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55화 (107/114)

제55화

서촌에 부는 바람 (11)

채쟁챙!

만서각의 연무장.

두 사람의 검이 교차하며 맑은 금속음을 냈다.

‘이토록 유려하고 아름다운 검술이라니. 마치 화폭을 채우는 붓과 같구나!’

설영은 유운의 초식을 보면서 내심 감탄했다.

꽃처럼 눈을 현혹하면서 빈틈을 찔러오니, 상대하기가 극히 까다로웠다.

‘강호에는 숨겨진 신비 문파가 그리 많다고 하더니. 공자께도 연이 닿았나 보구나!’

설영은 주군의 기연에 기꺼워하며 미소 지었다.

챙챙…팅!

그렇게 검을 나누기를 한참.

비무 형식의 수련이 끝이 났다.

“주군, 이만하시지요. 제가 졌습니다.”

설영이 검을 내리고 수건을 들어 올렸다.

전력을 쏟은 탓에 온몸에서 땀이 쏟아져 내렸다.

“적 행수와의 비무 이후 무공이 더욱 느셨군요. 내공을 쓰고도 당해내지 못할 줄이야.”

“이게 어찌 온전히 저의 실력이겠습니까? 모두 종조부(할아버지의 형제)께서 주신 담로검 덕분이지요.”

“하하하, 주군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천하의 무림인들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검 하나 들었다고 천하 고수가 되는 것은 책 속에서나 있는 일.

유운 역시 이를 모를 리 없음에도, 설영의 체면을 계속 세워주려고 했다.

“검기를 감당하는 것은 이름난 명검조차 하지 못합니다. 담로검이 아니었다면 어찌 설 사부의 검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명검, 아니 보검이라 불러 마땅한 보물이었다.

그럼에도 설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병기가 뛰어나다 한들, 어찌 방금의 승부까지 뒤집을 수 있겠습니까?”

서로의 실력이 같을 때라면 확실히 유리할 것이다.

하지만 한쪽이 내공을 자유롭게 쓰고, 다른 한쪽은 전혀 쓰지 못한다면?

‘많이 유리한 정도가 아니지. 무림인이라면 모두가 욕할 정도이니.’

그런 상황에서 유운이 가볍게 승리하였다.

두 사람의 실력 차이는 실로 압도적이라 할 수 있었다.

“서로 비등하게 싸우던 것이 어제 같은데, 어느새 이런 경지에 오르시다니. 실로 놀라운 무재(武才)입니다.”

설영은 유운을 올려다보며 경탄했다.

유운이 멋쩍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저의 섣부른 조언이 설 사부의 깨달음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닐지 걱정입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실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결코 빈말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주군 덕분에 무공이 매일 일취월장하였습니다. 칠룡삼봉이라면 몰라도 백리팔수라면 능히 감당할 자신이 있습니다.”

“본가의 백리팔수를 말씀이십니까?”

유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사가들은 무인의 순위를 추정하거나 별호를 붙이길 즐겼다.

칠룡삼봉은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기재였다.

하지만 천하에 후기지수가 그들만 있을 리 없다.

지방마다, 세가마다 각자 뛰어난 이들을 손꼽고는 했다.

백리팔수는 그중 백리세가에서 직접 뽑은 별들이었다.

“칠룡삼봉이 뛰어나다 하나 겨루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지.”

“그렇고말고. 백리팔수 역시 전혀 부족할 것이 없지!”

“내 평생 소원이 우리 가문에서 백리팔수를 배출하는 일일세.”

“그러면 내 딸을 바로 시집보냄세, 껄껄껄!”

백리의 품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까마득히 높은 위치에 있는 고수!

오랜 세월 본가에서 자라온 유운 역시 그리 생각했다.

“가문의 무공인 백리팔검에 빗대어 만든 이름인 만큼, 결코 실력이 범상한 자들이 아닐 터인데….”

자칫 설 사부를 무시하는 것으로 들릴까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찌 모르겠습니까? 저 역시 한때는 백리팔수가 되리라 손꼽히던 사람 중 하나였는데 말입니다.”

설영은 적어도 십 년 내에 필수가 되리라 확실시되던 인물이었다.

물론 사고를 치고 본가와 멀어지기 전의 평가였다.

‘백리팔수와는 영영 멀어진 줄만 알았거늘.’

내공을 키워줄 영약 지원도 끊겼고, 심오한 가르침을 내려줄 선배도 없었다.

남들이 성큼성큼 나아갈 때 제자리에서 지켜만 보고만 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그때 운명처럼 하늘에서 유운이 내려왔다.

“이래 봬도 무 사부입니다. 무공의 경지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 정확합니다.”

“설 사부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맞겠지요.”

유운이 빙그레 웃으며 검을 정리했다.

짧지 않은 비무였음에도 땀 한 방울조차 나지 않았다.

‘내가 그들에게 모자를 리 없다. 그렇다면 나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주군이라면…!’

그 오만한 본가의 사람들 앞에서 유운이 진정한 실력을 선보인다면?

상상만 해도 등줄기가 찌릿했다.

‘지금의 나는 터무니없이 부족하구나!’

설영은 속으로 탄식했다.

유운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용!

그의 곁을 지키기 위해서는, 죽어라 수련해야 하리라.

그렇게 굳게 다짐할 때였다.

“얼음덩이와의 놀이는 끝나셨습니까, 각주님?”

커다란 덩치가 햇볕을 가렸다.

“놀이라니? 거암 네 이놈, 이 무슨 무례더냐!”

“젓가락 들고 깨작깨작하는 게 무슨 수련이야? 사내라면 자고로 근육을 조져야지!”

거암이 웃통을 깐 채로 팔뚝을 들어 올렸다.

“보아라. 실로 크고 아름답지 않으냐!”

구릿빛 피부 아래.

구렁이 같은 근육들이 꿈틀거렸다.

“무작정 몸만 키운다고 강해지는 줄 아느냐? 그런 식이면 벌목꾼들이 천하 최강이겠구나.”

“그들이 나 같은 몸을 가지고 있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이런 무식한…!”

“흐흐흐. 너같이 비리비리한 녀석은 영원히 모를 거다.”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고 있을 때였다.

“대주께서 어쩐지 달라 보인다 했더니. 지난달보다 이두박근의 크기가 손가락 반 마디만큼 더 늘었군요.”

“으하하! 역시 각주님이라면 알아보실 줄 알았습니다!”

거암은 뛸 듯이 기뻐하며 양팔을 벌렸다.

“얼음덩이랑 노는 걸로는 몸도 제대로 안 풀리셨을 텐데. 어떻습니까? 같이 하시겠습니까?”

거암이 만서각의 앞마당을 가리켰다.

“헛둘, 헛둘!”

“웃차, 웃차!”

거한들이 밧줄로 어린아이만 한 바위를 허리에 매달고 달리고 있었다.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바닥이 매끈해졌다.

“외공 수련 또한 중요하지요. 기꺼이 동참하겠습니다.”

“주, 주군!”

유운이 빙그레 웃으며 겉옷을 벗었다.

“우와아아! 각주님이다!”

“며칠간 문밖으로 안 나오시더니, 깨달음이 정리되셨나 보지?”

“외부 사람들은 각주님 얼굴 한 번 보는 게 소원이라던데. 우하하, 우리는 마음껏 볼 수 있다고!”

흥분한 사내들이 떠들썩하게 소리를 질렀다.

“이놈들, 아직 목소리가 나오렷다? 설렁설렁했다는 말이로구나!”

“허업, 대주다!”

“젠장, 저 큰 덩치를 왜 못 봤지?”

“으하하, 이 머리 나쁘고 눈 나쁜 녀석들! 찐하게 한번 굴러보자꾸나!”

거암이 호쾌하게 웃으면서 소리쳤다.

“힘을 줄 때 내쉬고, 힘을 뺄 때 들이마시십시오.”

“각주님 말씀 들었지, 이놈들아?”

“으하하, 물론입니다.”

“하나! 둘!”

“여엉차! 여엉차!”

거암의 구호와 함께 다 같이 통나무를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아예 나무를 통째로 잘라 왔다고? 네놈이 제정신이냐!”

설영이 질린 얼굴로 거암에게 손가락질했다.

심지어 뒷산 나무도 아니고, 높고 두껍기로 소문난 창평산의 나무였다.

“당연하지. 이리저리 자른 꼬챙이 같은 걸로 우리 애들 근육에 부하가 걸리기나 할 거 같아?”

거암이 호탕하게 말하고는 다시 구령을 붙였다.

“뛰어!”

“우와아아아!”

유운을 포함하여, 십여 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나무를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남방 민족이라도 힘이 들지 않을 리 없다.

온몸에서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불평하는 자가 없었다.

“근육을 위하여!”

“근육! 근육!”

오히려 만족스럽게 웃으며 환호했다.

“으하하!

“이것이 사내지.”

“암, 그렇고말고!”

다 함께 나무를 든 채로 산등성이를 타고 달렸다.

“우와악!”

“어느 멍청이가 발을 헛디뎠느냐!”

“접니다!”

“잘했다, 가끔 구르는 연습도 해야지.”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우하하!”

대주와 대원들이 웃으면서 같이 땅을 뒹굴었다.

“미친놈들….”

설영이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얘들아, 가자!”

“와아아아!”

같이 달리고, 같이 뒹굴고, 같이 땀을 흘린다.

그곳에는 각주도, 대주도, 대원도 없었다.

오직 사내들의 우정만 있을 뿐이었다.

“후후후. 우리 좀 멋있지 않습니까?”

“크으! 말해 뭐 하겠어?”

“내 근육을 보면 마을 처자들이 다들 반할 거라고!”

서로의 몸을 뜨거운 눈으로 훑었다.

‘…아가씨들은 설 사부 같은 사내를 좋아하던데.’

유운은 차마 찬물을 붓지 못했다.

“으하하! 이거 불타오르는구먼!”

“가슴이 뛴다, 뛰어!”

“자, 숨 열 번 쉬었으면 되었다. 다시 쉬자!”

“가자, 가자!”

“우와아아아!”

구릿빛 말들이 다시 산등성이를 타고 올랐다.

그 모습은 의외의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저기 좀 봐요, 다들.”

“어머나, 남사스럽게 뭐 하는 짓이래요?”

“그렇게 말하려면 눈이나 제대로 가리던가.”

“호호호, 형님도 참. 아시면서.”

“돈도 벌고 눈도 호강하고. 좋네, 좋아!”

식사 준비하는 아낙네들은 연신 곁눈질하면서 얼굴에 부채질했다.

“저게 뭐가 좋아요? 힘들어 보이는데?”

옆에서 도우며 요리를 배우던 소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너도 나이 들면 알게 될 거란다, 호호호.”

“그럼. 설 사부처럼 잘생긴 것도 좋지만, 역시 사내는 힘이 좋아야….”

“형님도 참. 애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으세요.”

“이 입이 방정이야, 입이.”

아낙네들은 소곤거리며 깔깔거리고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치잇. 나만 안 끼워주고.”

소화는 입을 삐죽이며 몸을 돌렸다.

그 시각, 만서각 이 층.

장노 역시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리 함께 어울리니 참으로 보기 좋구나!”

본가에서는 은근히 따돌림당하여 어울릴 또래가 없었다.

그런데 뽕밭이 푸른 바다가 되듯, 하루아침에 세상이 변했다.

만서각 식구들뿐 아니라 바깥에서도 유운을 보고 싶다고 난리였다.

“공자님의 휴식을 방해할 수는 없지.”

서탁 위에는 서신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휴우. 문제는 사람이로구나. 객잔마다 바글거린다고 하니.”

만서각은 그 자체로 백리세가의 권역.

어지간한 무인이라도 감히 만서각에 오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반면 서촌은 그저 평범한 시골 마을이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공자님을 보길 바랄 줄이야.”

목을 빼고 유운을 기다리는 자들을 떠올리니, 저절로 가슴이 뿌듯해졌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간절한 자만이 우물을 찾는 법이지.”

장노는 바삐 손을 움직여 서재를 정리했다.

우수수…!

아예 포대를 가져와서 통째로 쓸어 넣을 때였다.

커다란 꾸러미 위에, 눈에 익은 표식이 보였다.

“이것은 백호방의 표식이 아닌가? 허어. 이것은 흑호방!”

백호문과 흑호방.

유운이 직접 중재한 문파들이 아니던가?

“이것만은 공자께서 직접 살피셔야겠구나!”

장노는 꾸러미를 챙긴 후, 다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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