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서촌에 부는 바람 (5)
“진즉에 피가 아닌 말로 해결할 것을 그랬소, 방주.”
“동감이외다. 어리석은 주인을 만나 수하들만 고생하였구려.”
입장은 다르지만, 각기 한 문파를 이끄는 입장.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니, 의외로 차이를 좁혀갈 수 있었다.
“…….”
“…….”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서로를 마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봐라, 다들 칼을 내려라!”
“도 방주의 말을 듣지 못하였느냐? 어서 시행하지 않고 뭣들 하느냐!”
경악한 얼굴로 반대편을 보며 주춤거리기도 잠시.
다들 검과 도를 거두고 자세를 풀었다.
“해원검이 두 문파의 오랜 원한까지 풀 줄이야. 참으로 잘 어울리는 별호가 아닐 수 없구려.”
황일동의 말에 도산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큰 신세를 졌군.”
“신세를 졌으면 갚아야 하지 않겠소?”
“사내라면 응당 그리해야지.”
늙은 두 무인의 입술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허어! 일이 이리 잘 풀릴 줄은 몰랐습니다.”
금만보가 정자를 바라보며 탄성을 토했다.
원수지간의 두 무인이 서로 술잔을 주고받고, 수하들은 무기를 거두다니?
이전까지 상상도 못 하던 광경이었다.
“모두 공자님 덕분입니다.”
“그게 어찌 제 덕이겠습니까? 두 분께서 결단을 내린 덕분이지요.”
“이제야 말씀드리지만, 솔직히 대화의 물꼬만 틔워도 성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문파가 화해하리라고는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다.
금만보도 역시 마찬가지.
만남 자체만 해도 큰 의미가 여겼다.
그런데 저토록 화기애애한 분위기라니?
굳이 듣지 않아도 결과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공자님이 아니라면 누가 해낼 수 있었겠습니까?”
“너무 많은 피가 흘렀습니다. 문파의 중진조차 매일같이 죽어 나갔지요. 언제 다른 문파가 치고 올라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피는 두 문파가 흘렸는데, 정작 이득은 엉뚱한 문파가 챙길 수도 있었군요.”
“두 사람 다 한 문파의 수장. 이러한 이치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니….”
유운이 빙그레 웃었다.
“내심 누가 말려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문파는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
‘이렇게 계속 싸우다가는 기둥까지 뿌리 뽑히겠어.’
‘누가 말려만 주면 못 이긴 척 화해하고 싶은데….’
고민 중이던 문파나 상단에 놀라운 소문이 들려왔다.
백호문과 흑호방이 화해했다더라.
해원검이 청수향의 삼십 년 분쟁을 끝냈다더라.
처음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에끼,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차라리 개와 고양이가 친구가 되었다는 말일 믿겠네, 껄껄껄.”
하지만 두 문파에서 동시에 선언했다.
흑호와 백호는 그간의 원한을 잊는다.
청수현을 공동으로 다스린다.
그럼에도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손녀와 손자가 혼약까지 맺자, 믿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결정타가 가해졌다.
해원검 백리유운이 다리를 놓아주었다더라.
“해원검이…!”
“그 순하고 어린 공자가 말인가?”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그의 이야기를 했다.
무림판관 정천수도 서촌에 자주 모습을 비춘다더라.
천하 각지에서 중재를 원하는 문파들이 몰려든다더라.
소문은 날개 돋친 듯 퍼졌다.
좋은 선례도 있고, 유운이라는 핑계도 있다.
‘사실 적당히 체면만 세워준다면 화해가 더 이득이지.’
‘그래, 이만큼 싸웠으면 되었어. 마침 명분도 있고. 그만하자.’
분쟁 중인 무림방파, 상단들이 줄을 지어 서촌을 찾기 시작했다.
거기에 금만보의 수완이 빛을 발했다.
“호오, 상당한 고급 객잔인걸?”
“이 정도면 번화한 현의 일급 객잔 못지않구먼.”
외부의 시선을 막아주는 독립적인 장원.
운치 있는 정자. 고풍스러운 예술품까지.
새로 지어진 고급 객잔에 모두가 만족했다.
그가 준비한 사업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소문의 두 강자가 대결하였단 말이로군. 참으로 뜻깊은 장소야.”
“더없이 좋군. 여기서 길고 길었던 정분 싸움을 끝내도록 하지.”
멋들어지게 장식된 비무대 위.
두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유 소저, 마지막으로 묻겠소.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하겠소?”
“유 소저. 서 공자요, 나요?”
젊은 여인은 두 남자 사이에서 얼굴을 붉혔다.
“저, 저도 제 마음을 모르겠습니다.”
서 공자는 부드럽고 자상하고, 천 공자는 사내답고 듬직하다.
어느 남자를 선택해야 할지 스스로도 갈팡질팡했다.
“그럼 운명에 맡기세, 서 공자.”
“좋네. 누가 이기든 패자는 승자를 축복하도록 하지.”
“그래, 깔끔하게 싸우고, 다시 친구 사이로 돌아가세.”
“소저께서도 동의하시오?”
두 남자가 검을 뽑으며 물었다.
“이곳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인연은 하늘이 정해준다 하였으니. 저 역시 운명에 맡기겠습니다.”
여인이 차마 말리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백리세가의 무사부 설영이라고 하오. 주군이신 해원검의 위임을 받아, 두 사람의 비무를 공증하도록 하겠소.”
“……!”
휘이잉…!
한여름의 열기도 식을 정도로 차가운 미남자가 등장했다.
“아아아…!”
유 소저가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멈추었다.
북해 설산보다도 오똑한 콧날.
한낮의 태양보다 빛나는 눈동자.
유 소저의 눈동자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서, 설 공자님 같은 분이 세상에 계실 줄이야. 인생을 헛살았구나.”
그녀가 애타게 되뇔 무렵.
마침내 비무가 시작되었다.
채쟁, 챙!
챙챙챙!
친구였던 두 사내가 운명을 쟁취하고자 겨루었다.
“아무리 자네라도 유 소저를 양보할 수는 없네.”
“나 역시! 이곳에서 그녀를 얻고야 말겠네!”
정련된 검과 검이 맞부딪히고, 피땀 흘려 익힌 무공이 빛을 발했다.
사내들의 땀과 열정에 주변 사람들도 호응했다.
“오오! 검 끝이 살아있는 것만 같네.”
“오래간만에 볼만한 비무가 열렸어!”
사람들의 관심 속에, 비무가 마침내 절정을 향했다.
날카로운 검이 서로의 가슴을 향하는 순간.
채애앵!
“그만! 여기까지!”
설영이 검으로 두 사내의 검을 튕겨냈다.
“저리 빠른 검 두 개를 동시에 막아서다니.”
“과연 설 사부일세.”
“괜히 백리팔수가 될 기재로 뽑혔던 게 아니지.”
사람들이 감탄하는 사이.
쿠웅.
두 사내의 희비가 엇갈렸다.
“결국 유 소저는 자네의 운명이었던 것이로군.”
“미안하네, 친구.”
“아닐세.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받아들여야지.”
서 공자가 씁쓸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휘이잉…!
바람을 타고 영웅건이 흩날렸다.
‘기분은 썩 나쁘지 않구나.’
패배했지만 결코 비굴하지 않았다.
협객전처럼, 해원검의 이야기처럼 아름다운 퇴장이 아닌가?
서 공자는 스스로 만족하며 돌아섰다.
“하하하! 유 소저, 이 천 모가 승리하였소. 그대야말로 이 몸의 짝이…응?”
천 공자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휘이잉…!
힘들게 승리하였건만 비무대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 소저?”
“죄, 죄송해요, 천 공자님. 이곳에서 저의 진정한 운명을 깨달았어요!”
유 소저가 버선발로 사라지는 한 남자의 뒤를 쫓고 있었다.
냉막한 표정의 미남자, 설영이었다.
“내 가슴이 말하고 있어. 이 남자야말로 내 운명이라고!”
부끄럼 많던 소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인 모습이었다.
“설 공자님, 같이 가요!”
“유 소저! 가지 마시오!”
다 큰 사내의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여인은 나비처럼 날아갔다.
“하하하. 커흠.”
“상상도 못 했네, 이리 끝날 줄은.”
“으하하!”
지켜보던 관중들도, 금만보와 유운도.
모두가 큰 웃음을 터트렸다.
“백리의 무사부이시니 누구도 불복하지 못할 거라 믿었는데. 이런 부작용이 있군요, 허허허.”
“설 사부에게 여인이 낀 비무는 피하라고 말해놓겠습니다.”
금만보와 유운은 빙그레 웃었다.
가끔 이런 예외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잘 진행되었다.
“해원검의 일화에서 깨우침을 얻었으니. 한판의 승부로 서로의 원한을 씻어냅시다.”
“동의하오.”
매일같이 비무가 열렸고, 쌓아두었던 감정이 풀렸다.
한 많은 자들이여, 서촌으로 가라!
그곳에 가면 진정한 ‘해원’이 기다리고 있다!
문파, 상단, 무림 고수, 젊은이들.
수많은 이들이 서촌을 찾아왔다.
“허어. 예상보다 훨씬 더 엄청나군요!”
몰려오는 사람들을 보며 금만보가 놀랄 지경이었다.
“참으로 신기합니다. 예상한 것과 달리, 사고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쌓인 감정이 있는 무인들이 모였다.
사사로이 칼부림이 나도, 진작 나야 정상이었다.
“모두가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
“아이를 교육하는 방법에는 혼내는 방법만 있는 게 아닙니다. 칭찬이 오히려 더욱 효과적인 방법이지요.”
유운이 성현의 가르침에 빗대어 설명했다.
“이들은 이곳에 옴으로써, ‘먼저 용서할 줄 아는 대협이다’ 혹은 ‘손을 내밀 줄 아는 협사다’라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
“칭찬을 받으면, 그에 걸맞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기 마련입니다.”
“아아. 그런 깊은 뜻이. 금 모, 오늘도 새롭게 배웁니다.”
금만보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을 토했다.
“모두 공자님이 직접 나서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상인 일동을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상인과 서촌,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일입니다. 어찌 몸을 사리겠습니까.”
귀한 신분의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돈을 뿌려대니.
서촌에 돈이 마를 날이 없었다.
‘어느 명문의 자제가 공자님처럼 직접 서신을 쓰고, 사람을 설득하겠는가?'
금만보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렇게 고생하셨거늘. 사적으로 취한 이득은 하나도 없으시구나. 이래서는 안 되지.’
기여한 바만큼 보상받는다.
금만보의 이러한 신념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공자께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으니, 마땅히 가장 큰 이익을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비할 바 없이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이들이 배불리 먹고, 웃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빙그레 웃는 유운을 보니, 금만보의 가슴이 소녀처럼 두근거렸다.
‘이 사내와 함께라면 할 수 있다!’
천하를 이롭게 하는 상단.
천하 만민을 구제하는 상단.
평생 꿈꿔왔던 꿈이 손에 잡히는 듯했다.
자신과 유운이 그릴 미래를 상상하니 가슴이 설렜다.
‘유운 공자! 영원히 함께합시다!’
중년 사내는 사랑에 빠진 젊은이처럼 뜨겁게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