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서촌에 부는 바람 (2)
“결과적으로 왕씨 일가가 큰돈을 벌었군요.”
“돈을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 기뻐하였으니. 이는 결코 나쁜 돈이 아닙니다.”
금만보가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명문일수록 돈을 천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돈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자와는 상종도 하지 말아라.”
이렇게 말하며 상인과는 얼굴조차 마주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혹여 공자께서 기분이 상하시면 안 될 텐데.’
아무리 유운이 어린 학사처럼 보여도, 엄연히 명가의 일원.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계획은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세상에 나쁜 돈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두 사람의 마음 씀씀이에 달린 일이지요.”
“……!”
“그렇지 않아도 왕 씨네 아주머니께서 남편 때문에 쪼들린다고 한탄하셨는데. 살림에 큰 보탬이 될 테니, 다행입니다.”
유운이 빙그레 웃으니, 불편한 마음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과연 공자님이십니다. 제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였군요.”
금만보가 무릎을 탁 쳤다.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나 본가는 그렇게 속이 좁지 않습니다.”
유운은 금만보가 삼킨 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장씨 세가는 자부심을 얻었고, 왕씨 일가는 실리를 얻었습니다. 무엇보다 다섯 아이가 따듯한 쌀밥을 먹고, 부드러운 면 옷을 입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유운의 말에 금만보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역시 유운 공자님뿐이야.’
금만보가 본 백리세가는 결코 관대하지 않다.
그럼에도 유운의 말에 반감이 들지 않은 이유는, 유운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토록 사람을 품고, 사람을 아끼시니.’
명가의 후손일수록 가문의 입장부터 생각한다.
그러나 유운은 달랐다.
언제나 민초, 그리고 인연이 닿은 사람들부터 먼저 생각하였다.
‘어쩌면이 아니야. 유운 공자와 함께라면, 해낼 수 있어.’
마음속 희망은 이제 확신이 되었다.
“다른 손님은 어찌 되었습니까? 설마 남으신 분들이 더 있습니까?”
자신의 비무가 무슨 대단한 일이겠는가?
손님들이 곧바로 떠날 줄 알았는데, 혹시 그렇지 않았다면?
“천하는 넓고, 사람이 이렇게 한곳에 모이는 일은 드뭅니다. 서촌의 모임은 그들에게도 큰 기회입니다.”
“……!”
인재에 목마른 무림세가, 사업 기회를 찾는 상단, 몸값을 높이고 싶은 낭인, 영웅을 노래하는 예인(藝人)과 남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서로를 찾았다.
“하면 숙소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먼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예전에는 서촌이 번화한 성읍이었다 들었습니다.”
“…백리세가 초창기의 일이지요.”
유운이 씁쓸한 어조로 대답했다.
시조는 책과 무공, 둘 다를 중시했다.
만서각과 서촌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옛말이 되었지요. 대부분 인근의 현으로 떠나고 말았지요.”
“맞습니다. 그 때문인지 버려진 빈집이 많더군요.”
“그 말씀은….”
“저와 동료들이 마을 사람들의 양해를 받아, 빈집을 사서 꾸며놓았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덕분에 손님들이 이슬을 맞지 않아도 되겠군요.”
“상인이 객잔업을 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금 대인께서 미리 준비하신 덕분이지요.”
어찌 변할지 모르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들이 이곳에 머물 것을 예측하여, 미리 투자하였으니.
금만보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저희 역시 꽤 큰돈을 벌었으니 저희가 공자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현과 현을 오가는 데만도 며칠씩 걸린다.
일이 있는 사람은 최소 일주일, 많으면 한 달까지 집을 빌렸다.
그들 중 상당수가 이름 있는 가문 출신.
장씨 세가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 큰돈을 썼다.
“덕분에 서촌의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 저 역시 감사할 따름입니다.”
“허어!”
금만보는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 감사하다 말하다니.
자존심 강한 명문의 후손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태도였다.
“금 대인 덕분에 저 또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무엇인지요?”
“돈을 쓰는 자는 편안해지고, 돈을 받는 자 또한 기뻐하니. 이것이야말로 옛 성현이 말하는 상생(相生)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금만보가 빙그레 웃었다.
평생 돈만 보았지, 그 뒤를 보지 못했는데.
유운 덕에 매일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서로를 이롭게 하고, 서로를 살리는 길이라. 진정한 상인이 나아가야 할 길이로군요. 이는 모두….”
또다시 칭찬이 이어지는 게 멋쩍어서일까.
유운이 빙그레 웃으며 농을 했다.
“모두 적 행수와 흑산조가가 고생하며, 일을 키워준 덕분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웃으니, 그 모습이 어쩐지 닮아 보였다.
그렇게 산책이 끝나갈 때였다.
“그래서 하시고 싶으신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금만보가 돈 몇 푼 번 것을 자랑하고자 왔을 리 없다.
“외람되지만 여쭙겠습니다. 하늘과 땅, 사람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중요한 것이라….”
유운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성현께서 이르기를,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천시, 지리, 인화 모두가 중요하다 하셨습니다.”
날씨와 같이 하늘이 주는 이득, 지형의 유리함과 같은 땅의 이득,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 함께 모였을 때 얻는 이득을 일컬었다.
“그러나 만약 꼭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
“인화.”
“……!”
“사람과 사람의 어우러짐이야말로 최고라 하셨습니다.”
“과연 백리 제일 학사이십니다.”
간단한 문답에서도 깊은 학식이 묻어나니, 금만보는 다시 한번 감탄했다.
“과찬이십니다. 금 대인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저의 생각 역시도 같습니다. 또한 그 원리는 상인에게도 마찬가지라 믿습니다.”
“……!”
“큰 상인이 되기 위해서는 가뭄이나 전쟁 같은 하늘의 도움도 중요하고, 기름진 땅이나 귀한 광물을 품은 광산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금만보가 호흡을 골랐다.
“사람, 더 정확히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라.”
“지금 서촌에는…. 그 마음이 모였습니다.”
“……!”
“마음이 풀리면 돈 역시 풀리는 법이니. 지금 서촌은 상인들에게 금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유운은 눈을 빛내며 들었다.
“물론 한계는 있습니다. 비무는 일회성 행사였으니까요.”
“……!”
세월에 스러지지 않는 것은 없다.
두 사람의 비무가 준 감동이 아무리 깊어도, 시간이 지나면 잊히리라.
“제가 무공은 잘 모르지만. 무공에는 기세라는 것이 있다고 하더군요.”
“맞습니다. 흐름이 자신에게 왔을 때, 승부를 내야 하지요.”
“장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서촌에는 지금 수많은 인연이 얽히고 설켜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쉽게 오지 않으니. 한 번으로 끝내기는 너무 아쉽지 않습니까?”
“……!”
금만보는 노련한 상인.
유운과 같은 땅에서, 전혀 다른 과실을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비무는 이미 끝나지 않았습니까?”
“상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번 찾게 하는 것이 어렵지 두 번은 쉽고, 세 번은 식은 죽 먹기다.”
“……!”
“저에게 계획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사람들이 계속 서촌으로 오게 만들 계획이.”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공자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상인 금만보가 눈을 빛냈다.
* * *
서촌에서 강 하나만 건너면 청수향(郷)이 있다.
그곳 사람들은 오랫동안 같은 질문을 던져왔다.
백호문과 흑호방. 둘 중 누가 이 지역의 최강자인가?
문(門)은 가르침을 통해, 방(幇)은 이익을 통해 뭉치니 각기 성격이 달랐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으니, 구성원 대부분이 타인이라는 점이었다.
“백호문이야 말로 청수 최강이오. 우리 문파에 입문하시오!”
“무슨 소리냐! 흑호방이야 말로 최강이지. 우리 방에 들면 높은 월봉은 물론 남부럽지 않은 권세까지 누릴 수 있다!”
“무슨 흑도도 아니고. 부끄럽지도 않으시오?”
“부끄럽기는. 호랑이가 어찌 풀을 먹겠느냐? 고기와 술로 배를 채워야지.”
“쯧쯧. 이름이 아깝구려.”
“너희야말로 아깝다. 문파의 현판을 내려라!”
“무, 무엇이! 네 이놈!”
활동 영역이 같았고, 공교롭게도 두 문파는 이름까지 비슷했으니.
두 문파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탐욕스러운 흑호 놈들을 쳐라!”
“역겨운 위선자 놈들. 백호 놈들을 없애버려라!”
방파의 싸움은 명문세가는 물론, 군소가문의 싸움과도 다르다.
이긴 자가 전부를 갖는 생존 경쟁이니.
손속에 여유를 두는 일 따위는 일절 없었다.
서걱!
으아악!
최선을 다해 서로에게 살수를 펼치니.
이십여 년간 죽어 나간 이가 수백이 넘었다.
그런 상황이거늘.
“그녀를 받아주시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죽겠습니다.”
백호문의 문주전.
손자 황인록이 무릎을 꿇고 목에 칼을 들이댔다.
“이, 이 녀석아 무슨 짓이냐?”
황철균이 기겁하여 달려갔다.
어렸을 때부터 아비인 자신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아들이다.
그런데 이리 무도한 짓을 할 줄이야?
“그 계집이 누구의 핏줄인지 알고도 그런 말을 하는 게냐!”
문주 황일동이 준엄하게 꾸짖었다.
“어디 여자가 없어서 그런 여자를! 흑호의 핏줄 아니더냐. 내 단칼에 베어버리고 말겠다!”
황철균이 아들의 칼을 빼앗으며 소리쳤다.
“핏줄이 그리 중요합니까? 차라리 잘 되었군요. 그녀의 배 속 아이에게는 우리 백호의 피도 흐르니까요.”
“워, 원수에게 아이라니!”
그때부터였다.
문주와 소문주는 밤낮으로 고민에 빠졌다.
“그간 흘린 피가 너무나 많다. 이제라도 화해하는 것은 어떻겠느냐?”
“사형제들이 흘린 피가 아직도 굳지 않았거늘. 흑호와 같은 하늘 아래 살 수는 없습니다.”
“허면 네 아들은 어찌할 것이냐? 그 녀석의 아이까지 같이 벨 것이냐?”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뜻밖의 서신이 도착했다.
“백리유운이라? 갑자기 백리세가의 혈손이 왜?”
“백리유운이라면, 노가주의 손자가 아닙니까?”
“본 적이 있느냐?”
“네. 오륙 년 전, 백리가주의 고희연(70세 생일) 때 본 적이 있습니다.”
백리세가는 인근 십여 개 현의 패자다.
백호문이 비록 종가는 아니나, 안 갈 수는 없었다.
“총명한 눈을 가진 아이였으나, 내부에 세력이 없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우리와는 별다른 인연이 없거늘.”
문주 황일동은 고개를 갸웃하며 서신을 펼쳤다.
“허어. 백리 안에서 제일가는, 아니 천리 안에서 제일가는 학사라더니.”
고급스러운 백추지 위에는 유려한 문장으로 가득했다.
처음 내용은 가까운 이웃에 대한 가벼운 안부 인사였다.
“표현이 실로 겸손하군요. 두 문파의 힘은 비교할 수가 없거늘.”
“명가의 후손답게 잘 배운 태가 나는구나.”
두 사람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중반으로 넘어가자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옛말에 마음의 벽을 허문 자는, 성을 쌓은 자보다 낫다 하였습니다. 세월은 흐르는 강물처럼 빠르게 흐르니. 뒤늦게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서촌에 좋은 정자가 생겼습니다. 풍광이 꽤나 볼만하니. 존경하는 이웃 어른을 모시고, 술을 올리며 인생의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초대 손님은 백호문주와 흑호방주, 단둘뿐이었다.
부드러운 표현 속에 숨은 뜻은 명확했다.
“허어. 이건 초청을 빙자한 중재로구나.”
누구도 손대지 못했던 두 문파의 일에 끼어들겠다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