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서촌에 부는 바람 (3)
“백호문 역시 독립된 문파이거늘. 아무리 백리세가라 하나 이럴 수는 없습니다!”
소문주 황철균이 화가 나서 소리쳤다.
“가문의 이름을 믿고 쓴 서신은 아닌 듯하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서찰에 찍힌 인장을 보거라.”
“……!”
백리세가의 표식이 아닌 유운의 이름만 찍혀있었다.
“개인 자격으로 이런 서신을 보낸다니, 더욱 기가 막힙니다. 노 가주께서 직접 요청해도 만날까 말까인데, 감히…!”
아들이 계속 화를 내자, 문주가 한숨을 쉬었다.
“너는 어째서 늙은 나보다도 더 모르느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요즘 무림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이름이 무엇이냐?”
“…백리유운이지요. 항간에는 백리소룡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황철균은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젊은 나이에 적랑쌍도를 쓰러뜨린 것은 대단하나, 강호에 그 정도 실력을 갖춘 고수가 어찌 없겠습니까? 조그마한 무명(武名)을 믿고 감히….”
“휴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백리소룡보다 더 많이 불리는 별호가 무엇인지 모르느냐?”
문주는 답답했는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말했다.
“해원검(解願劍).”
“……!”
“해원검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지 않더냐.”
가슴에 쌓인 원(願)을 푸는 검.
무림인에게 붙는 별호라기에는 특이했다.
“무림이 오직 힘으로 돌아간다 여기느냐? 실력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명성이다. 특히 합당한 명분을 갖춘 명성은 더욱 그러하다.”
“……!”
“네가 아무리 고수가 된다 한들, 무림판관 정천수 대협을 해할 수 있겠느냐?”
“…그럴 리가요. 어떤 이유로든 그를 해하면 강호의 공적이 될 텐데요.”
“왜 그렇겠느냐?”
“평생에 걸쳐 공평과 정의를 증명한 사내이기 때문입니다.”
“맞다. 그래서 그에게는 명분이 있고, 누구도 그의 말을 거절하지 못한다.”
“하오면….”
“해원검 역시 그러하다.”
“……!”
“검귀니 무슨 현의 제일검이니 하는 별호보다 훨씬 더 값진 이름이라는 뜻이다.”
힘으로 상대를 꺾은 경우는 많아도, 상대의 마음을 얻은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랬기에 해원검이라는 별호에는 존경이 담겨있었다.
“무림판관 정천수가 보증하고, 적랑쌍도 적인걸이 승복한 사내다. 그런데도 이 이름을 무시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소자가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기억하거라. 우리는 정도의 문파다. 사람을 잃으면 키우면 되고, 무공이 약하면 연마하면 된다. 하나 명분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
“채비를 하거라. 서촌으로 가자꾸나!”
“알겠습니다, 아버님.”
* * *
푸르릉.
히이잉!
서촌 입구.
하얀 무복을 입은 일단의 무인들이 들어섰다.
“아직도 이번 행차가 마음에 걸리는 게냐?”
“그렇습니다, 아버님. 어쩐지 우리가 약세를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라.”
“그리 생각할 수 있지. 지난번 싸움에서 우리가 살짝 밀린 감이 없지 않으니.”
“솔직히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할지….”
“그러니 오히려 더 잘 되지 않았느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일동의 말에 황철균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해원검이 근래 명성이 높아졌다 한들, 고작 약관도 되지 않은 젊은이.”
“……!”
“도산호, 그 사나운 늙은이가 손자뻘 무인의 말에 콧방귀나 뀔 것 같으냐?”
“아…! 그렇지요, 그렇고 말고요. 껄껄!”
황일동의 말에 황철균이 무릎을 ‘탁’ 쳤다.
자신만 해도 기분이 상해서 유운의 초청을 거절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옹고집으로 유명한 흑호방주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자가 올 리가 없으니. 백호문만이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는 문파임이 만천하에 드러나겠군요?”
“바로 그러하다.”
“제가 크게 배웠습니다, 아버님.”
“문파의 행사에는 이렇게 여러 가지 면을 고려해야 한다.”
황일동은 흡족한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혹시 그자가 온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그가 이곳에 온다고? 허허허. 재미있는 농담을 하는구나. 절대로 올 리 없다. 절대.”
황일동이 단호하게 말했다.
푸르릉…!
말을 몰고 언덕을 오르니, 고풍스러운 장원이 보였다.
“어려운 걸음 하셨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단정하게 차려입은 장노가 손님을 맞이했다.
“차를 마시면서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곧 공자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천천히 갔다 오시게. 급할 것 없으니.”
황일동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뒤쪽은 붓으로 그린 듯한 절벽이고, 앞쪽은 붉은 낙엽이 가득한 강이라. 서촌의 풍광이 이리 수려한지 몰랐습니다.”
“마실 나온 김에 구경하고 가면 되겠구나.”
어차피 해원검의 얼굴만 잠깐 보면 끝날 일.
두 사람이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서촌이 크게 발전하였다는 소문이 사실이군요. 사람들의 얼굴에 활기가….”
“쉿!”
황일동이 아들의 입을 막더니, 검 위에 손을 올렸다.
꿀꺽.
황철균과 제자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굳혔다.
“무슨…?”
“무언가 있다. 대단히 위험한 것이.”
“……!”
자신과 비교할 수 없는 고수의 경고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둥글게 뭉쳤다.
“저기로구나!”
반대편 접객실에서 한줄기 냉기가 느껴지니.
쾅!
황일동은 단번에 문을 박차고 들이쳤다.
채애앵!
“웬 놈이냐!”
객실 안의 사내들이 도를 뽑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황일동의 시선은 그들에게 향하지 않았다.
“……!”
작은 키, 단단한 체구.
호피 외투, 악어처럼 우툴두툴한 얼굴.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외양이었다.
“도산호!”
흑호방의 주인이 눈을 번쩍 뜨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 어…!”
뒤따라 들어온 백호문의 제자들이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강렬한 기세가 객실을 가득 채우니.
마치 커다란 산이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네가 감히!”
황일동 역시 기세를 끌어올렸다.
치이잉!
날카로운 살기가 허공에서 부딪히며 장내의 공기가 요동쳤다.
“네놈이 몰래 숨어있을 줄이야. 모든 것이 음모였구나!”
황일동이 분노해서 외치자, 도산호 역시 눈썹을 꿈틀거렸다.
“감히 그따위 망발을…, 흑호를 어찌 보고!”
두 강자의 대립에 장내의 모두가 하얗게 질렸다.
‘서, 설마 여기서?’
‘그간 두 분의 정면 대결만은 피해왔는데….’
아무리 세력이 중요하다 해도, 결국 무림은 무림.
무조건 강한 자의 편이다.
진 쪽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하게 될 터였다.
꿀꺽.
모두가 입을 열지 못하고 두 사람만 바라보았다.
백호문주 황일동이 꼿꼿하게 서서 검을 들고 내려다보니.
그 모습은 마치 고고한 학과 같았다.
반면 흑호방주 도산호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위를 노려보고 있으니.
도약 직전의 맹견을 보는 듯했다.
파아앙…!
후우웅…!
두 사람의 기세가 맞부딪히며 장내의 공기가 점점 뜨거워졌다.
그렇게 두 강자가 부딪히기 직전.
“두 분께서 많이 적조하셨나 봅니다. 그 새를 참지 못하고 이리 마주하시다니.”
학사복을 입은 젊은이가 빙그레 웃으며 등장했다.
‘저토록 젊은, 아니 어린 이가 유운 공자라고?’
황일동은 깜짝 놀란 얼굴로 유운을 살폈다.
티 없이 맑은 피부에, 하얀 얼굴.
값비싸지는 않으나 정갈한 학사복.
어딜 봐도 무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 말한다 한들 내가 속을 줄 아는가? 감히 나를 기습하려 하다니.”
“두 분을 빨리 뵙게 하려고 방을 그리 배치하였는데.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너그럽게 용서하여주십시오.”
“……!”
유운은 자신을 탓하여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비록 백호 나부랭이지만 개중에 괜찮은 자라 믿었거늘. 나를 이리 모욕하다니.”
도산호가 성난 얼굴로 외쳤다.
달아오른 가슴이 그제야 식은 것일까.
황일동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탄식했다.
“아아…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전장에서 얼굴을 마주한 지 벌써 삼십 년.
그가 아는 흑호방주는 단번에 칼을 뽑아 목을 친다면 모를까 뒤에서 암수를 쓰지 않는다.
거기에 확신을 더한 것은 유운의 태도였다.
‘저토록 맑은 눈이라니.’
상대의 체면을 위해 몸을 숙였을 뿐, 눈에는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게다가 유운이 누군가?
천하 명문, 백리의 일원이 아닌가?
‘아무리 호랑이가 뛰어나다 한들, 용에 비할까.’
무려 십여 개의 현을 지배하는 백리다.
겨우 청수현 하나 먹자고 음모를 꾸밀 리 없다.
“이 늙은이가 조급한 마음에 흰소리를 하였구려. 공자께 사과드리오.”
청수한 노인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자, 모두가 깜짝 놀랐다.
황일동이 누구인가?
인근에서 손꼽히는 강자이며, 청수현의 반을 지배하는 문파의 주인!
아무리 명문이라지만, 손자뻘에 허리를 숙일 신분이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쟁에도 예가 있는 법이거늘. 결례를 용서하시오, 흑호방주.”
도산호가 의외라는 듯 눈을 번뜩이더니,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간에 보이지 않는 화해와 인사가 오간 후.
“구차하게 변명하려는 것은 아니오. 다만 도 방주께서 오신 것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구려.”
황일동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도산호를 힐끗 바라보았다.
“흐음. 그럴만하지.”
도산호가 짧게 신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호문주의 명성도 높지만, 흑호방주에 비할 바 못 된다.
단지 무공 때문이 아니었다.
마수잡이를 하면서, 마수의 피를 얼굴에 뒤집어썼다더라!
마수의 고기를 먹으며, 사흘 밤낮으로 도륙했다더라!
얼굴의 반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우툴두툴하니, 단지 소문만이 아님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사실은 순수한 사람이 아니고 마수의 혼혈이래.”
“아니, 내가 듣기로는 사람을 잡아먹은 마수라던데?”
온갖 기괴한 소문이 더해지니.
흑호방주는 흉포함을 넘어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커흠. 말을 나누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황일동이 헛기침을 하며 넌지시 물었다.
“마침 방주께서 근처에 올 일이 있어서 운 좋게 한번 뵈었습니다.”
“직접 설득했다는 말인가? 흐음. 그런 게 통할 리가 없을 터인데….”
“그저 진심이 통했을 뿐입니다.”
유운은 빙그레 웃을 뿐,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다.
“다들 내 외모만 보고 겁에 질려서 떨고는 하지.”
“……!”
도산호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마수와 싸우기 이전에도 그의 외모는 좋게 말하면 추남, 나쁘게 말하면 흉물이었다.
“그런데 이 젊은이가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도산호는 당시를 떠올렸다.
“어찌 한낱 살 거죽으로 사람을 판단하겠습니까?”
“편견으로 사람을 미리 재단하는 자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유운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리 말했다.
“정작 외모에 대한 편견에 빠져 사람을 낮게 본 것은 나였네.”
얼굴은 아기처럼 보드랍고, 풍기는 기세가 순하니, 처음에는 무시로 일관했다.
그러나 살아있는 맹수 앞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으니.
이내 유운을 인정하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허나 그것만으로 방주께서 받아들였을 리 없소.”
황일동이 아는 도산호는, 아무리 인품이 훌륭하다 해도 약자에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아니었다.
“옛말에 이름은 헛되이 전해지지 않는다더니. 과연 백리는 백리더군.”
“……!”
도산호의 말에 황일동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만한 자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는 격찬이었다.
“그 말은 대체…?”
“쯧쯧. 아직도 모르겠나? 주변을 보게.”
“……!”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보이지 않는 살기가 객실을 가득 뒤덮었다.
스르릉.
깊은 밤 호랑이가 소리 없이 다가오는 듯하니.
‘으아아아!’
‘과연 흑도산군(山君, 호랑이)이라 불리는 고수로구나!’
모든 제자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얼어붙었다.
심지어 백호문의 소문주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그 와중에 움직이는 자는 오직 셋.
“유운 공자가…!”
황일동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유운을 올려다보았다.
“여정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따듯한 차로 몸을 녹이시지요.”
유운이 부드럽게 웃으며 차를 따랐다.
“일문의 장로들조차 버거워하는 도 방주의 시험을 유운 공자가 통과했다는 말이오? 이토록 젊은 나이에?”
황일동이 경악하며 되물었다.
흑호방주는 날숨에조차 마수의 피 냄새가 배있는 마물 사냥꾼.
수많은 살육 덕분에, 영혼에 흉포한 기운이 가득했다.
‘고수들조차 압박감에 스스로 굴복하고 말거늘.’
그런 강자의 압박을 정면에서 이겨냈다니?
“보기보다 담이 크더군.”
무뚝뚝한 말이었지만, 극찬임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