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서촌에 부는 바람 (6)
“속 좁은 자의 시기는, 하늘을 품은 자를 꺾지 못하는구나.”
적인걸은 탄식하며 서촌을 돌아보았다.
마을은 축제처럼 떠들썩했고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못내 부러웠다.
“처음부터 나의 것이 아니었거늘. 잊자.”
적인걸은 쓸쓸하게 말하며 언덕을 넘어섰다.
터벅, 터벅.
한걸음 걸을 때마다 서촌이 아스라이 멀어졌다.
“유운 공자, 부디 꽃길만 걷길 기원하겠소.”
그때의 감동을 떠올리자 가슴이 따듯해졌다.
하지만 현실은 가혹하고, 냉정했다.
“조가에 진 빚을 어찌 갚는단 말인가.”
흉터투성이의 거한이 쓸쓸히 고개를 떨구었다.
적랑쌍도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은 초라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몰래 빠져나가시는 건가요? 실망이에요.”
“누구냐!”
적인걸이 언제 처져있었냐는 듯 도를 뽑아들었다.
“당신은…, 서문세가의 소저가 아니오?”
비무 준비를 하며 몇 차례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분명 유운 공자에게 목숨까지 바친다고 하셨는데. 이대로 가실 생각인가요?”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소.”
적인걸의 표정은 독을 삼킨 듯 씁쓸했다.
‘내 일로 유운 공자에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지.’
차마 속사정을 말하지 못하고, 말을 삼킬 때였다.
“돈 문제죠?”
“……!”
“아마도 계약 불이행에 따른 배상금 문제겠지요. 그것도 거액일 테고.”
“그것을 어찌 알고?”
적인걸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서문요란을 바라보았다.
“적 대협께서 값비싼 영약을 받았다던데. 욕심 많은 흑산조가가 순순히 내놓았을 리 없지요. 아마도 종신 계약이겠지요?”
“어떻게 거기까지!”
낭인은 보통 단건 계약을 한다. 잘해야 한 달 정도의 단기 계약이었다.
하지만 적인걸의 경우는 달랐다.
“비록 잘려진 일부에 불과했지만, 무려 만년화리의 내단이오. 그것을 준다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소?”
“맞아요. 어지간한 무인이라도 평생을 걸 만큼 귀한 영약이긴 하죠. 하지만 그것이 목줄이 되었겠지요.”
“맞소. 주어진 임무를 해내지 못하면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하오.”
그랬기에 적인걸의 속은 타들어 갔다.
사정을 하던, 무릎 꿇고 빌던 돈을 빌려서 배상금을 내야 했다.
아니면 아예 흑산조가에 노예로 들어가던가.
어느 쪽이든 고통스러운 결정이었다.
“그걸 저희가 해결해준다면 어쩌시겠어요?”
“…서문세가가? 대체 왜?”
적인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유운을 해치려 하지 않았던가?
“공자님을 상대로 강기를 뿜을 때는 저 역시 분노했었어요. 하지만 지난 일을 가지고 감정을 쏟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서문요란의 눈은 나이답지 않게 차가웠다.
“무엇보다 적 대주는 버리기는 아까운 인물이니까요.”
“……!”
“그거 아세요? 서문세가 내부에서는 무림의 주요 인물들을 나름의 기준으로 평가해서 등급을 매긴답니다. 그 기준은 꽤나 정확해서, 요긴하게 쓰인답니다.”
“나는 그럼 몇 등급이오?”
“10등급 중에서 5등급이에요.”
“허허. 생각보다 낮구려.”
“아니, 엄청 높으신 거예요.”
서문요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역에 이름을 날린 신진 고수, 명문세가에서 잘나가는 후기지수조차 10등급.”
“……!”
“무림에서 닳고 닳은 일류고수조차 9등급 혹은 8등급이 고작이니. 절정고수라 하나 5등급이면 오히려 과하다 할 수 있어요.”
“5등급이라….”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4등급까지 드리고 싶어요.”
“…어째서?”
“개인의 무력뿐 아니라, 평판, 인연 또한 중요하지요. 적랑대주로서 쌓은 인맥 또한 무시 못 할 힘이라고 생각해요.”
“허어. 사람을 심고, 사람을 거둔다더니. 서문세가의 눈은 실로 놀랍구려!”
적인걸은 눈앞에 있는 이가 철없는 어린 아가씨가 아니라, 냉정한 사업가임을 깨달았다.
“하나 적 모가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이 정도의 고수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거늘. 왜 나요?”
“고작 능력이 아깝다는 이유뿐만은 아니에요.”
서문요란이 적인걸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영약. 적 대주께서 먹은 것 아니죠?”
“…그것까지 아신단 말이오?”
“전후 사정을 알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요.”
적인걸에게는 절맥(絶脈)에 시달리는 딸이 있다.
음의 기운이 과다하여, 목숨이 위태로운 병이었다.
그런데 적인걸이 받은 영약은 강한 양기로 유명한 만년화리의 내단.
서문요란이 눈치채지 못하는 게 더 이상했다.
“일부러 소문을 냈소. 내가 먹었다고.”
“…딸을 지키기 위함이었군요.”
“그렇소. 강호의 험난함을 익히 알고 있으니 말이오.”
사악한 마두라면, 딸을 납치해서 살아있는 영약이라며 피와 살을 먹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부러 자신이 먹은 척했다.
“그것이 두 번째 이유예요. 빼앗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사실은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신 분이니까요.”
“지, 지키기 위한 싸움이라. 허허허. 이 못난 사람에게 그런 말까지.”
자신을 인정해주는 말에, 적인걸은 목이 메었다.
“저희에게 몸을 의탁하세요. 저희가 깔끔하게 해결해드릴 테니.”
“……!”
자신의 일생을 맡기라는 요구였다.
그것도 단순한 계약이 아니라, 마음을 다한 충성을.
적인걸이 망설인다고 생각했을까.
“서문세가를 못 믿으시나요? 그럼 저를 믿으세요.”
“서문 소저…!”
눈앞의 여인은 실로 당당하고 자신감 넘쳤다.
‘우리 딸도 저렇게 자랄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렸다.
“만약 저조차 못 믿으시겠다면 저와 함께하는 유운 공자를 믿으세요.”
“유운 공자…!”
유운의 맑은 눈빛을 떠올리는 순간, 모든 고뇌는 끝이 났다.
“적 모, 서문세가와 유운 공자에게 일신을 의탁하려 하오. 잘 부탁드리오.”
곰 같은 사내가 정중하게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서문요란은 싱긋 웃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
* * *
“으하하! 그 사납고, 고고하다는 적랑쌍도의 마음을 얻으시다니! 역시 소가주님이십니다.”
호위 동평은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어릴 때부터 보살폈던 소녀가 이렇게 큰 인물로 자라나다니.
감회가 남달랐다.
“후훗. 이건 시작에 불과해요. 해야 할 일이 많아요.”
서문요란은 눈을 반짝이며 서신을 작성했다.
모든 지부에 전달함. 서촌의 비무를 신속히, 널리 전파할 것.
유운 공자에 대한 평판 작업 역시 함께 진행할 것.
“가문의 눈뿐 아니라 입까지 움직이시려는 거군요!”
“맞아요. 가만히 있어도 소문이 나고 명성이 올라가겠지만. 우리가 기름을 부어주면 더 타오르겠죠?”
후계전을 위한 밑거름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허어. 간자들까지…!”
동평은 주변을 둘러보며 뒷말을 삼켰다.
거대 상단의 주인, 유력한 고수들을 돈이나 압력 등으로 회유하는 작업이었다.
“유운 공자님 같은 군자(君子)는 못 하실 일이지만. 꼭 필요한 일이예요. 강호는 현실이니까요.”
“물론입니다.”
감동으로 움직이는 이는 소수.
두 사람은 결국 다수를 움직이는 것은 이득이라고 믿었다.
“이거 유운 공자님께 자랑할 수 없는 게 너무 아쉽군요. 허허허.”
“언젠가 알아줄 날이 올 거예요.”
서문요란과 동평은 뿌듯한 표정으로 서촌에 들어섰다.
바깥을 돌아다니느라, 정작 서촌에는 신경을 못 썼다.
‘유운 공자는 잘 계실까?”
궁금해하던 때였다.
“여, 여기가 서촌이 맞나요?”
“서가진미가 있는 것을 보니, 맞기는 한데….”
두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고 입을 떡 벌렸다.
입구부터 달랐다.
“두 분 서촌에는 처음이십니까? 서촌제일루로 오십시오. 명인이 빚은 노주의 맛이 기가 막힙니다.”
“강하객잔은 어떠십니까? 삼층 누각에서 바라보는 강변의 풍경이 끝내줍니다.”
거리 양옆으로 멋들어진 주루와 객잔이 가득했다.
“이들은 선하문의 무인이로군요. 저들은 남해상단의 상인들이고요.”
“허어, 사람이 몰린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소문이 실제만 못하군요.”
중재자를 찾아온 무림인과 기회를 찾아온 상인으로 바글바글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챙채쟁!
서촌의 한가운데 자리한 비무대.
두 사내가 치열하게 싸우고, 한 여인이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이 소저는 나의 여인이다.”
“아니, 양보할 수 없다!”
뜨거운 비무대와는 반대로, 주변 관객들의 분위기는 유쾌했다.
“여기가 바로 서촌에서 가장 뜨거운 비무대입니다. 한 시진 동안 둘러보고 가겠습니다.”
깃발을 든 젊은이가 한 무리의 사람을 이끌고 있었다.
“허허. 검술 한번 멋들어지구만.”
“풍광만 보고 가도 좋을 텐데. 크흠, 굳이 검까지 들어야 하나?”
중년 사내들의 말에 여인들이 끼어들었다.
“아이참, 모르는 소리 하지 마세요. 사랑을 위해 검을 들다니. 얼마나 낭만적이에요?”
“그러게요. 얼마나 부러워요? 나도 젊을 때는 인기 많았는데.”
“크흠. 여보, 적당히 구경하고 돌아갑시다.”
그런 무리는 한둘이 아니었다.
관객들을 노리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기념품 사세요! 유운 공자와 적인걸 대협의 싸움을 그린 그림입니다!”
“검을 든 목각인형은 어떠세요? 살아있는 듯 생생하지 않습니까?”
상인들이 각종 물건까지 팔았다.
“허허허. 달라져도 너무나 달라졌군요.”
동평은 한참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유운 공자가 있다하나, 겨우 시골 마을이거늘.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만서각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촌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왜 몰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들이 파는 것은 술이나 풍경 따위가 아니에요.”
“그럼 무엇입니까, 소가주님?”
“이야기예요.”
“이야기!”
동평은 그때서야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허어. 과연. 그렇군요!”
사람들은 유운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눈을 반짝였다.
“그때 적인걸 대협이 후우웅!”
“으허헉!”
“그때 유운 공자께서 꽈아악!”
“오오오!”
청년의 말에 귀 기울이는 모습은 마치 협객전을 처음 접한 아이들처럼 해맑았다.
“유운 공자뿐만이 아니에요. 비무대를 보세요.”
“……!”
멋들어지게 새 단장한 비무대.
계속 젊은이들이 올라가서 검을 겨루었다.
“새로운 사람들이 오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니. 비무대는 이미 스스로 생명력을 얻은 것과 같아요.”
“실로 놀라운 상술이로군요!”
동평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감탄했다.
“호호호. 비상한 머리를 가진 자가 틀림없어요.”
“그렇습니다. 덕분에 아이들 볼에 살이 붙고, 마을 사람들 얼굴에 꽃이 피었으니. 보기가 참 좋습니다.”
동평이 흐뭇하게 웃을 때였다.
“호호호. 참으로 멋지지 않아요?”
서문요란이 소리 높여 웃었다.
“하하하. 그렇습니다.”
“분명 전문가의 손길이 닿았어요.”
노점상의 배치조차 행인의 동선까지 고려하여 설계되었다.
유운이나 백리세가의 솜씨는 분명 아니었다.
“전문가라. 누굴까요?”
“그러게요. 누굴까요.”
서문요란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호호호. 누가 감히 제 밥상에 숟가락을 얹었을까요?”
“……!”
그때서야 동평은 깨달았다.
‘조, 좋아서 웃으신 게 아니었구나.’
서늘하고 차가운 눈동자.
그곳에서는 영역을 침범당한 암사자의 분노가 엿보였다.
‘나와 유운 공자만을 위해 차려놓은 상이거늘. 감히?’
두 사람만의 은밀한 공간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호호호. 서촌을 이렇게 부흥시키다니. 누군지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겠지요?”
서문요란의 표정은 말과는 정반대였다.
눈앞에서 생선을 빼앗긴 고양이처럼 무서웠다.
꿀꺽.
‘소가주님께서 화가 단단히 나셨구나!’
“감히 유운 공자님의 것을 빼앗다니. 용서하면 안 되겠지요? 호호호!”
소리 높여 웃는데, 입꼬리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쯧쯧. 누군지 모르지만 잘못 걸렸어!’
동평은 그 사람에게 미리 조의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