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서촌에 부는 바람 (8)
“허어. 소고기 수육의 육즙이 살아있구만.”
“행수님, 여기 채소무침도 같이 맛보십시오. 새콤하면서 담백하니. 맛이 좋습니다.”
사방이 탁 트인 정자 위.
고급스러운 비단옷을 입은 노인과 중년 사내가 젓가락을 바삐 놀렸다.
“내 천하를 돌아다녀 봤지만, 이렇게 정갈한 상차림은 처음일세.”
“어지간한 세가의 숙수보다 더 낫습니다.”
두 사람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장, 어디 현에서 유명한 숙수라도 데려왔소?”
노인의 물음에 왕 영감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두 저희 며늘아기의 솜씨입니다.”
“호오. 시골에 명인이 숨어있었구만.”
“오랜만에 입맛이 도시나 봅니다. 주인장, 요리 종류별로 하나씩 더 가져와 보게.”
결코 싸지 않은 가격인데도, 요리를 추가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왕 영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과연 큰 상인일수록 손이 크구나!’
이들은 먼 곳에서 온 면화 전문 상인들로, 서촌에서 인연이 닿은 무림세가와 계약을 앞두고 있었다.
큰 거래를 앞두고 작은 돈을 아끼면 부정 탄다!
오래 굴러먹은 상인일수록 이런 미신을 믿었다.
그랬기에 이들은 아낌없이 돈을 뿌리며, 거래 성공을 기원했다.
“허허. 뒤는 산수화에서나 볼 법한 기암절벽이고, 앞은 서강이 도도하게 흐르니. 입뿐 아니라 눈까지 호강하는구려.”
“껄껄껄. 주인장은 좋으시겠소. 이리 풍광이 좋은 곳에서 사시니.”
두 사람이 앉은 정자 너머.
서촌의 경치가 한눈에 보였다.
“저야 날 때부터 이곳만 보아온지라. 좋은 줄도 몰랐습니다.”
“풍광도 좋지만, 목이 더욱 좋네.”
노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붐비는 서촌과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고. 조금만 더 가면 그분이 계시는 만서각이 있으니. 객잔이나 장원으로서 이보다 좋은 위치를 찾기 어렵지.”
“귀인께서 조언해주셨습니다.”
“필시 안목이 뛰어난 상인이겠구만.”
“저도 그리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왕 영감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금 대인의 예상이 모두 맞았구나!’
처음 왕가장을 개조하여 손님을 받으라는 말을 들을 때만 해도 많이 망설였다.
“금 대인, 객잔 일이 꽤나 고되다고 들었습니다. 과연 저희가 할 수 있을지.”
“평범한 객잔을 만들라는 뜻이 아닙니다.”
금만보가 빙그레 웃으며 설명했다.
“귀한 만남을 준비하는 손님들을 위한 특별한 공간이지요.”
“객잔이라기보다는 장원 임대에 가깝군요. 그런데 그걸로 먹고 살 정도가 될는지요?”
“그런 손님들일수록 격도 높고 씀씀이도 크니. 객잔보다 일은 적은데, 수입은 훨씬 나을 것입니다.”
그 이후의 일은 금만보의 예상대로였다.
“독립적인 별채라. 귀하신 분을 모시는데 딱 좋군.”
“호오. 음식 맛도 좋고, 위치도 적당하고. 좋네, 우리 가문이 통으로 예약하도록 하지!”
왕가장은 가문 간의 회의나 중요한 상단 계약을 앞두고 꼭 찾는 장소가 되었다.
‘내 살아생전에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왕 영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꿈도 꾸지 못한 돈을 벌어서도, 마을 내에서 유지 취급을 받아서도 아니었다.
‘저 빌어먹을 놈이 사람 구실을 하다니!’
평생 빌빌대며 사고나 치던 아들 녀석이었거늘.
“여기 요리 나왔습니다, 손님.”
“서강 나루터 말씀이십니까? 제가 또 한 길 찾기 하지요, 하하하!”
항상 움츠리고 다니던 녀석이 어깨를 펴고 다닌다.
의기양양이 지나쳐서일까. 가끔 실수하기도 했다.
“어이쿠!”
와장창!
발에 걸릴 것도 없는데 혼자 넘어져서 그릇을 깨 먹기도 했다.
“으이구. 화상아!”
짜악!
며느리가 아들의 등짝을 내리쳤다.
아들은 등짝을 맞았는데도 엄살은커녕 헤벌쭉 웃었다.
“하하하, 경매. 고맙소, 고마워.”
같이 산 세월이 얼마인가.
등짝을 치는 손길은 부드럽기 짝이 없으니.
한탄 대신 애정이 가득했다.
“손 다치오, 내가 치우겠소.”
“비켜요, 손님 기다리시겠네.”
“허어, 예쁜 손 베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들이 며느리의 손을 은근슬쩍 쓰다듬었다.
“나이도 먹은 양반이. 주책이야, 주책. 다들 본다고요.”
“보면 좀 어떤가.”
며느리가 얼굴을 붉히면서 손등을 탁 쳤다.
그러면서도 싫은 기색은 아니니.
“내외가 아웅다웅하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구만, 껄껄껄.”
박 씨 영감이 나타나서 웃었다.
“이를 말인가. 자네 아들도 일이 잘 풀린다고 하지 않았나?”
“아무렴. 한동안 방황하던 녀석이 이번에 다시 마음을 잡았네.”
박 씨의 아들은 아내를 잃고 석공 일을 손에서 놓았었다.
하지만 비무대 공사 이후, 서촌에 솜씨 좋은 석공이 있다며 일감이 몰리기 시작했다.
시름을 잊는데 일만 한 게 없으니. 열정적으로 일에 빠져들었다.
“무엇보다 손자 녀석이 있으니까,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지.”
“고놈 얼굴에 살이 붙으니까 못 알아보겠더만. 잘생겼어!”
“흐흐흐. 날 닮아서 그래. 젊을 때 미남 소리 좀 들었거든.”
“자네의 헛소리까지 기분 좋게 들릴 날이 오다니. 허허허.”
왕 씨와 박 씨 손자들이 들판에서 뛰어놀았다.
두 사람이 흐뭇하게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와아아아!”
“소화다!”
“만서각에서 소화가 내려온다!”
아이들이 환호하며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짜잔! 이거 내가 만든 간식이다. 봐봐.”
소화가 품에서 간식 주머니를 꺼냈다.
“우와아아! 빙당호로야.”
“이렇게 예쁜 빙당은 처음 봐.”
“빙당보다 소화가 더 예뻐!”
“치잇!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손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소화를 칭찬했다.
“후훗. 기분이다. 다들 먹어볼래?”
“응응!”
“맛있어, 맛있어!”
“소화, 너도 먹어.”
“히히, 기분 좋다.”
꼬마들끼리 키득대면서 노는 모습이, 그렇게 즐거워 보일 수가 없었다.
“저 아이는 유운 공자님의 시비가 아닌가?”
“맞네. 보아하니 저 아이가 아이들의 대장, 아니 꽃인가 보네.”
소화 역시 백리세가의 종복.
원칙적으로는 평민보다 낮은 신분이었다.
하지만 서촌에 그녀의 뒤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껄껄껄. 유운 공자님과 함께하는 아이라면 볼 것도 없지.”
“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아이들은 깔깔대며 술래잡기를 했다.
평생 꿈꿔오던 행복한 풍경이었다.
“서촌에 대운이 깃들었어, 대운이.”
“모두가 유운 공자님 덕분이지.”
“이를 말인가, 허허허.”
“항상 오늘만 같으면 좋겠구만.”
“그러게 말일세.”
두 사람은 마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 * *
“휴우. 오늘만큼은 소화가 부럽구나. 저리 인기가 많다니.”
만서각 제일 꼭대기 층.
유운은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한번 외출할 때마다 아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니.
소화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허허. 공자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어찌하십니까?”
장노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서탁 위를 가리켰다.
서신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공자님을 뵙고 싶어 하는 이들이 줄을 섰습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법.
비무 이후 유운의 소문이 퍼져나가니.
유명한 세가나 상단에서도 유운을 보겠다며 난리였다.
하지만 유운은 모두 거절하고 만서각에서 나오지 않았다.
“성현께서는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오니 비무에서 지친 몸을 회복하면서, 그간 얻은 깨달음을 다듬고자 합니다.”
무림인에게 무공의 발전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법.
“저런 고수가 되었음에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다니.”
“과연 명가의 후손일세. 거절하는 말도 어찌 이리 고풍스러운지.”
“만나겠다는 사람이 좀 많은가. 몸이 열이어도 부족했을 걸세. 잘한 일이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오히려 감탄했다.
하지만 두루마리 세상 속에서는 달랐다.
‘휴우. 참으로 처참하구나.’
수련하는 장면을 열심히 찍어서 올렸건만.
【제목 : 백리팔검 수련】 [조회수 : 2]
【제목 : 삼재검법 분석】 [조회수 : 1]
【제목 : 육합검법 수련】 [조회수 : 2]
‘…….’
조회수는 대부분 1 아니면 2.
그나마 두 스승이 번갈아 가며 보아준 덕분이었다.
반면 다른 이들의 동영상은 달랐다.
- 본인이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찍은 영상이오. 심심할 때 보면 좋을 것이오.
쥐수염에 작은 키의 사내.
겉보기에는 결코 고수 같지 않았다.
하지만 유운의 눈이 곧 휘둥그레졌다.
솨아아…!
사내는 갈대밭 위를 평지인양 달렸다.
【제목 : 초상비 시연】 [조회수 : 209]
‘풀 위를 걷는 놀라운 경공이거늘. 조회수가 이 정도 뿐이라니.’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목 : 등평도수란 이런 것이다!】 [조회수 : 1,392]
‘등평도수!’
물 위를 걷는다는 절세의 신공이니.
천하십대고수조차 꿈도 못 꿀 경공이었다.
그조차 다음 동영상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제목 : 어검비행】 [조회수 : 24,209]
‘실로 터무니없는 제목이로구나.’
검을 타고 하늘을 난다니?
어지간한 유운조차 고개를 가로저을 정도였다.
하지만 모든 조회수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호기심에 동영상을 재생하자,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졌다.
‘신선들이 사는 곳이 있다면 여기겠구나!’
전설의 무릉도원이 이곳만 할까?
나무에는 탐스러운 복숭아가 열려있고, 강에서는 맑은 영기가 흘러넘쳤다.
‘저, 저것은 설마?’
투명하게 빛나는 샘물 너머.
처음 보는 동물이 숲을 거닐고 있었다.
사슴의 몸, 용의 머리, 하얗게 빛나는 뿔.
‘기린(麒麟)!’
상고시대에나 존재했다는 영수(靈獸)였다.
‘진정 신선계였구나.’
두근, 두근.
유운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렇다면… 설마?’
까마득히 높은 하늘 위.
조그마한 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이 커지면서, 하늘이 울렸다.
솨아아아…!
마치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었다.
그리고 한 노인, 아니 신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
유운은 눈으로 봤음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때로는 한가롭게 노니는 학처럼.
때로는 하늘을 가르는 벼락처럼.
신선이 검을 타고 하늘을 날고 있었다.
‘아아아…!’
그 광경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유운은 감동에 젖어서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을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동영상을 보았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였구나!”
조금의 재능은 있는 줄 알았는데.
하늘 위의 신선에 비교하니 너무나 초라했다.
유운이 탄식하며 자책할 때였다.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더냐?
매화검선이 기가 막혀서 외쳤다.
잠시 볼일을 보고 온 사이.
제자가 축 늘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 대체 무슨 일이길래?
매화검선은 유운의 화면을 같이 보았다.
- 허허허. 녀석 참. 난 또 뭐라고.
유운을 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황당한 질문을 하는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