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42화 (94/114)

제42화

무공을 드러내다 (10)

“사내는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해 죽는다더니.”

적인걸이 하늘을 바라보고 탄식했다.

“평생 코웃음을 쳐왔던 말인데. 오늘에야 그 뜻을 알겠구나.”

쿠웅.

적인걸이 부러진 도를 짚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흑산병단 행수, 적랑대주, 그리고 적랑쌍도 적인걸! 모든 힘을 다해 백리세가의 유운 공자와 무를 겨루었고, 패배하였으니 어떠한 여한도 없소. 적 모의 목숨은 오로지 공자의 것이니, 앞으로 공자의 뜻에 따르겠소.”

“……!”

고작 비무에 졌다고 하기에는 과한 말.

그러나 굳건한 눈에서 진심을 읽을 수 있으니,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이만하면 서로의 모든 원(願)이 해결되었다 할 것입니다. 아닙니까, 정 대협?”

유운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실로 놀랍구려. 수많은 분쟁을 중재하였지만, 앙금이 이렇게 사라지는 모습은 처음 보았소!”

정천수는 감탄하며 유운의 얼굴을 보고 또 보았다.

이익은 절대 빼앗기지 않는다.

원한은 반드시 되갚는다.

나의 이익이 줄어들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상대를 해치는 경우조차 흔했다.

시골의 작은 문파나, 뒷골목 사파만 그러할까?

‘아니, 명문일수록 더하지.’

오히려 그랬기에 명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공개적으로 자신을 위협한 적에게 자비를 보이다니?

무림인이라면 어리석다며 비웃을 이야기였다.

그런데 정작 결과는 어떠한가?

‘저 승냥이 같은 사내가 스스로 무릎을 꿇을 줄이야.’

무림의 무서움과 비열함을 모두 겪고, 이겨낸 사내다.

죽으면 죽었지, 결코 굴복할 자가 아니었다.

“공자께서 꽉 막힌 이 늙은이에게 가르침을 베푸셨구려!”

정천수가 판결을 내리면, 사람들은 공정하다며 ‘인정’하고는 했다.

하지만 지금 적인걸의 태도는 다르다.

승복!

진정으로, 상대를 받아들였으니.

‘인정’보다 한 차원 더 높은 ‘화해’였다.

“과한 말씀이십니다, 정 대협.”

“아니오. 더 말해 무엇하겠소? 모두가 공자의 선의를 보았으니. 정 모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오.”

정천수는 관중을 향해 돌아서서, 내공을 담아서 말했다.

“모두 보셨을 것이오. 생사를 가르는 비무와 그 결과를.”

사람들은 숨도 안 쉬고 그의 입만을 바라보았다.

정천수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늘도 보고, 땅도 보고, 천하 무림이 함께 보았으니. 이 자리의 모든 분이 증인이 되어주시리라 믿소이다.”

“……!”

“공증인으로서 선언하오니. 오늘의 비무는…. 백리유운 공자의 승리요!”

정천수가 정식으로 유운의 승리를 선포하는 순간.

모든 관중은 참아왔던 환호성을 터트렸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유운 공자가 이겼다!”

“유운 공자 만세! 백리 세가 만세!”

“바로 우리 서촌의 공자님이라고, 우하하하!”

평원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었다.

사람들은 흥분해서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를 껴안았다.

기뻐하며 발을 구르는 이들 때문에 관람석이 흔들릴 정도였다.

“으하하하! 참으로 멋진 광경 아닌가?”

“이를 말인가. 내 아들, 손자에게 두고두고 이야기해줄 걸세.”

“그럼 그럼. 하늘에서 용이 내려온 날이지.”

“먼 길을 온 보람이 있어. 이것이야말로 진짜 무(武)지. 진짜 무림이지!”

무인들은 흥분을 참지 못하고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사나운 호랑이와 젊은 용의 싸움이라니. 이거 이야깃거리 좀 되겠어!”

“이거 고향 돌아가면 한 달은 공짜 술을 먹을 수 있겠구만. 하하하!”

모두가 유운의 승리를 자신의 승리처럼 기뻐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구나!’

백리순명은 유운을 보고 감탄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재질이 뛰어남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토록 젊은, 아니 어린 나이에 적인걸 같은 고수를 쓰러뜨리다니?

백리세가의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쾌거였다.

더욱 놀라운 점은 무공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유운 공자, 실로 대단하오! 그리 뛰어난 무공을 숨기고 계셨을 줄이야.”

“어찌 이게 저의 힘이겠습니까? 서촌의 모든 분과 호각대의 무인들이 도와주신 덕분이지요.”

참지 못한 몇몇이 비무대 위에 올라서 추켜세웠지만.

유운은 그저 빙그레 웃으며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지켜보던 관중들이 더욱 환호했다.

“역시 유운 공자야.”

“다른 명가의 자손과는 완전히 달라.”

“아무렴. 혼자 컸다고 잘난 척하는 그 치들과는 비교할 수 없지.”

“으하하! 유운 공자는 우리 서촌이 낳은, 서촌의 자랑이라고!”

모두가 제 일처럼 기뻐했다.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구나!’

백리순명은 속으로 깊은 탄식을 토했다.

백성들이 백리의 이름에 환호했던 게 언제였던가?

위아래 모두가 함께 기뻐했던 게 언제였던가?

‘존중받았으나 존경받지는 못하였지.’

힘 있는 강자로서 예우를 받았으나, 진심으로 우러러보는 자는 드물었다.

그러나 유운은 달랐다.

의(義) 그리고 협(俠).

오랫동안 잊고 있던, 믿고 있지 않은 이야기를 직접 보여주었다.

‘잘 컸구나, 참으로 잘 컸어.’

백리순명은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자신의 행적은 물론 세가의 방침까지 되돌아보았다.

‘저리 훌륭한 아이에게, 못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니. 우리가 참으로 잘못하였구나.’

백리순명은 홀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 * *

“끼아아악! 이겼어요, 이겼어! 유운 공자가 이겼어요!”

서문요란이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봤죠? 동 호위도 모두 봤죠?”

“그럼요, 소가주님. 시작도 끝도 아름다운 비무였습니다.”

동평 역시 흥분해서 얼굴을 붉혔다.

모든 수법을 쏟아낸 수준 높은 비무였으며, 생사가 오갈 뻔한 치열한 비무였다.

무엇보다 사내의 가슴을 울리는 비무였다.

“제가 직접 찾아낸 사람이라고요. 제가 처음으로 찍은 사람이고요.”

서문요란은 뿌듯한 얼굴로 가슴을 폈다.

쉴 새 없이 비무대 위의 유운을 향해 말을 걸었다.

‘내 투자 대상 1호, 참 잘했어요’라는 둥, ‘당신의 승리가 곧 우리의 승리! 잊지 말아요!’라는 둥.

혼자서 신이 나서 떠들었다.

‘이제야 제 나이로 보이시는구나.’

동평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가문을 짊어진 소가주다.

누가 볼세라 표정은 차가웠고, 누가 엿들을세라 말은 조심스러웠다.

이토록 홀가분한 얼굴의 서문요란은 처음 보았다.

‘변장 덕분일까. 아니지. 그럴 리가.’

복장이 아닌 사람 때문임을 왜 모르겠는가.

‘잘하십시오, 유운 공자!’

동평은 기분 좋게 웃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어쩌면 지금, 작은 씨앗이 뿌려졌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 으하하하! 이겼구나, 이겼어! 역시 내 제자로구나!

- 무슨 소리냐, 내가 잘 키운 덕분이지.

- 크흠. 내가 아니었으면 저 비정한 놈의 손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겠느냐?

- 끄응. 뭐 작은 도움이 되었기는 한데….

두루마리 너머.

아웅다웅하는 매화검선과 종남일패의 얼굴에도 함지박만 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 고이 키운 아들이 첫 무림행을 마치고 돌아온 기분이로구나.

종남일패는 감정이 북돋웠는지 눈시울까지 붉어졌다.

매화검선이 ‘이때다’ 싶어 히죽 웃었다.

- 여자 손도 잡아보지도 못한 녀석이 아들은 무슨.

- 자네가 봤나? 봤냐고!

- 그걸 꼭 봐야만 아나? 동경을 보면 누구나 짐작을….

- 으아아! 네 이놈! 그 잘난 상판대기 내가 망가뜨려 주마!

- 할 수 있으면 해보든가, 껄껄껄.

그렇게 쫓고 쫓기면서도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참으로 장하십니다, 공자.”

장노는 눈물을 글썽였다.

무시당하던 본가에서의 나날들.

걱정하며 잠든 만서각에서의 첫날 밤을 떠올렸다.

“에헴.”

옆에 있던 소화가 짐짓 헛기침했다.

“허허허, 소화야. 너도 참으로 고생이 많았다.”

장노가 인자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저 혼자만 고생한 게 아닌걸요.”

소화의 의젓한 대답에, 두루마리 속 두 신선이 같이 웃었다.

- 첫날, 조그마한 녀석의 도움이 컸다면서?

- 저 아이가 아니었으면, 유운이와 못 만났을 수도 있지.

이 땅의 누구도 몰랐지만, 소화야말로 가장 큰 공신이었다.

“가봐야 하지 않겠느냐?”

비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유운이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였다.

“유운 공자님 최고!”

“공자님 만세! 서촌 만세!”

흥분한 마을 사내들이 다 같이 헹가래를 치는 모습이 보였다.

“이럴 때일수록 손님부터 챙겨야지요.”

“허허허. 네 말이 맞구나.”

누구보다 방방 뛰며 신나 할 줄 알았는데.

장노도, 두루마리 속의 두 신선도 내심 놀랐다.

“뭘요. 겨우 비무 한 번 한 것일 뿐인데요.”

소화가 중얼거리며 흐트러진 관중석을 정리했다.

“후후. 별거 아니에요.”

뜻밖의 태도에 두 신선이 깊이 감탄했다.

- 저 꼬마가 저리 속이 깊은 줄 오늘에야 알았구나.

- 그러게. 다시 보았어, 저 꼬맹이.

모두가 흥분한 사이, 홀로 손발을 분주히 움직이며 뒷정리를 했다.

표정은 어찌나 침착한지, 덕이 깊은 승려처럼 인자한 미소로 가득했다.

그러나 어깨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후후후.”

“……?”

“후후후.”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후후후.”

“……!”

“후후후.”

사람을 하나 만날 때마다.

천막 하나를 건널 때마다.

어깨가 점점 더 올라갔다.

- 껄껄껄. 역시 그렇지. 속마음을 어찌 숨기겠느냐!

- 저 녀석 어깨 좀 보게.

- 으하하! 구름 위로 떠 오를 모양새가 아닌가?

소화의 어깨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한껏 올라갔다.

이제는 보는 사람마다 피식 웃을 정도였다.

“하하하, 이 녀석. 고생 많았다.”

“모두 네 덕분이야.”

“히히. 아니에요.”

소화의 웃음을 보고 함께 기뻐하고, 소화가 일하는 것을 보고 함께 도왔다.

그럴수록 소화는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 그간 깨달음을 얻어 구름 위로 오르는 광경은 종종 보았는데.

- 우화등선 말인가?

신선이 되어 하늘 위로 올라감을 뜻했다.

- 그래, 그런데?

- 꼬맹이의 어깨가 구름까지 닿을 정도이니. 내 우화등선은 많이 보았으나 어깨등선은 처음 보는구먼.

- 어깨등선이라! 으하하하! 그것참 그럴싸하구만.

- 그렇지? 껄껄껄!

두 신선은 서로 마주 보고 한껏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