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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학사의 무공백과-45화 (97/114)

제45화

서촌에 부는 바람 (1)

째잭째잭.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새벽.

유운은 일찍 일어나 산책에 나섰다.

“상쾌하구나.”

주는 술을 거절하지 않았으니 누구보다 많이 마셨고, 잠조차 거의 자지 못했다.

그럼에도 몸은 가뿐하고, 머리는 맑았다.

‘허어. 아무리 무공이라고 하여도 놀랍구나!’

유운은 영특한 머리로 곧 이유를 깨달았다.

조화무궁선법!

한 개의 단전만 잘 가꾸어도 생명이 품은 원기, 즉 정력(精力)이 좋아진다.

그런데 무려 열 개의 단전이 돌아가며 생명력을 공급하니, 피곤할 리가 없었다.

물론 여덟 개의 단전은 아직 싹이 트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씨앗이 영글어 자리를 잡았으니.

적당한 계기만 주어진다면, 싱그러운 싹을 틔울 것이 분명했다.

휘이잉……!

시원한 바람을 타고 풀과 흙의 냄새가 느껴졌다.

‘싱그럽고, 향기롭구나.’

감각이 놀랍도록 선명했다.

이슬을 머금은 풀의 기운, 꿈틀거리며 싹을 틔우는 꽃의 기운까지 느껴졌다.

“하나의 밭을 갈고, 물을 주고, 싹을 틔우는 단계. 이를 일컬어 조화무궁의 일성(一成)이라 한다네.”

만수신의는 자부심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밭은 황금빛 옥토로 가득하고, 평원처럼 드넓으니, 어찌 평범하고 조그마한 돌밭과 비교할 수 있겠나? 밭 하나만 잘 일구어도 검기를 뿜어내고도 남으니. 어지간한 일류고수와 맞상대하고도 남을 것일세.”

‘첫걸음부터 일류고수를 논하다니.’

상승 무공을 고되게 익혀야 겨우 도달하는 경지가 일류고수였는데.

조화무궁선법에서 일류고수는 겨우 출발점에 불과했다.

“두 개의 밭에 싹을 틔우면 이제 두 번째 단계에 왔다 할 수 있네. 허나 싹을 틔웠다 하여 방심하지 말게. 태생이 다른 녀석들이라 서로를 밀어내기 일쑤니. 둘 사이에 길을 놓고, 서로 교통하도록 해야만 진정한 이성(二成)을 이루었다 할 것일세.”

‘둘이 통해야 진정한 이성이라.’

유운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내부를 관조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열 개의 단전은 각자의 삶을 살던 아이들과 같았다.

같은 부모를 둔 핏줄이었으나, 서로 데면데면하니 남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함께 큰일을 치르며, 함께 고생하고, 함께 대화하니.

처음으로 서로에게 향하는 길이 열렸다.

‘그럼 이 경지는 뭐라고 불러야 하려나.’

이미 열 개의 밭이 서로 한 몸처럼 통하고 있었다.

그것도 각자의 개성을 유지한 채로.

만수신의조차 예상하지 못한 변화, 아니 진화였다.

“진정한 이성을 이루는 순간, 하나 된 단전이 몸을 보(保)하고 육(育)하리니. 강기를 뿜어내는 고수에게도 능히 밀리지 않을 것일세.”

두 개의 단전에서 하나 된 검기를 뿜어내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질도 좋고, 양도 많을 수밖에.

그랬기에 ‘강기를 상대로 밀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실로 정확했다.

적어도 낮은 단계의 조화무궁선법은 그러했다.

하지만 유운은 아예 다른 길을 택했다.

‘서로 다른 것 역시 순리이거늘. 억지로 하나로 만들어야 하는가?’

무림인이 들으면 코웃음 칠 생각이었다.

서로 다른 내공은 얼음과 불, 빛과 어둠처럼 결코 함께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유운은 남다른 오성과 믿음, 그리고 조화무궁의 신묘함을 통해 기적을 일구어냈다.

그 결과는?

압도!

무려 강기지경의 고수를 패퇴시킬 정도였다.

조화선법을 만들어낸 만수신의조차 예상 못 한 경지였으니.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하나가 되는, 유운만의 조화무궁선법 덕분이었다.

‘한 번의 실전이 일 년의 수련보다 낫다더니. 과연 스승님 말씀대로구나.’

단 하루 만에 이성, 아니 그 이상으로 올라섰으니 마음이 뿌듯했다.

몸 안에 들어찬 열 개의 기둥에 든든한 느낌까지 들었다.

한참 명상을 겸한 산책을 하던 때였다.

“금 대인 아니십니까?”

유운이 먼저 후덕한 사내를 발견하고 반갑게 맞이했다.

“피곤하셨을 터인데.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공자님?”

금만보는 환하게 웃으며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마을 분들에게 좋은 기운을 받아서인지, 몸이 가뿐합니다.”

“허허허. 그 좋은 기운이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모두 공자님 덕분이지요.”

“과한 말씀이십니다.”

“절대 과하지 않습니다.”

금만보가 손사래를 치더니 마을을 가리켰다.

“만약 공자님께서 졌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흑산의 화방이 코앞에 생기고, 어쩌면 마수 공방까지 생겼을지도 모르지요.”

“……!”

“화기가 터지지는 않을지, 혹은 마물의 피라도 새어 나오는 것은 아닐지. 모두가 걱정하느라 밤을 설쳤을 것입니다. 어쩌면 마을을 떠나는 사람이 나왔을지도 모르고요.”

생각만으로도 암울한 미래였다.

“그렇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긴 합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금만보가 유운의 두 손을 맞잡았다.

“제가 오히려 더 감사합니다. 본래 이 마을에 속한 분도 아니시거늘. 전력을 다해 도와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금만보가 아니었다면 어찌 그 많은 건축 자재와 식재료 등을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상인으로서의 신용을 걸고 사람들을 불러 모은 덕분이었다.

“공자님께서 감사 인사를 들으실 때 이런 기분이셨겠군요.”

가만히 있자니 멋쩍고, 그러면서도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솔직히 싫지만은 않은 기분이지요.”

“하하하! 맞습니다, 공자님.”

두 사람이 빙그레 웃으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 웃음은 닮아있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공자님을 뵈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저를요?”

“긴히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마침 밖이니 잘 되었습니다. 이쪽으로 가시지요.”

금만보가 유운을 이끄는데, 눈에 익은 길이었다.

“저곳은 왕가장이 아닙니까?”

유운이 눈에 기운을 돋우어 살피니, 장원 내의 개미 한 마리까지 알아볼 수 있었다.

문을 열고 자는 사람, 막 일어나서 운기행공을 시작하는 사람 등이 보였다.

그런데 눈에 익은 얼굴은 없었다.

“왕가장에 왕씨 가문의 사람들은 하나도 없군요. 어떻게 된 일인지요? 설마 나쁜 일이라도….”

얼마 전만 해도 장원을 통째로 빼앗길 뻔하지 않았던가?

유운의 얼굴이 절로 심각해졌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좋은 일입니다.”

금만보가 빙그레 웃었다.

“좋은 일이라 하심은?”

“어떻게 된 일인고 하니….”

* * *

“이토록 가슴을 울리는 비무라니. 먼 길을 온 보람이 있구나.”

장씨세가의 가주 장횡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백리세가의 행사라기에 그저 구경삼아 나왔거늘.

뜻밖에 유운이라는 백리세가의 미래를 보았다.

소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와글와글.

천하 각지에서 무림인과 상인이 몰려들었다.

생각보다 사람이 훨씬 많았고, 그중에는 무림세가의 사람들까지도 보였다.

“행차한 값은 차고도 넘치는구나.”

장횡에게도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았다.

열심히 눈도장을 찍으며 인맥을 쌓던 중, 아는 얼굴을 만났다.

“공 가주가 아니시오?”

“장 가주도 오셨구려.”

두 가주는 떨떠름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가문의 활동 영역이 맞닿아있으니, 이런저런 충돌이 잦았다.

하지만 둘 다 백리세가의 종가.

대놓고 무력 분쟁을 하지도 못한다.

원수라고 하기에는 가깝고, 친구라고 하기에는 먼 관계였다.

“휴우. 어렵게 얼굴이 보았으니. 술이라도 한잔하시겠소?”

“그럽시다.”

간만에 가슴 떨리는 비무를 본 덕분일까.

두 가주는 술잔을 기울이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수가 될 수도 있는 적 행수와 유운 공자도 결국 마음속 원을 풀고, 깔끔하게 마무리하였소. 우리라고 못 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소?”

“하긴. 그깟 영역이 무슨 대수라고.”

얽히고설킨 역사가 있으나, 핵심은 결국 하나였다.

이 산과 강은 우리 장씨 가문에 속한다.

아니다 우리 공씨 가문 것이다!

땅은 대대손손 이어지는 자부심이자 이권이니, 누구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것, 모두 터놓고 이야기해 봅시다.”

“좋은 생각이오, 장 가주.”

두 사람이 빙그레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그깟 땅이 무어라고. 사람보다, 인연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소?”

“그러게 말이오. 서로 한발씩 양보합시다.”

큰 틀은 생각보다 쉽게 정해졌으나, 세부적으로 합의할 사항은 산더미였다.

“적어도 사나흘은 더 걸릴 터인데. 적절한 숙소는 없더냐?”

“워낙 작은 마을이라 객잔조차 없습니다. 알아보겠습니다, 가주님.”

그렇게 해서 찾아낸 것이 왕가장이었다.

“서촌에서 가장 큰, 아니 유일한 장원입니다.”

“그래. 이 정도면 아쉬운 대로 며칠 묵을 만하겠구나.”

왕 씨네 가족이 관리를 잘해서 깔끔하고 정갈했다.

“꿀꺽. 저희 집에 묵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아예 사나흘 집을 비워줄 수 있으면 더 좋겠네.”

장씨세가 총관의 말에 왕 영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그리 원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상대는 무림인.

집을 통째로 내놓으라고 해도 내줄 판에, 고작 며칠이니.

‘박 영감네 집에서라도 묵으면 되겠지.’

박 씨가 생색 좀 내겠지만, 그 정도야 숙박비로는 싸다.

“왜 그냥 가는 건가? 가격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도 않고.”

“도, 돈을 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왕 영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도 정도의 세가는 다르구나. 적더라도 돈을 주겠다니.’

무림세가를 상대로 사기 치려다 손 잘린 상인이나 사기꾼이 한둘이 아니었다.

왕 영감은 조심스럽게 가격을 제시했다.

“하루에 다섯 냥은 어떻습니까?”

객잔 점원의 하루 품삯이 동전 석 냥에서 넉 냥이니 나름 저렴한 가격이었다.

“지금 우리 세가를 모욕하는 것인가?”

총관이 인상을 찌푸리자, 왕 영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 어찌 감히…죄, 죄송합니다. 가격을 깎아…”

“겨우 다섯 냥이라니!”

“깎아…, 네?”

“우리가 백리세가만 못하다고 무시하는 겐가?”

“어, 어찌 저희가….”

“장씨세가는 역사 깊은 안현의 명문일세. 가주는 물론 식솔까지 십여 명이 넘거늘. 세상 사람들이 알면 우릴 뭐라고 하겠는가?”

왕 영감은 처음에 잘못 들었나 했다.

그러나 벌컥 화내는 모습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그, 그러면 얼마?”

“적어도 스무 냥은 되어야지.”

“스, 스무 냥! 좋지요, 좋습지요.”

왕 영감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좋은 일을 앞두고 있는데, 겨우 돈 따위로 말이 나오면 안 될 일이지. 잘 처리하도록 하게.”

지켜보던 가주 장횡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 받게.”

“이, 이건?”

총관이 건넨 돈에 왕씨 가문의 모두가 하얗게 질렸다.

“으, 은자가 아닙니까?”

은자의 가치는 지역에 따라 다르나, 동전보다 적어도 열 배에서 스무 배는 더 비쌌다.

“그럼 은자지. 설마 금자를 원하는 건가?”

총관의 눈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그게 아니라, 저희 말은 은자가 아니라….”

왕 영감의 아들이 눈치 없이 나설 때였다.

꾸욱.

며느리가 남편의 말을 지그시 밟았다.

‘아아악. 아파, 아프오, 경매!’

중년 사내는 속으로만 비명을 질렀다.

아내의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가 있으니, 등짝을 내려칠 때보다 훨씬 더 위험한 신호였다.

‘방정 떨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눈으로 보내는 신호를 무시한 대가는 엄청나다.

밤인데도 방 안에 들어가지도 못한 적도 있었다.

‘그, 그것만은 절대 안 되지!’

중년 사내는 아파도 꾹 참고 뒤로 물러났다.

“이 정도면 차고 넘칩니다. 과연 안현의 명문, 장씨세가답습니다.”

왕 영감은 황홀한 눈으로 은자를 바라보았다.

하루에 은자 스무 냥이니, 나흘이면 무려 은자 여든 냥!

시골 마을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거액이었다.

“노인장도 장씨세가의 명성을 들어보았단 말인가?”

“이를 말씀이십니까.”

서촌은 커다란 현도, 번화한 향도 아닌 시골 마을에 불과하다.

그곳에까지 가문의 이름이 알려졌다니? 장씨세가의 식솔들이 귀를 쫑긋했다.

기대감 가득한 모습에 왕 영감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제대로 알고 있는 무림인이라고는 딱 한 명뿐이었다.

‘유운 공자님이라고 생각하자!’

평소 유운에 대해 느낀 점을, 장씨세가인 양 늘어놓았다.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공명정대함, 아랫것들을 보듬는 자비. 실로 군자의 가문이라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가문이지만, 눈 딱 감고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렇지. 본가는 그런 가문이지. 잘 알고 있구만.”

“껄껄껄. 노인장이 보는 눈이 있어!”

사람들이 흐뭇하게 미소 짓자, 왕 영감도 힘이 났다.

“옛말에 명성은 헛되이 전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눈빛은 맑고 몸짓은 정갈하며. 무공을 펼칠 때마다 하늘이 우르릉 소리를 내니. 과연 명가의 후손은 다르더군요!”

돈은, 아니 큰돈은 늙은 육신조차 춤추게 하였으니.

왕 영감은 자기도 모르게 흥분해서 입을 털었다.

‘우리가 무공까지 선보였던가?’

고개를 갸웃하는 이도 있었지만, 왕 영감이 계속 칭찬을 쏟아내니 이내 잊어버리고 말았다.

“사방에 명성이 울려 퍼졌으니. 모두들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정도 되는 가문이지. 자네의 안목은 몹시도 뛰어나군.”

“과찬의 말씀입니다.”

“진심일세, 자네처럼 현명한 사람은 처음 봤네!”

서로 뜨거운 눈길이 마주치니, 자기도 모르게 손을 덥석 잡았다.

“총관님!”

“왕 영감!”

“허허허!”

“으하하하!”

돈을 쓰는 자도 행복하고, 받는 자도 모두 행복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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