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44화 (96/114)

제44화

무공을 드러내다 (12)

“마을이 생긴 이래, 이보다 기쁜 날은 없었습니다. 하나뿐인 주루의 주인으로서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 설마?”

“허리띠 풀고 마음껏 드십시오. 오늘은 모두 제가 사겠습니다!”

서가진미의 주인, 왕포삼이 호탕하게 외쳤다.

“으하하하! 사내로구나, 사내야!”

“껄껄껄. 주인장, 그 말 책임질 수 있겠소?”

“우리가 좀 많이 먹는 편인데 말이야.”

호각대의 남방인들이 배를 두들기며 말했다.

“오늘 공짜로 먹은 만큼, 다음에 돈 내고 많이 드셔주시면 되지요.”

“주인장, 거 장사 좀 할 줄 아는구만, 으하하!”

“좋지, 좋아. 오늘도 먹고, 다음에도 먹어주지!”

구릿빛 피부의 사내들이 여기저기서 술잔을 들어 올리니.

주루는 금방 떠들썩해졌다.

“본가의 귀빈을 대접하듯, 정성껏 대접해주세요.”

서문세가의 소가주께서 지시하신 일이다.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미리 준비한 음식 재료만 해도 한 수레가 넘었다.

“오늘 제 요리 솜씨, 제대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주인 왕포삼이 바삐 요리를 날랐다.

“이건 닭을 기름에 튀긴 후, 소금 간을 한 특별 요리입니다. 맛보십시오.”

“오오. 바삭바삭하니 맛이 좋구만!”

“이건 남해에서만 나는 왕새우를 익힌 후, 고추기름을 바른 것인데….”

“후르릅. 허어. 이런 맛은 또 처음이야.”

오리, 돼지, 소는 물론 내륙에서는 쉽게 구하기 힘든 해산물까지.

탁자마다 요리가 푸짐하게 차려졌다.

“캬아! 술맛 참 좋구나!”

“맛이 어딘가 색다른걸? 평범한 황주(黃酒)인 줄 알았는데. 훨씬 향이 깊고 그윽해.”

“차이를 아시는군요. 황주를 오랫동안 숙성시켜서 만드니. 북방에서는 노주(老酒)라고 부릅니다.”

“오늘 입이 호강하는구나. 모두 주인장과 유운 공자님 덕분일세.”

“아무렴, 각주님 덕분이지.”

호각대원과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유운에게 향했다.

“각주님께서 멋지게 이기셨으니, 오늘의 술은 모두 백리주(百里酒) 아니겠나?

”으하하! 백리주라. 맞아. 유운 공자님보다 더 좋은 술은 없지.“

“유운 공자님만 보아도 취하는 기분일세.”

“호호호. 오늘이 우리 마을의 잔칫날이네요. 매일이 오늘 같으면 좋겠어요.”

수염이 숭숭 난 사내들도, 햇볕에 그을린 아낙네들도 모두 술잔을 들어 올렸다.

“유운 공자님을 위하여!”

“위하여!”

모두가 함께 즐겁게 웃고 떠드니.

배도, 마음도 모두 포근한 시간이었다.

“겨우 저 하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유운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다.

그럼에도 제 일처럼 기뻐하니.

가슴 한구석이 뜨겁고, 간질간질했다.

“공자님이 그렇게 잘 싸우실 줄 몰랐네요, 호호호.”

“그러게요. 책만 읽으시는 줄 알았는데 언제 수련까지 하셨담?”

“저희 술도 한 잔 받으세요.”

농부의 아내들이 거리낌 없이 다가와서 술을 올렸다.

유운은 사양하지 않고 쭈욱 들이켰다.

“각주께서 저렇게 잘 드시는 분인 줄 몰랐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호각대주 거암과 호각대원들이 다투어 술을 권했다.

“으하하! 백리오혁 공자의 꼴을 보셨소?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더이다.”

“유운 공자의 무위가 그리 높을 줄 누가 알았겠소.”

“검술의 경지가 높고 깊었으니. 홀로 수련하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을지 안 봐도 선합니다.”

설영이 그답지 않게 눈시울을 붉혔다.

“어찌 저 혼자 수련했다고 하십니까? 함께하지 않았습니까?”

유운이 빙그레 웃으며 술잔을 권했다.

“주, 주군.”

“빈말이 아닙니다. 함께 연구하고, 함께 수련했으니, 함께 이긴 것입니다. 모두 호각대원분들과 서촌의 어르신들 덕분입니다.”

“크흑.”

“고, 공자님!”

명가의 자제일수록 내가 열심히 수련했기 때문에, 혹은 가문의 도움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유운은 함께한 사람들에게 모든 공을 돌렸다.

사람들의 가슴이 절로 벅차올랐다.

“크으으. 참을 수가 없네, 참을 수가!”

“나도 그렇네. 자 모두들 들게!”

모두가 술잔을 들어 올렸다.

“한마디 해주시지요, 주군.”

“제가 어찌 감히….”

“겉으로도, 속으로도 서촌의 대표는 주군이십니다. 그러니 하시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해주십시오.”

설영이 정중하게 다시 권했다.

“함께해서 좋았습니다. 이 인연이 앞으로도 영원했으면 좋겠습니다.”

“……!”

“……!”

“……!”

짧은 말, 그러나 진심이 가득한 말이었다.

“각주님 말씀 들었지? 영원히 함께하려면 뭐다?”

“술!”

“술이야말로 인연을 묶어주는 실이지요, 껄껄껄!”

이야기가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걸까.

유운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럼에도 이 분위기가 참 좋았다.

“그렇지. 내 새끼들. 하하하. 자, 다 같이 마시자!”

“마시자!”

거암이 커다란 대접을 들어 올렸다.

남방인들이 껄껄 웃으며 뒤를 따랐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술자리가 이어졌다.

“작작 좀 마셔요.”

“모처럼 공짜인데, 한 잔만 더 하면…”

짜악!

“아악! 살살, 살살!”

적당히 취한 농부들은 아내에게 등짝을 얻어맞고 집으로 향했다.

“껄껄껄. 이 좋은 술을 놓고 가다니.”

“오늘 죽도록 마셔보자. 들어…. 들어야….”

쿠웅, 쿠웅.

하나둘, 술에 취한 사내들이 엎어졌다.

멀쩡히 서 있는 이는 오직 유운 뿐이었다.

“휴우, 오늘은 어쩔 수 없군.”

대부분 호각대의 무인들이었지만, 뜻밖에 장노도 있었다.

“어지간히 기분이 좋으셨나 보구나.”

장노와 평생을 함께했는데, 그렇게 말이 많은 모습은 처음 보았다.

“우리 공자님이 말이야, 어렸을 때 얼마나 귀여우셨는지 자네들은 모를걸세.”

“어머. 저리 엄숙하신 공자께서요?”

“자세히 들려주세요, 영감님.”

“그때만 해도 애 늙은이가 아니셨지. 간식을 먹을 때면 입을 다람쥐처럼 모으고, 눈은 토끼처럼 뜨는데….”

“꺄악. 귀여워!”

장노는 들뜬 얼굴로 어린 유운이 벌인 모험을 하나하나 이야기했다.

처음으로 혼자 걸은 날. 처음으로 글자를 깨우친 날. 처음으로 학당에 간 날.

그 모든 순간을 함께하였으니.

장노는 유운에게 아버지와 같았다.

‘휴우. 다행히 이불에 오줌싼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으셨구나.’

유운은 빙그레 웃으며 장노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주루에서 잠든 이는 그뿐이 아니었다.

“히히히! 내가 누구? 에헴! 만서각 제일 미녀 소화지요!”

“우리 공자님의 간식과 옷과 청소는 누가 책임진다? 히히, 모두 소화가 하지요.”

“우리 공자님이 몰래 이야기해주셨어요. 모든 인연은 소화 덕분에 시작되었다고요. 안 믿긴다고요? 히잉. 진짠데.”

술을 먹지도 않았는데, 술에 취한 듯 해롱거리던 모습을 떠올렸다.

“녀석. 너는 제대로 된 곳에서 자야지.”

유운은 소화를 업고 만서각으로 향했다.

밤하늘에는 별이 빛났고, 바람은 적당히 따듯했다.

터벅, 터벅.

혼자 걷는 길이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처음 뵐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유운이 감회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 그래, 나 역시 그렇다. 인연이라는 게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두루마리 속.

매화검선이 흐뭇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두 분 스승님 덕분입니다.”

- 아니다, 네가 잘 따라온 덕분이지.

- 으하하! 그럼, 그럼. 모두 스승의 덕분이지. 이 은혜는 뼈에 새겨서 영원히 잊지 말도록 하여라!

종남일패가 호탕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 아니, 자네. 이렇게 분위기를 망칠 건가?

- 사람이, 아니 신선이 솔직해야지. 좀 칭찬도 받고, 감사도 받고. 그래야 제자 키운 보람이 있지 않은가?

- 에잉. 체통 없게 뭐 하는 짓인지.

- 체통이 밥 먹여주나? 그러니 여태껏 하선고에게 말도 제대로 못 걸고….

- 그, 그 입 다물라!

매화검선이 황급하게 호통을 쳤다.

한적한 시골길이지만, 두 신선이 시끌벅적하게 떠드니.

“하하하!”

유운은 걷는 길이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제가 적 대협을 이겼다니. 솔직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스승님.”

- 생각보다 더 만만치 않은 상대였지. 참으로 잘하였다.

- 천하를 오시했던 우리 둘의 제자다. 나는 네가 이길 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 끌끌. 어째 한 마디의 겸손도 모르누.

- 겸손이 밥 먹여주나?

- 하여간 지질 않아.

- 우리 제자가 이겼으면 됐지. 안 그런가?

- 허허허. 그렇긴 하지.

두 신선 모두 유운을 보면서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정말 이겼구나!’

스승의 인정을 받으니. 이제야 실감이 났다.

“기분이 이상합니다.”

유운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유운 공자가 이겼다!”

“와아아아아!”

“백리유운! 백리유운!”

태어나서 그토록 많은 사람의 응원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장면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 그래. 승리란 그런 것이다. 참으로 달콤하고, 설레고 기쁜 것이지.

매화검선이 너그럽게 웃으면서 수염을 쓰다듬었다.

- 흐흐흐. 이 말만은 매검의 말이 맞다. 승리는 언제나 좋은 것이다. 무림에서 이보다 더 확실한 진리는 없다.

“승리란, 이토록 좋은 것이로군요.”

평원을 가득 메웠던 환호성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뜨거운 열기가 가슴 속에 낙인처럼 새겨졌다.

“아직도 가슴이 뜁니다.”

승리의 여운은 술보다 달콤했고, 꽃보다 아름다웠다.

- 그래. 그것이 무(武)가 주는 진정한 즐거움이니. 너도 이제 무인이 다 되었구나.

매화검선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앳된 소년이, 어른이 되고 무인이 되는 모습을 보니.

친아들을 키우는 것처럼 뿌듯했다.

- 하지만 반대도 잊지 마라. 패배는 쓰고도 고통스러우니. 어지간하면 맛보지 않는 게 좋다.

“……!”

종남일패가 덧붙였다.

- 그러니 항상 승리를 갈구하라. 승리만을 좇아라. 그것이 너 자신과, 너의 인연을 지키는 길이니.

회한이 담긴 목소리에, 유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가야 할 길이 머니까요.”

유운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결코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있다.

하지만 검의 길을 걷고 또 걷다 보면, 언젠가는 닿지 않을까?

- 너의 무공 또한 이제부터가 시작이지 않더냐.

두 신선은 유운이 보여준 가능성을 잊지 않았다.

이토록 어린 나이 새로운 무공을 만든 자가 누가 있겠는가?

- 기대하고 있으마.

- 아무렴. 누구의 제자인데.

- 하여튼 끝까지. 쯧쯧.

- 자네 마음은 안 그런가? 좀 솔직해져 보게.

- 커험. 뭐…. 좋지.

- 제대로 말하게, 제대로.

- 유운이 내 제자여서 정말 좋다! 되었는가?

- 으하하하! 그거지, 그거야!

매화검선이 얼굴을 붉히면서 말하자, 종남일패가 배를 잡고 웃었다.

“저도 두 분이 스승이어서 정말 좋습니다.”

유운은 부드럽게 웃으며 가슴팍을 매만졌다.

‘작은 두루마리에서 시작된 인연이 여기까지 이어질 줄이야.’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궁금했다.

그날 밤, 유운은 설렘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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