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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학사의 무공백과-48화 (100/114)

제48화

서촌에 부는 바람 (4)

“하지만 착각하지 말거라. 흑과 백 사이의 원한은 깊고도 깊다.”

도산호가 단호하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해묵은 갈등을 어찌 몇 마디 말로 풀어낼 수 있겠소?”

황일동 역시 말을 보탰다.

유운의 정성을 보아 자리에 나왔을 뿐, 화해할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다는 의미였다.

“등에 짊어지신 짐이 무거움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원한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며….”

“솔직히 말하리다. 칼끝에 걸린 것이 단지 원한뿐이겠소?”

“……!”

황일동이 유운의 말을 잘랐다.

“문파의 주인으로서, 우리 백호는 청수현을 결코 놓을 수 없소.”

“흑호 역시 마찬가지다.”

도산호 역시 굵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사납게 웃었다.

“산골 마을을 손에 쥔 조그마한 문파조차 떵떵거리면서 산다네.”

“…….”

“촌 하나만 장악해도 지역의 유지이자 권력자로 불리지 않나?”

‘촌급 문파’만 되어도 무림에서의 위상이 달라짐을, 유운 역시 왜 모르겠는가?

“하물며 향일세. 게다가 청수향은 어느 향보다 더욱 풍요롭고 번화하니. 누가 포기하겠나?”

“대대손손 번영할 기회를 걷어찰 자는 없지.”

이때만은 두 사람의 마음이 일치했다.

‘향급 문파’는 무림에 출도한 이들의 궁극적인 꿈이기도 했다.

‘청수향을 독점한다면, 어지간한 종가 못지않을 터.’

청수향에는 이미 재물과 이권이 넘쳐났다.

더 나아가 청수향을 현으로 발전시킨다면?

‘천하 명문도 꿈은 아니지.’

‘천하인이 모두 우리 문파의 이름을 알게 되리라.’

‘현급 문파’가 가진 부는 조그마한 나라 못지않으니.

이전 천하의 제후와 같은 위치였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

‘백리 또한 처음부터 명문은 아니지 않았던가.’

두 사내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두 분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유운이 나직하게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고작 자신만을 위한 야망이 아니시겠지요.”

혈족과 문파의 영원한 번영이라!

문파의 주인으로서 어찌 꿈꾸지 않겠는가?

“길게 이야기할 필요 없겠군.”

“이해해주니 고맙소. 그럼 이만 자리를 파하고….”

두 사람의 말에 유운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입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란 말이오?”

유운이 조용히 창밖의 연못을 가리켰다.

“수면이 고요하다고, 물 밑에서 아무 일이 없겠습니까?”

“그 말은…?”

“아시다시피 맹주께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신지 벌써 십 년째입니다.”

“……!”

유운의 말에 두 사람이 숨을 멈추었다.

당대 맹주는 무공이 뛰어나고 지혜로워서 현군으로 이름이 높았다.

하지만 칩거가 길어도 너무 길었다.

노환이 깊으시다더라.

이미 돌아가셨는데 맹주부에서 공표를 안 하고 있다더라.

덕분에 온갖 소문이 난무하는 상황이었다.

“공자께서는 설마 맹주에 관한 뜬소문을 믿는 거요?”

“허튼소리!”

황일동은 물론, 조용히 듣고 있던 도산호까지 역정을 냈다.

“강건하신 맹주께서 쓰러지셨을 리 없소.”

“암, 그렇고말고. 백호가 맞는 말을 할 때도 있구나.”

두 노인은 하늘이 무너졌다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믿지 않았다.

“하늘에 닿은 무인이라도 세월을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

“……!”

“공자께서 괜히 그리 말할 리는 없고. 증거는 있소?”

“천하에 가장 은밀하고 신비한 맹주부의 일입니다. 정확한 증거가 있을 리 있겠습니까?”

“허면….”

“여러 정황을 분석해서 확인한 정보입니다.”

“겨우 그걸로….”

“서문세가에서 알려주었는데도 말씀이십니까?”

“……!”

달리 백리제일종가라 불리겠는가?

누구보다 냉철하고 천하 흐름에 밝은 가문이었다.

“서문이 그리 말한다니….”

“정말로 맹주께 큰일이 생겼단 말인가?”

이때만은 두 노인이 한마음이 되어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만약 그 소식이 사실이라면, 천하가 앞으로 어찌 되겠습니까?”

“흐으음….”

“천하라….”

유운의 물음에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단어를 떠올렸다.

천하 대란!

“그러니 지켜야 할 때입니다.”

황일동은 군사의 조언을 떠올렸다.

“더 이상의 싸움은 득보다 실이 많습니다. 이제는 내실을 다져야 할 때입니다.”

유운이 말을 이었다.

“이제 백호문은 이름 없는 도사들이 만든 작은 문파가 아니며.”

“……!”

“흑호방 역시 사냥꾼 마을의 자경대가 아닙니다.”

유운의 말에 둘 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본 문의 직계들도 잊어가는 역사이거늘!’

‘괜한 객기로 부른 것은 아니로구나.’

유운이 두 사람 뒤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끝없는 싸움이 진정 저들을 이롭게 한다고 여기십니까?”

“…….”

“옛말에 그치지 않는 비는 없고, 동트지 않는 밤은 없다 하였습니다.”

“……!”

유운이 준비한 것은 말뿐이 아니었다.

촤라락!

탁자 위에 커다란 지도를 펼쳤다.

‘산과 강은 물론 주요 도로와 건물까지 정교하게 묘사하였구나.’

‘설마 정말로 청수향을 노리는 것인가?’

두 사람이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청수향을 중심으로 그린 세력도입니다. 여기부터 보시지요.”

유운이 가리킨 부분을 보고,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이게 다 무림 문파라고?”

“이렇게나 많았던가…!”

지도 안에는 각종 문파의 이름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청수현의 무림 문파가 둘만 있는 게 아니며, 무림 문파가 청수현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청수향이라는 동심원 안과 밖 모두 문파들로 가득했다.

그들 중에는 두 사람조차 경시할 수 없는 강대한 문파조차 있었다.

“푸른 뱀 표식이라니. 설마… 청사문!”

“그들이 우리도 모르게 현 내에 자리를 잡았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들이 코앞까지 올 때까지 몰랐구나.”

유운에 말에 두 사람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병법에 이르기를, 쌓은 것보다 잃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하였습니다.”

“……!”

“위만 보지 마시고, 아래 또한 살펴보십시오.”

유운의 말에 두 사람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욕심이 내 눈을 가렸구려. 이토록 조여오고 있는데도 못 보고 있었다니.”

“…뺏을 생각만 하다 다 뺏기게 생겼군.”

한참 후에야 힘들게 입을 열었다.

“이권이든, 명예든, 자존심이든. 진짜 소중한 것을 잃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실로 맞는 말이오.”

“…그 말이 옳다.”

유운의 말에 두 사람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백호문주가 문득 웃으며 농을 건넸다.

“공자, 진짜 약관도 안 된 거 맞소? 무슨 일흔 살 넘은 현자와 대화하는 기분이오.”

“아이의 탈을 쓴 늙은이임이 분명하다.”

드물게도 흑호방주가 농을 받았다.

“하하하!”

“허허허!”

가벼운 농담에 분위기가 풀어졌다.

“술상을 보아놓았습니다. 이곳 안주인의 솜씨가 뛰어나니 기대하셔도 좋으실 겁니다.”

유운이 두 사람을 정자로 안내했다.

“여기입니다. 두 분께서 조용히 이야기 나누시지요.”

“공자께서는 참석하지 않으신다는 말이오?”

황일동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외인인 제게 어찌 자격이 있겠습니까?

“공자야말로 서촌의 주인 아니시오? 우리와 함께할 자격은 차고 넘치오.”

단지 생색을 낼 기회 정도가 아니었다.

일이 잘 풀려서 중재에 성공한다면, 천하에 이름을 널리 알릴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정작 마지막에 빠진다니?

“옛말에 맺은 자가 풀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오직 두 분만이 이 자리의 주인공이 아니겠습니까?”

“……!”

유운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조용히 빠져나갔다.

“…….”

“…….”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도 잠시.

유운이 사라진 후, 둘은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사람은 간사하지. 아니 세월이 무섭다고 해야 하나.”

도산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도 잊고는 하니.”

“…….”

“하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원한이 있으니.”

“……!”

도산호가 팔뚝을 내밀었다.

도소진.

장효탁.

이진명.

..

.

굵은 상박 위에는 여러 이름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매일 자기 전에 쓸어보고는 하지.”

죽은 이들 중에는 하나뿐인 누나가 부탁한 조카도 있었고, 어릴 때부터 키운 제자도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요, 도 방주.”

황일동의 허리춤에는 호패가 가득했다.

황이명.

황기준.

왕대력.

..

.

죽은 이들의 이름을 위패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둘은 물끄러미 각자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허허허. 이런 우리 둘을 화해시킬 생각을 하다니.”

“쯧. 어리석은 것인지 용감한 것인지.”

유운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도 방주, 유운 공자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시오?”

“무언가?”

“어린 나이에 이토록 도량이 크고, 생각이 깊다니. 백리에 큰 인물이 났구나. 부럽다. 그런 생각부터 들더이다.”

“나 역시. 왕년의 노(老)가주를 보는 것만 같았네.”

두 사람은 유운을 떠올리며 감탄했다.

“통이 넓은 사내야.”

“사내라. 저토록 어린 젊은이를 사내로 인정한다는 말이오?”

“단지 시험을 통과해서 하는 말이 아닐세. 책을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백리세가 안에서나 천덕꾸러기지, 밖에서는 천하 명문의 자제였다.

목숨을 위협당했다 주장하며 이득을 취할 수도 있었다.

“시험이 그에게는 위협조차 아니었다는 말이겠지.”

“그 와중에도 여유가 있었다는 말이오? 방주를 상대로?”

“그렇다네.”

황일동이 진정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직전 제자는 물론, 소문주조차 통과하지 못한 시험이었다.

“이만하면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휴우. 나 역시 마찬가지요.”

나름 무공과 문파에 자신이 있었다.

‘현급 문파? 천하 명문?’

‘멀지 않다. 한 발자국, 아니 반 발자국만 더 나아가면…!’

그리 생각했다.

도전해볼 만하다 여겼다.

‘내 아들이 공자를 이길 수 있을까?’

황일동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문주뿐만이 아니었다.

유운을 상대할 만한 자가 자신 말고는 누구도 없었다.

“우리 둘 다 착각 속에 살았다. 현급과의 거리가 이리 멀 줄이야.”

“맞소. 가장 나이 어린 막내조차 저 정도라니.”

어린 유운이 저렇게 강하다면, 장년층의 고수는, 장로급 고수는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말인가?

“우리끼리 도토리 키 재기 하고 있었군.”

“그러게 말이오.”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친 후, 허탈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백리세가라. 과연 천하 명문은 명문이로구나.”

“아아…! 명문의 벽은 실로 높고도 높구려.”

둘이 동시에 길게 탄식했다.

“우리 대에는 결코 명문을 넘볼 수 없겠구나.”

“공자가 말한 대로 가진 바라도 잘 지켜야 하지 않겠소?”

“허허허. 그렇지. 그렇고말고.”

두 사람은 무인이기 이전에 문파의 주인.

죽은 자의 원한보다 산 자의 생존이 더 중요했다.

쪼르륵.

도산호가 술병을 들어 올리더니 잔에 따랐다.

하얀 잔 위에 붉은 꽃잎이 동동 떠다녔다.

“가벼우나 실로 무거운 잔이로구려.”

황일동이 탄식하며 잔을 받아들었다.

꿀꺽.

두 사람이 한입에 술을 들이켰다.

진하고 담백한 꽃향기가 입안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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