의 작품이더라.

농기구가 남아서 녹여 무기를 만들었는데, 때마침 전쟁이 터지더라.

살다 보면 때때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다.

평생 한 번뿐인 대운(大運)이다. 실력이라 여기지 말고, 겸손함을 잊지 말거라.

경험 많은 상인일수록 제자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무림에서도 가끔 같은 일이 벌어진다.

급하게 내지른 검이 상대의 촘촘한 방어막을 뚫는다든지.

하수가 공격할 때, 하필이면 고수가 내디딘 땅이 무너진다든지.

초심자의 행운일 뿐이니, 누구도 실력이라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결은 달랐다.

살벌한 근접 박투.

천하에 이름난 도법.

심지어 강기까지 나왔으니.

“백전노장인 적 대협이 저렇게 무너지다니.”

“방심도, 운도 아니었어. 자네도 보지 않았나?”

“물론일세. 내 똑똑히 보았지.”

사람들은 흥분해서 얼굴을 붉힌 채 떠들었다.

“한 비무에서 이렇게 많은 정석과 변칙을 볼 줄이야. 새롭게 눈을 뜬 기분일세.”

“오랜 시간 싸우고, 모든 절기를 쏟아부었으니. 이것이 실력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말해 무엇하겠나.”

평소라면 ‘운이 좋았다’, ‘상대가 방심했다’라며 트집 잡을 사람이 한가득하였을 테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내가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았네!”

“아무렴, 이건 진짜지. 진짜고 말고!”

그 누구도 흠잡을 수 없는, 완벽한 승리였다.

쿠웅.

적인걸이 부러진 쌍도를 바닥에 던졌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허탈한 표정이었다.

“마치 발톱이 부러진 호랑이와 같았구나.”

“아무리 사나운 호랑이라도, 용을 이길 수는 없지.”

사람들의 시선은 오직 젊은 용, 유운으로 향했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정천수의 ‘승리 선언’만을 기다리던 때였다.

“정 모, 공증인으로서 먼저 사과 말씀부터 올리겠소.”

정천수가 관중을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깨끗한 비무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이 생겼으니. 먼저 이는 공증인의 책임이라 할 것이오.”

“……!”

뜻밖의 말에 관중석이 술렁였다.

“이 부덕함은 따로 질책을 받겠소. 그전에 먼저….”

정천수가 차가운 눈으로 적인걸을 노려보았다.

“무림의 도의를 저버린 자를 처벌해야 하오.”

정천수의 말에 곳곳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옳소!”

“역시 무림판관답구만. 잘못부터 바로잡아야지.”

“쯧쯧. 명가의 비무를 더럽히다니. 아무리 포장해도 천한 낭인 출신은 어쩔 수가 없구만.”

한 사람의 변심으로, 명예로운 비무가 목숨을 노리는 살인 대전이 될 뻔했으니.

모두의 분노가 한 사람에게 향했다.

“공증인으로서 판결을 내리겠소.”

정천수의 묵직한 말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부당한 방법으로 목숨을 해하려 하였으나, 다행히 유운 공자께서 다치지는 않으셨으니. 죄를 지은 두 팔 중 하나를 자르는 것으로 마무리할까 하오.”

“과연 시시비비로다.”

“저 정도가 딱 적절하지.”

자비롭기만 했다면 모두의 인정을 받았을 리 없다.

판관의 판결은 때로는 냉혹하니.

모두가 정천수의 판단에 동의했다.

“부정한 수로 목숨을 위협하였으니. 응당 공자께 복수의 권리가 있는 법!”

정천수는 유운을 바라보더니 슬쩍 검에 손을 올렸다.

“혹여 마음이 저어하신다면, 공증인인 정 모가 대신하도록 하겠소.”

“아니, 그럴 필요 없소. 내가 직접 하겠소.”

“……!”

적인걸이 담담하게 부러진 도를 들어 올렸다.

꿀꺽.

모두가 잔인한 광경을 상상하며 몸을 떨 때였다.

“잠시만 멈추어주십시오.”

비무의 주인공인 유운이었다.

“비무의 당사자로서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선언을 조금만 미루어주시겠습니까? 정 대협?”

“물론이오, 공자.”

정천수가 검을 거둬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여기서 왜?”

“굳이 손을 더럽히실 필요도 없는데. 승리 선언만 기다리시면 될 것을.”

관중들은 웅성거렸고, 적인걸은 체념한 듯 표정이 없었다.

“먼저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

“모두 같은 하늘에서 살아가야 할 동도입니다. 부모를 죽인 원수가 아닌 한에야 어찌 사람을 해하겠습니까?”

유운의 말에 가장 화난 목소리가 나온 곳은 관중석이 아니라 두루마리였다.

- 이놈아, 무슨 철없는 소리더냐! 잘못을 한 놈에게는 본때를 보여줘야지! 그리 물러서야 어찌 무림인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매화검선이 가슴을 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비무에 앞서 두루마리의 소리를 죽였으니, 전혀 닿지 못했다.

- 아니야. 이번에는 녀석의 판단이 옳다.

오히려 종남일패가 그를 말렸다.

- 무슨 말인가? 무림의 음험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네가 아닌가?

- 차라리 목숨을 거두겠다고 하면 찬성했을 것일세. 그러나 그게 아니지 않은가?

- ……!

- 아무리 겉으로 인정한다 해도,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네. 허전한 팔을 볼 때마다 원한을 되새길 터.

- 그, 그렇긴 하지. 사람 마음이 간사하니….

- 원한의 씨앗을 뿌리기는 쉽지만 거두기는 어렵네. 어설프게 원한을 사는 일은 피하는 것이 좋네.

누구보다 많은 원한을 겪어본 종남일패의 말이었다.

- 허허허. 자네에게 자비에 대해 듣는 날이 올 줄이야.

- 흠흠. 물론 나의 자비는 사실 계산일 따름이지.

종남일패가 머쓱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 그러나 자네도 알지 않나? 유운, 저 아이가 그런 계산으로 하는 말이 아님을.

- 그럴 아이가 아니지. 암, 그렇고말고.

- 그러니 들어보세. 저 속 깊은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두 신선이 말을 멈추고 유운의 입을 바라볼 때.

유운은 오히려 적인걸의 가슴팍을 보고 있었다.

‘귀여운 노리개로구나.’

살벌한 마수 목걸이 안쪽.

옥으로 만든 조그마한 노리개가 걸려있었다.

결코 다 큰 사내가 할만한 형태가 아니었다.

소화 또래, 혹은 그보다 어린 여자아이가 분명할 터였다.

‘아마도 딸이 주었겠지.’

섣부른 동정이라 오해할 수도 있다.

유운은 일부러 그 부분은 말을 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이 서촌의 주민으로서 여쭙고자 합니다. 정 대협, 목숨값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목숨을 노린 값은 목숨으로만 대신할 수 있소. 팔 하나는 매우 관대한 처분으로….”

“그렇기에 적 대협을 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적 대협의 가슴팍을 보십시오.”

“……!”

사람들 눈에 확 들어오는 건 노리개가 아니라, 붉은 늑대의 이빨로 만든 목걸이였다.

“마수 사냥꾼!”

“적 행수가 마수를 많이 잡기는 했지.”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 거지?”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할 때였다.

“네댓 해 전, 서촌의 북쪽 망우촌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유운의 말에 나이 든 노인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붉은 늑대 때문에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다지?”

“내 친구 놈도 그때 물려서 죽었어.”

“우리 마을까지 내려왔으면 어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구만.”

흘러나온 마수 한 마리에 수십 명이 죽어 나간 큰 사건이었다.

“그 마수를 누가 잡았습니까? 보기만 해도 두려운 마수들을 누가 막아왔습니까?

“…적랑대. 그리고 적 대협!”

그제야 적인걸의 목걸이가 달리 보였다.

“허허. 마수 한 마리에 사람 목숨 수십이라 하면… 대체 사람 목숨 몇을 살린 건가?”

“적 대협 혼자서 기백 명을 살린 것과 마찬가지겠구만.”

유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십여 년에 걸친 토벌에서 동료들 수십이 죽어 나갔으니. 우리는 적 대협과 적랑대에 목숨을 빚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허나 공자의 말에는 오해가 있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 대협?”

“잊으신 게 있나 본데. 적 행수도, 그의 부하들도 낭인이오. 돈을 받고 본분을 다했을 뿐이라는 뜻이지.”

정천수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결국 돈 때문에 한 일 아닌가?”

“낭인이 돈값을 한 것뿐이지.”

그러자 유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돈을 받으면, 목숨의 무게가 달라집니까?”

“……!”

“세상에 죽어도 되는 목숨 같은 건 없습니다.”

모두들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는 했다.

‘돈을 주었으니까.’

‘대가를 이미 치렀으니,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우리 책임은 아니야.’

마물을 베어 넘길 때, 산적을 토벌할 때.

처참하게 죽은 낭인을 보며 그렇게 죄책감을 덜어냈다.

“내 아들이 마물과 싸우고, 마을을 지키다 죽었다 생각해보십시오. 평생 잊을 수 있겠습니까?”

“……!”

“낭인은 칼이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그것도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건 사람이지요.”

돈이라는 면죄부를 걷어내자, 진실이 보였다.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가장 험한 곳에서 최선을 다한 분들입니다. 그러니.”

유운이 적인걸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늦었지만 감사드립니다.”

“……!”

“……!”

“……!”

싸움의 승자였고, 비겁한 살수의 피해자였다.

그런데 오히려 감사를 표하다니?

지켜보는 이들의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이, 이거. 뭔가. 뭔가….”

“그래. 무언가 미안하고, 고맙고, 존경스럽고….”

모두가 유운을 뜨거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적인걸이었다.

“처, 처음이구려.”

곰처럼 커다란 사내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우리를 칼이 아닌 사람으로 대해준 이는.”

“……!”

돈이 곧 인간의 가치였다.

“고작 달포 고생하는데 그 큰돈을 받는다고? 쌀 몇 가마니는 사고도 남을 텐데.”

“쳇. 칼질 몇 번 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돈 더 깎아야 하는 거 아니야?”

사람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가 아니라 ‘얼마’를 받았냐에만 관심을 두었다.

“열이 죽었다고? 그러면 두 당 열 냥씩, 백 냥을 더 쳐주마. 썩 꺼져라.”

가끔 칼이 부러져도, 돈값을 못 했다고 아쉬워할 뿐.

미안해하거나 감사해하지 않았다.

“에이 퉤. 돈 받고 칼질하는 천한 낭인의 자식이잖아? 감히 학당에 더러운 발을 들일 생각을 하다니.”

헐벗은 자식을 입히고,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삶이었다.

하지만 낭인이라고, 사내라고,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무시, 모욕, 경멸.

십수 년의 삶이, 죽음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처음 받은 ‘인정’과 ‘감사’.

적인걸도, 그리고 지켜보던 그의 부하들도 모두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한마디라도 하면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목숨값에 비하면, 비무의 원인은 그저 사소한 의견 차이에 불과합니다.”

“……!”

“무엇보다 적 대협은 죄 없는 양민을 해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협객전의 악당처럼 마을 사람을 해쳤다면, 유운도 참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적인걸은 결코 선을 넘지 않았다.

말로 시비를 걸고, 돈으로 방해한 적은 있어도 결코 사람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다.

“억지를 부려 만인 앞에서 망신을 주려고 했거늘. 죄 많은 적 모에게 어찌….”

적인걸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칼질에 더 큰 진심이 담기는 법.

한 시진도 안 되는 비무였으나 적인걸이 유운이라는 사내를, 유운이 적인걸이라는 사내를 알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뚝.

기어이 참아왔던 눈물이 터졌다.

단 한 방울.

그러나 한 사내의 인생이었고,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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