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서촌에 부는 바람 (13)
유운이 점심을 먹고 산책을 다녀오니,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공자.”
금만보가 빙그레 웃더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금 대인 아니십니까? 제가 찾아뵙고 인사드리려 했는데 먼저 오셨군요.”
“공자님께서요?”
“이번에 정식으로 상단을 만드셨지 않습니까.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새로운 상단의 이름이?”
“운연상단이라고합니다.”
“운연이라. 어쩐지 울림이 좋은 단어로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상단을 꾸리느라 한창 바쁘실 텐데. 어인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상단이 생겼으니 마땅히 주인께 보고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인이라니요?”
유운이 고개를 갸웃하자, 금만보가 흠칫했다.
“커흠. 서, 서촌은 물론 인근 지방 모두 백리세가에 속한 땅이 아닙니까?”
“속한 땅이라니. 백리의 혈손으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말씀입니다.”
금만보의 표정이 어딘가 어색하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저희 운연상단의 사업 구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금만보가 진지한 표정으로 사업 내용을 설명했다.
“먼저 첫 번째는 주루, 숙박업입니다.”
“서촌에 새로 생긴 객잔과 주루의 절반은 운연 상단의 소유라 들었습니다. 적지 않은 자금이 소요되었을 터인데….”
“든든한 물주를 만나 돈 걱정은 덜었습니다. 게다가 비무 이후 서촌을 찾는 사람이 크게 늘었으니. 당분간 사업은 순항할 듯합니다.”
“다행이군요. 금 대인께 복된 인연이 이어진 듯합니다.”
‘그 복의 근원은 공자님이십니다!’
금만보는 속으로 말을 삼키고 어색하게 웃었다.
“둘째는 운송업입니다.”
“운송업이요?”
“지세를 살펴보니, 서촌 주변에 강이 많더군요.”
“강이라….”
“폭이 넓지는 않지만 깊어서 배를 대는 데 무리가 없고, 또한 조금만 내려가면 큰 강으로 이어지니. 상인으로서는 숨겨진 보석과 같습니다.”
“그리 말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빈말이 아닙니다. 천하에 물류만큼 규모가 큰 사업이 없으니. 제대로 터지기만 하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서촌에도 많은 일자리가 생길 것이고요.”
“하하하,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군요.”
“마지막은….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적절한 단어가 없군요.”
금만보가 한참을 고민했다.
“지난번 말씀하신 그 사업 말씀이십니까?”
“맞습니다. 공자님께서 도와주신 그 사업 말입니다.”
세가나 상단, 고위 관료들에게 회의 장소를 빌려주기도 하고, 갈등이 있는 가문을 중재하기도 하고, 특정 직업군들이 모이는 행사를 대신 개최해주기도 했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사업인지라. 일단 임시로 전시 사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업에 걸맞은 새로운 단어로군요.”
“아직은 탐색 단계이지만, 본 상단에서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금 대인이 하시는 일이니 어련하시겠습니까.”
금만보의 사업 보고는 점점 더 상세해졌다.
“이번 달 주루와 객잔 부지 및 건물 구입에 은화 이천 냥, 숙수와 점소이 등 인건비로 은화 오백 냥, 식재료로….”
유운은 고개를 다시 한번 갸웃했다.
‘지나치게 자세한데?’
조직 구조는 물론 각종 비용에 매출, 심지어 가장 내밀한 정보라는 순이익까지.
금만보는 모두 거리낌 없이 이야기했다.
‘장사해서 얼마 남는지는 자식에게도 안 알려준다 했거늘.’
상단의 주인만이 알 수 있는 기밀 정보였다.
“…본 상단의 상황은 이와 같습니다. 앞으로 서너 달에 한 번씩 와서 정기적으로 보고를….”
“아무리 본가의 영역이라고는 하나,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는지요?”
무인으로 치면 독문무공의 구결을 남에게 공개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신뢰하는 사이라고는 하나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그, 그것은….”
유운의 물음에 금만보의 말문이 막혔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꿀꺽.
금만보의 얼굴에 조금씩 식은땀이 흘렀다.
“먼저 공자님의 말씀에서 제가 사업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고….”
“과분한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금만보가 고개를 확 들면서 말했다.
“언젠가 큰일을 하실 분이니. 상업에도 눈을 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
백리세가의 후계 구도까지 염두에 둔 말.
이번에는 유운의 말문이 막혔다.
“상단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큰 조직을 거느리셔야 할 분입니다.”
“너무 나가신 말씀입니다.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부담되신다면 이 말은 일단 미뤄두겠습니다만. 어떤 경우든 상단을 통해 조직 경영을 배우시는 것은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저를 배려하시다니.”
유운의 얼굴에 따듯한 미소가 감돌았다.
‘큰 인물이 되라는 금 대인의 배려로구나!’
“감사합니다. 앞으로 옆에서 많이 배우겠습니다.”
“공자님에게만은 상단의 모든 문을 열어놓겠습니다. 공자님 것으로 생각하고, 언제든 묻고 분부하여 주십시오.”
“하하하,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크게 웃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창문 너머로 훈훈한 바람이 불어왔다.
* * *
다루의 꼭대기 층.
서촌의 강과 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임 소저, 이곳에서 보는 풍광이야말로 서촌의 명물이라 불린다오.
“아! 참으로 아름다운 마을이에요, 곽 공자님.”
“이 다루가 입소문을 타는 바람에 독실을 예약하는데 꽤나 고생을 하였다오.”
“저의 생일을 축하해주신다고 이리 고생하시다니.”
“임 소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소.”
“곽 공자님!”
“임 소저!”
젊은 사내와 여인이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딱 좋습니다, 딱 한 식경(밥 한 끼 먹을 시간), 아니 일다경(차 한 잔 마실 시간)만 그 자세를 유지해주십시오!”
중년의 화공이 크게 외치며 재빨리 손을 놀렸다.
스륵, 스륵.
붓이 움직일 때마다 화폭 위에 두 사람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힘들지 않소, 임 소저?”
“가장 행복한 시간을 남기는 일인 걸요. 무엇보다 공자와 함께라면….”
“임 소저!”
사내는 금방이라도 여인을 껴안을 듯 몸을 움찔거렸다.
“고객님,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화공의 다급한 목소리에 사내가 몸을 흠칫했다.
“밑그림은 그렸으니 채색은 나중에 하면 되고…, 자, 다음 장소로 이동하겠습니다!”
화공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은 서로 얼싸안았다.
서로를 마주 보며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그림 좋고! 여기서 한 장 더 하고 갈까요?”
“물론이오!”
“다만 추가금이 조금 붙을 텐데….”
“그까짓 돈, 얼마든지 주리다.”
화공이 손을 움직이니 또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이번에는 비무대입니다. 혈전과 화해가 이루어졌던 유명한 장소이지요. 이곳에서 추억을 남기시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사내는 한쪽 무릎을 꿇고 여인에게 꽃송이를 건넸다.
타오르는 불을 연상시키는 농염한 장미였다.
“임 소저, 이것이 나의 마음이오.”
“아…, 곽 공자님!”
“그림 좋고! 조금만 더!”
화공이 다시 한번 손을 놀렸다.
유운과 금만보는 멀리서 그 광경을 보았다.
“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공자님?”
금만보는 감탄하며 유운을 올려다보았다.
기존의 초상화나 풍경화와는 달랐다.
잊을 수 없는 인생의 한순간을 보는 기분이었다.
“모르셨습니까? 요즘 신선계에서 대유행입니다.”
“예?”
“도술로 ‘사진’이라 불리는 그림을 남기고는 한다는군요.”
“으하하! 천생 학사시로군요. 농에도 이리 격조가 느껴지니.”
농담에서조차 품위가 넘쳐나다니!
금만보는 감탄하며 크게 웃었다.
‘이거 사실을 말할 수도 없고.’
유운은 어색하게 마주 보며 웃었다.
- 쯧쯧. 선계의 최신유행이건만. 상인이라는 자가 어찌 모른단 말인가?
두루마리 속 매화검선이 투덜거렸다.
- 하선고가 사진 찍는 거 얼마나 좋아하는데.
들리지 않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보다 그림이 빨리 완성되는군요.”
“빨리 마르는 서역의 특수 물감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화공에게 약간의 수공(手功)까지 전수하였습니다. 확실히 손이 빨라지더군요.”
“잘하셨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서촌을 배경으로 여러 그림을 그린 후, 두 사람은 다시 다루로 돌아왔다.
“자, 여기서부터는 이 친구가 도움을 줄 것입니다.”
화공이 뒤로 물러나고, 비쩍 마른 학사가 앞으로 나섰다.
“잘 부탁드리오, 학사 양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객님.”
학사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붓을 들었다.
멋들어지게 그린 그림 위로 고풍스러운 글씨가 수 놓였다.
님을 향한 내 마음은.
한여름 바람보다 뜨겁고.
금강석보다 단단하니.
빛나는 이 마음을 임(林)에게 바치리라.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연가(戀歌)였다.
“아아…곽 공자님!”
“임 소저!”
여인이 격정을 참지 못하고 사내에게 안겼다.
두 사람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봉 학사의 얼굴에 윤기가 나는군요. 지난달 급료가 만족스러웠나 봅니다.”
“적지 않은, 아니 경력에 비하면 과한 급료였지요.”
“그럴만한 글솜씨와 멋진 필체를 가진 학사였습니다.”
“하하, 물론 그렇지요.”
말은 그리해도 유운의 속마음을 모를 리 없다.
‘낙방한 학사에까지 일자리를 만들어주시다니.’
과거에서 떨어진 학사만큼 쓸모없는 존재가 없다.
몸 쓰는 일도 못 하고, 그렇다고 사회생활을 해본 것도 아니니 말 그대로 식충이.
“크흐흑. 이, 이틀을 굶었는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처음 본 봉 학사는 해골처럼 말라 있었다.
‘구걸할 주변머리도 없는 자였으니. 공자님이 아니었으면 혼자 굶어 죽었겠지.’
과거에 떨어졌다고 능력이 부족한 자는 결코 아니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죽어라 일하겠습니다!”
성심껏 고객의 마음을 살피고, 최선을 다해 명문장을 뽑아내니.
모든 고객이 크게 만족하고 칭찬했다.
“자, 여기 있습니다!”
화공이 남녀에게 화첩을 건넸다.
“아, 아름다워요!”
“우리 두 사람만의 추억이 여기에 담겨있구려!”
생생한 그림과 적절한 문장을 보며 감탄했다.
당시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다시 느껴졌다.
“여기 있소, 화공 양반. 내 특별히 두 사람을 위해 사례금을 더 얹었소.”
사내가 화공에게 두툼한 주머니를 건넸다.
짤랑!
동전 부딪히는 소리가 맑고 고왔다.
“어이쿠, 감사합니다, 곽 공자님.”
“감사합니다, 고객님!”
화공과 학사는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배웅했다.
“허어. 딱 봐도 적지 않은 돈인데. 저리 쉽게 낸단 말입니까?”
들어가는 재료가 아무리 비싸봤자 결국 그림 몇 장과 글귀 몇 개다.
그런데 은전이 가득 든 주머니라니?
유운이 깜짝 놀라 물었다.
“저희가 파는 것은 종이나 그림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이야기이니까요.”
“과연! 큰 상인다우십니다.”
“모두 공자님이 알려주신 덕분이니.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