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무공을 드러내다 (11)
“사람의 바다라. 듣기만 했지 눈으로 본 것은 처음입니다, 소가주님.”
“공자야말로 이번 비무의 주인공이니까요.”
와글와글.
사람들이 꿀을 쫓는 벌처럼 까맣게 달라붙었다.
유운의 머리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가보지 않으셔도 됩니까?”
“자주 보면 오히려 귀한 줄 모르니까요.”
서문요란이 도도한 얼굴로 말하더니, 곧바로 부드럽게 웃었다.
“물론 유운 공자가 그런 분은 아니지만요.”
“하긴. 눈도장을 찍는 단계는 오래전에 지났지요.”
“그래요. 이제야 본격적으로 시작된 느낌이에요.”
커다란 재물뿐 아니라, 힘들게 쌓아 올린 명성과 평판을 걸었다.
그리고 그녀의 도박은 멋지게 성공했다.
유운이 대기실로 들어가는 모습까지 보고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저분은 백리수호검 아니십니까? 말 나온다고 비무 전까지 따로 얼굴을 비추지 않으셨던 분이거늘….”
동평의 말에 서문요란이 눈을 빛냈다.
“하필이면 이때? 뭔가 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백리세가의 제일 어른이 아닌가?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한번 가서 들어볼까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여기 온 것을 알리지도 않으셨는데.”
“정체를 숨겼으니 괜찮아요. 저인 줄은 까맣게 모를 테니까요.”
“그, 그렇지요. 하하하. 꿈에도 모를 겁니다.”
동평은 식은땀을 흘리며 억지로 웃었다.
“운아, 축하한다. 참으로 고생이 많았겠구나.”
백리순명이 부드럽게 웃으며 유운의 어깨를 두들겼다.
단순히 승리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손님을 맞이하는 일이며, 공증인을 초대하는 일까지.
공개 비무라는 커다란 행사를 멋지게 치렀다.
“어찌 저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었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유운은 빙그레 웃었다.
“그래. 나도 보았다. 마을 사람 모두가 제 일인 것처럼 돕더구나. 짧지 않은 시간을 무림에서 보냈으나, 이런 광경은 나도 처음이로구나.”
백리순명이 흐뭇하게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네가 진정한 백리의 정신을 일깨웠구나.”
“과찬의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특별한 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감히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특별한 도움이라?”
유운은 슬쩍 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한결같은 변장이로구나.’
콧수염도, 빰의 점도, 사내의 옷도 모두 어색했다.
‘누가 봐도 서문 소저이거늘.’
신경 안 쓰는 척하면서 계속 이곳을 살피니.
먼저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운은 빙그레 웃더니,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서문 소저의 도움이 누구보다 컸습니다.”
“서문세가의 금지옥엽께서 말이냐?”
백리순명은 뜻밖의 이름에 깜짝 놀랐다.
“호오라. 그랬구나.”
“흑산조가를 상대하려면 서문세가 정도는 되어야지.”
“그래서 정 대협도 부를 수 있었던 거로구만.”
“유운 공자가 하늘로 날아오를지 어찌 알고 손을 썼단 말인가?”
“소문 못 들었나? 서문세가에는 앞날을 내다보는 게 황금손이 있다네.”
“그게 서문 소저란 말인가? 자세히 말해보게.”
사람들은 서문요란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들썩거렸다.
“후후후. 참 잘했어요. 계속 그렇게 하세요.”
“소, 소가주. 들키겠습니다.”
서문요란이 어찌나 흡족하게 웃는지, 동평은 그 모습을 가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거기에 인연이 닿은 상인들까지 나서서 도와주셨으니. 덕분에 큰 탈 없이 행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모두 소중한 인연들이다.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보답하도록 하여라.”
“물론입니다, 작은할아버지.”
두 노소가 나누는 따듯한 이야기에, 주변 사람들도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무엇보다 너의 성취가 참으로 놀랍구나.”
백리순명이 슬쩍 말을 던졌다.
“무공을 수련할만한 상황이 아니었을 텐데.”
핍박받으면서 몰래 수련했다? 쉽지는 않지만 가능하다.
하지만 수준 높은 무공은 결코 책으로만 배울 수 없다.
‘설마 가주께서 겉으로만 중립을 말씀하시고, 몰래 손을 쓰신 것이 아니더냐?’
백리순명은 간접적으로 그렇고 묻고 있었다.
“가문 밖으로 나와 새로운 인연과 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그분들 덕에 작은 성취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
유운은 결코 본가의 힘이 아님을 돌려서 대답했다.
“선재로다, 선재야!”
‘실로 좋다, 네가 옳다’는 불문의 용어가 절로 나왔다.
가주와 유운을 의심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럼 마지막 무공도 그분들께 사사하였느냐?
무림은 넓고도 깊었다.
백리순명이 모르는 은거기인이 있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강기는 강기로만 막을 수 있다!
무림의 상식을 깨는, 놀라운 무공도 어쩌면 가능하리라.
“그분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부족하나마 스스로 만들어보았습니다.”
“허허허…. 네가 직접? 선재야, 선재!”
백리순명은 눈을 지그시 감고 연신 감탄했다.
“그럼 그 무공의 이름은 무엇이더냐?”
무림의 역사에 기록될지도 모르는 이름이었다.
“하늘의 도움으로, 인연이 닿은 분들께 배우고 익혔습니다. 무공의 본질 또한 혼자가 아니라 함께함에 있으니….”
유운이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검연(劍緣)이라 할까 합니다.”
“검연이라!”
백리순명은 그 단어를 향기로운 술처럼 입에 머금었다.
“울림도 좋고 뜻도 좋구나.”
유운이 하지 않은 말까지 알아챌 수 있었다.
한 다발로 묶은 나뭇가지처럼 함께 한다는 뜻이니.
함께 견디고, 함께 싸우니. 결국 함께 이길 수밖에 없었다.
“너야말로 시조께서 말씀하시던 진짜 백리의 후손이로구나.”
백리순명은 깊은 여운에서 깨어나 탄식했다.
허리춤을 풀더니, 탁자 위에 검집을 올렸다.
스르릉.
백리순명이 검을 뽑자, 서늘한 예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저, 저건 노사의 애검이 아닌가?”
“담로검!”
“천하백대보검!”
검날은 은은하고 검푸르니,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을 벼려 만들었고.
검자루는 귀한 영물의 가죽으로 감쌌으니,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흠집조차 없었다.
“비무에서 쓴 검을 보니, 수련용 검에 불과하더구나.”
“……!”
“이제 너도 무인이니 너만의 검이 있어야 할 터. 이 녀석 정도면 평생을 함께할 친구로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백리순명의 말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대의 명인이 만든, 몇 자루 남지 않은 명검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이럴 수가! 노사께서 직접 검을 내리시다니.”
“맙소사, 엄청난 일이 벌어졌어!”
“후계전이 끝날 때까지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을 것이다.”
백리순명이 엄숙한 표정으로 했던 말이었다.
절대 중립 선언!
그랬기에 그를 포섭하려는 시도조차 없었는데.
모두가 보는 앞에서 검을 내렸다.
“무슨 뜻인지 모르실 분도 아니시거늘.”
“그만큼 유운 공자를 아끼시는 게지. 본인의 말을 뒤집을 만큼 말이야.”
“이거 본가에서 알면 모두가 난리가 나겠구만.”
본가 호위 무사나 종가 무인, 모두가 흥분해서 입을 놀렸다.
‘유운 공자는 언제나 저를 놀라게 하시는군요!’
서문요란이 환하게 미소 짓더니, 곧 표정을 지웠다.
“이만 돌아가요, 동 호위.”
“벌써 말입니까?”
“해야 할 일이 많아요.”
“……!”
동평의 눈앞에 있는 이는 들뜬 여인이 아니라, 차갑고 야망 넘치는 소가주였다.
“말씀을 받들겠습니다!”
동평은 흥분한 얼굴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새바람이 부는구나, 새바람이!’
서촌에서 부는 작은 바람이 어디까지 커질지.
동평은 잔뜩 기대되었다.
* * *
“으드득. 날 찾지 마라.”
“…….”
백리오혁이 입술을 씹으며 말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이, 이놈들!”
분명 올 때는 그와 함께였거늘.
지금은 모두 유운 옆에 바싹 달라붙어 있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백리순명이었다.
‘다,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로구나!’
비무가 시작되기 전에는 잠든 호랑이였다.
무섭긴 했지만, 코털을 건드리지 않는 이상 성을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사람들만 물러가면, 자신을 붙잡고 단단히 혼쭐을 낼 모양새였다.
“그,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마. 그리 전하여라.”
백리오혁은 호위를 억지로 붙잡고서 말을 남겼다.
그리고 도망치듯 떠났다.
“흐음. 변수로구나. 큰 변수.”
“유운 공자가 그 정도입니까, 소가주님?”
청해오가의 무인들은 깜짝 놀랐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내가 그리 말할 정도라니.
“아직은 땅에 머물고 있으나. 때가 되면 바람과 비를 타고 하늘로 오를 자다.”
“……!”
보기 드문 극찬에 오가의 사내들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유운을 바라보았다.
“가자. 우리 역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물론입니다, 소가주님.”
“오가가 백리에게 질 수는 없지요.”
어떤 어려움도, 어떤 도전도 이 사내만 있다면 이겨낼 수 있으리라.
푸른 눈의 사내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풀잎 위로 몸을 날렸다.
청해의 무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으하하하! 내 이럴 줄 알았어. 유운 공자가 해내실 줄 알았다고!”
“그럼, 그럼. 아까 비무 보았지? 저기 저 돌을 보게. 두 사람의 싸움에서 튕겨 나온 건데….”
다른 세가의 사람들은 쉽사리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반쯤 무너진 비무대도 나름 운치 있구먼.”
“그러게. 마치 협객전 속에 나오는 결전 장소 같지 않은가?”
“무슨 역사의 현장 속에 있는 기분이구만.”
“아무렴. 강기와…그 이름 모를 무공. 새로운 무공이 모습을 드러낸 곳이 아닌가?”
사람들의 발길을 잡은 것은 ‘무공’이 아니라 ‘이야기’였다.
두 무인의 치열한 싸움, 죽음의 위기, 그리고 깨끗한 승복!
무인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까 광경을 떠올리니 후끈 달아오르는구만.”
“자네도 그런가? 이럴 게 아니라 술이라도 하면서 더 이야기하세.”
“좋지, 좋아. 이것도 인연인데.”
백리세가의 종가는 물론, 천하 각지에서 온 무인들로 가득하니.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갔다.
“행사가 끝났으니 떠나 하는데. 어쩐지 발이 떨어지지 않는구만.”
“나도 그렇네.”
“조금만 더 있다 갈까?”
“그, 그럴까?”
무인들은 미적거리며 서촌을 떠나지 않았다.
주루에는 매일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공자께서 만서각주로 부임하신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모든 책을 다 외우시니, 내가 어찌나 놀랐는지 모를걸세. 어느 날 서문세가의 소저와 본가의 오혁 공자가 나타났는데 말이야…. 크흠.”
과묵한 장노조차 불콰한 얼굴로 수다를 떨 정도였다.
“장 노야, 조금만 더 이야기해주십시오.”
“유운 공자님이 어떻게 했는데요?”
“더! 더 이야기해주시오!”
모두가 유운에 관해 하나라도 더 듣기를 원했다.
서촌 전체가 떠들썩하고 흥겨웠다.
“한 잔만 더 하세. 아니, 하루만 더.”
“그래, 인생 뭐 있어? 조금만 더 이야기하고 가지 뭐.”
“각박한 곳에서만 살다가 여기 오니 마음 편하고 좋구만.”
술이 오가고, 입이 열리고, 마음이 이어지니.
밤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