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서촌에 부는 바람 (9)
- 네가 개구리라면 당대 고수들은 지렁이일 것이다.
“…….”
- 믿어라. 너의 재능은 최고이니라. 이 매화검…, 아니 매검노인이 보증한다.
“위로 감사합니다, 스승님.”
유운이 부드럽게 웃자, 매화검선은 오히려 한숨을 쉬었다.
- 녀석, 내 말이 그저 인사치레라고 생각하는구나.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 한 가지 물으마. 누가 이 ‘하늘의 서고’에 기록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
- 조회수 바닥인 이들조차 천하에 이름을 날린 고수이자 생전에 넘쳐나는 재능을 자랑했던 천재이니라.
“……!”
- 너는 그런 이들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아니 훨씬 더 뛰어나다.
유운의 얼굴에 근심이 조금 가셨다.
- 게다가 쌓아온 세월이 다르다. 어검비행이라. 고작 일백 년의 삶으로 가당키나 하겠느냐?
“……!”
- 올린 이의 이름을 눌러보거라.
“설마 함자를 손으로 누르라는 말씀이십니까? 어찌 신선을 함부로 모욕하겠습니까.”
- 아, 이놈 이럴 땐 답답하네. 괜찮으니까 그냥 좀 눌러보거라.
어느새 나타난 종남일패가 한마디 거들었다.
“휴우. 알겠습니다.”
유운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이름을 누르자, 조그마한 창이 떴다.
“이, 이것은?”
- 올린 이의 기본적인 정보이니라.
- 정보창이라고도 하지.
매화검선의 말에 종남일패가 끼어들었다.
- 옛날에는 생전의 이름, 별호는 물론, 출신, 무공이력까지 다 나왔는데. 시대가 달라졌다며 싹 다 가려버렸으니, 에잉.
- 그래도 가장 기초적인 정보는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운아, 이름 옆의 숫자가 보이느냐?
동영상을 올린 사람마다 각기 다른 숫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100이나 200은 드물었고, 대부분 400에서 500 사이.
1,000을 넘는 이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서, 설마. 이것이 나이란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신선이라지만 이렇게 나이가 많다니?
유운이 깜짝 놀라자, 매화검선이 고개를 저었다.
- 아니다.
“아, 저는 설마했습니….”
- 이것은 나이가 아니다. ‘하늘의 서고’에서 활동한 햇수일 따름이지.
“……!”
- 살아생전에 수련한 시간도, 신선계에서 홀로 수행하던 시간도 빠졌으니. 실제 수련 기간은 훨씬 더 길 것이다.
“맙소사!”
유운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검비행을 한 신선 옆에 적힌 숫자는 무려 1,129!
까마득히 오랜 시간 동안 묵묵히 수련했다는 뜻.
어마어마한 세월의 무게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이제 겨우 글을 깨우친 아이가 스스로를 성현에 비교한 꼴이군요. 송구합니다, 스승님.”
- 너에게 시간은 많고, 재능은 넘쳐나니. 불안해하지 말거라. 겨우 시작일 뿐이니라.
인자한 스승님의 말씀에 유운은 가슴이 따듯해졌다.
‘부족한 제자를 이리 신경 써주시다니.’
유운은 다시 한 번 감동했다.
한편으로 부끄럽기도 했다.
“이런 분들의 눈을 어지럽히다니. 저의 수련 영상은 내리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 아니다. 그건 또 그렇지 않다.
매화검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 생각은 물과 같다. 오래되면 고이고 썩기 마련이다.
“……!”
- 항상 새로운 지식, 관점을 받아들여야 벽을 넘어설 수 있는 법! 너에게도, 신선들에게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가슴을 울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초라했다.
무언가 서로 토론도 하고 해야 발전할 텐데.
[댓글 수 : 0]
동영상에는 누구도 댓글을 남기지 않았다.
- 크크크. 소심한 녀석. 조회수 때문에 그러느냐?
“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종남일패의 말에 유운이 얼굴을 붉혔다.
- 이번에는 다른 영상을 올렸겠지?
“네. 적 대협과의 비무 영상을 올려보았습니다.”
- 영상을 확인해 보거라. 흐흐흐. 내 생각이 맞다면, 반응이 좀 있을 것이다.
‘휴우. 신선의 무공을 두고 누가 저의 초라한 무공에 관심을 보이겠습니까?’
그렇다고 인자하신 스승님의 배려를 무시할 수는 없다.
유운이 별 기대 없이 조회수를 확인할 때였다.
【제목 : 해원검 대 적랑쌍도】 [조회수 : 25]
“……!”
유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호오. 올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 정도라니.
- 내 반응이 좋을 줄 알았다. 이 얼마만의 ‘날 것의 전투’더냐. 흐흐흐.
그 사이에도 동영상의 조회수는 빠르게 오르고 있었다.
[조회수 : 32… 46… 57… 64…]
유운은 자기도 모르게 동영상의 아래를 확인하였다.
“허억!”
조회수만큼이나 많은 댓글이 붙어 있었다.
와글와글.
시장통을 연상케 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제각기 떠들고 있었다.
└ 오호라. 투닥거리는 꼴이 제법 재미있구나.
└ 검 끝이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니. 날 것의 맛이 살아있네, 그려.
└ 끌끌. 요즘 신선들은 심검이니 무형검이니 하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검기만 날려대니.
└ 이를 말인가. 수준 높은 것은 알겠으나. 영 보는 재미는 없지 않았나.
└ 이런 살아있는 대전은…. 후후, 오랜만에 보는구만!
몇몇 신선이 간만의 소일거리를 찾았다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저에게는 나름 목숨 건 싸움었습니다만….’
근래 보기 드문 혈전이었다며, 다들 감탄하며 칭송할 정도였는데.
여기서는 아장아장 걷는 아기 취급이었다.
- 섭섭하게 여기지 말고, 정보창을 확인해 보거라.
“……!”
[이름 : 청성일소]
[활동 기간 : 252년]
- 나이 든 척하기에 어른인 줄 알았는데. 아직 아이구먼. 한창 기어 다닐 나이야!
정보를 본 종남일패가 껄껄 웃었다.
“아, 아기라니요? 그럼 스승님께서는?”
- 커흠. 보자…. 올해로 서고 활동 기간만 700년 차로구나!
“……!”
- 나 정도면 공덕을 넘치도록 쌓은 신선 중 신선이라 할 수 있지. 능히 선계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인재로….
종남일패가 뿌듯한 목소리로 말할 때였다.
- 그 이야기, 투선 어른들께 그대로 들려드려도 되겠나?
- 서, 설마 그분들에게 이르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종남일패가 움찔하면서 눈치를 보았다.
- 아니지? 고고한 화산의 협객이 그럴 리가 없….
- 옥로주 한 병!
- ……!
- 딱 한 병만 주면, 내 입을 다물지.
- 오, 옥로주를? 그게 얼마나 귀한 술인지 알고 하는 말인가! 도원향에서만 자라는 도화 나무에 맺힌 이슬로 빚어서 천년을 묵혀야 나오는 보물이거늘….
- 그럼 투선 어르신들과 개별적인 가르침의 사간을 갖는 것도….
- 화산이 도적을 낳았구나, 도적을!
- 옥로주라면 내 욕정도야 달게 받겠네, 껄껄껄!
종남일패가 하늘을 향해 울부짖고, 매화검선은 흐뭇하게 수염을 쓰다듬었다.
“투선이라. 감히 어떤 분인지 여쭈어도 될는지요?”
- 아쉽게도 인과의 제한으로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단다. 단 하나….
매화검선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 최소한 삼천 년!
“……!”
- 인고의 세월을 이겨내야만 오를 수 있는 지고한 위치이니라.
유운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두 분의 스승조차 하늘과 같거늘. 그 너머라니!’
그러니 천하제일 고수조차 아장아장 기는 아기로 보일 수밖에 없으리라.
‘이런 세상과 연이 이어지다니. 하늘의 도우심이로구나!’
유운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다른 댓글들도 확인했다.
└ 허허. 아이들 칼싸움을 보니 옛날 생각나지 않나?
└ 암. 그때는 돈도 명성도 없었지. 옆구리에 달랑 칼 한 자루뿐이었어.
└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서로 죽도록 싸우고, 배 대충 꿰맨 후, 술 진탕 마시면서 풀고….
└ 치열했지만, 낭만이 있었지.
└ 벌써 몇백 년이나 흘렀구나! 세월이 참으로 무상하구나….
두 신선이 주거니 받거니 과거를 회상하기도 했고.
└ 요 꼬맹이들 보게. 칼에서 제법 피 맛 좀 나는데?
└ 여윽시 싸움 중 최고는 ㅈ밥 싸움이지.
└ 크크크. 자네도 뭘 좀 아는군.
└ 옳지! 거기서는 그렇게 훅 들어가야지. 어린놈이 더 잘하네!
└ 호오. 늙은 놈도 제법 매워. 이거 꽤 볼만한데?
어린아이처럼 신나게 댓글을 다는 신선도 있었다.
물론 시비를 거는 신선도 있었다.
└ 사내새끼들이 칼을 들었으면 최소한 목부터 자르고 인사말을 나누어야지. 무슨 계집애처럼 구시렁구시렁….
└ 이보게, 목을 자르면 말을 못 하는데 무슨 인사인가?
└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감히 나한테 시비 거는 겐가?
└ 그게 무슨 시비인가?
└ ㅈ같은… 나 혈교의 백마(百魔)야. 백마평의 지배자. 혈교의 최강자! 생전에 봤으면 말도 못 붙일 놈이….
“어, 어찌 신선께서 이리…?”
신선답지 않은 거친 언행에 유운이 당황할 때였다.
- 쯧쯧. 출신은 못 속이는군. 저런 폭급한 성정으로 어찌 신선이 되었는지.
뼛속까지 정도 명숙인 매화검선은 눈살을 찌푸렸고.
- 저 새끼 아직도 저러고 있네. 크크크.
구를 만큼 구른 종남일패는 킬킬 웃으며 눈을 빛냈다.
- 아슬아슬하네. 조금만 기다려봐라. 재밌는 일이 생길 거다.
댓글 밑에서는 싸움이 한창이었다.
└ 허허. 생전의 명성이 무슨 소용인가? 신선이 되었어도 아직도 얽매여 있단 말인가?
└ 너 나 무시하냐 시***아?
백마가 댓글을 쓰기 무섭게 붉은 글씨가 번쩍였다.
- 부적절한 단어입니다. 언행에 주의하여 주십시오.
└ 이런 개***! 나 백마야, 내가 말하겠다는데 네가 뭔데…
- 부적절한 단어 사용으로….
└ 관리하는 새끼 누구야? 나와! 나오라고!
- 부적절한 단어의 반복된 사용으로 인해 서고 내 발언이 하루 동안 정지됩니다.
└ 읍읍읍!
입에 재갈이 물리는 사진이 뜨더니, 이후 그가 남기는 모든 말이 ‘읍’으로 표시되었다.
└ 우와! 백마 녀석, 차단당했어!
└ 크크크크. 그놈 말 험하게 하더니. 내 그럴 줄 알았다.
└ 신선이 되었으면 체통 지킬 줄도 알아야지.
└ 싹퉁바가지 없는 놈. 쌤통이다.
- 부적절한 단어입니다.
└ 아, 알았네. 내 자제하지.
금세 소문이 퍼졌는지, 다른 신선들도 몰려들었다.
└ 백마 차단당한 거 구경 왔네만. 정말이구만.
└ 으허허! 속이 다 시원하다!
└ 읍읍읍!
└ 약 오르지? 으하하!
└ 읍읍읍!
말 못 하는 백마와 신선들의 싸움이 인기에 불을 붙였다.
└ 여기에 못 보던 얼굴들이 나온다지?
└ 이거 얼마만의 칼싸움 영상이야?
└ 와. 얼굴 좀 봐. 둘 다 파릇파릇하네.
└ 오호. 이거 보는 맛이 있네. 재밌네. 신선해!
새로운 신선들이 몰려드니.
[조회수 : 82 / 댓글 수 : 59]
조회수와 댓글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 이게 대체?”
유운은 실감이 나지 않아 볼을 꼬집었다.
- 흐흐흐. 무공의 경지와 사람의 인기, 둘의 공통점이 무엇인 줄 아느냐?
종남일패가 능글맞게 말을 이었다.
- 흐름이다.
“……!”
- 막힐 때는 절대 못 넘을 것 같은데.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은데….
종남일패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 딱 한 번.
“……!”
- 딱 한 번만 넘어서면, 미친 듯이 달릴 수 있으니. 이를 일컬어, 흐름을 탔다고 한다!
[조회수 : 125 / 댓글 수 : 7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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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247 / 댓글 수 : 134]
그 순간에도 조회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조용하던 절간이 관광지가 된 듯 미어터지니.
[조회수 : 721 / 댓글 수 : 251]
“마, 맙소사!”
바야흐로 ‘흐름’이 폭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