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서촌에 부는 바람 (14)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고객은 끊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사내 혼자로군요? 혼자서는 딱히 할 것도 없을 터인데….”
“하하하.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지켜보시면 재미있을 겁니다.”
금만보가 빙그레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아아. 나 홀로 이역만리, 머나먼 서촌까지 왔구나. 내가 돌아갈 곳은 어디인가.”
창백한 안색의 청년이 우울한 표정으로 되뇌었다.
스윽스윽.
청년이 탄식하는 사이. 화공은 바삐 손을 움직였다.
“장 소저. 나는 여기에 있거늘, 그대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오!”
사내는 기둥을 붙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스윽스윽.
그림 속에는 우수에 잠긴 미남자가 탄식하고 있었다.
“다들 내가 검처럼 차가운 사내라 오해하고는 하지. 하지만 나도 가끔은…. 눈물을 흘린다오!”
사내는 감정이 격해졌는지, 몸을 들썩였다.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얼굴선이 삐뚤빼뚤해져요!”
“허업! 알겠소, 내 숨도 쉬지 않으리다!”
사내는 목각인형처럼 그대로 멈춰 섰다.
“저분은 왜 혼자서 저러고 있는지요?”
유운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감성이랍니다, 감성.”
“감성이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저런 놀이가 유행이라고 합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이 있군요.”
“덕분에 저희가 돈을 벌잖습니까, 하하하.”
“하하하, 그렇군요.”
유운이 맑게 웃자, 금만보는 가슴이 뿌듯해졌다.
고객도 행복하고, 상단도 번창하고.
일자리가 늘어나니 젊은이들도 기뻐하고.
서촌에 돈이 흐르니 마을 사람들도 만족하고.
‘모두가 함께 기뻐한다라. 이것이야말로 공자께서 말씀하신 상도(商道)로구나!’
거기에 유운의 칭찬까지 받았다.
‘인생 살 맛나는구나!’
온몸에서 힘이 솟아나니, 밤새워 일해도 지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나저나…. 반가운 손님이 오셨군요.”
은밀하게 기운을 감추었으나 유운이 모를 리 없었다.
우우웅…!
나무가 뿌리를 뻗어가듯, 기의 실타래가 사방으로 뻗어가니.
반경 십 장 정도는 너끈히 감당하고도 남았다.
그럼에도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익숙한 기운이었기 때문이었다.
“주변의 이목을 피해 은밀하게 이동하였거늘. 대체 누가?”
“인맥도 상인의 중요한 자산이라 하셨지요? 금 대인께도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유운은 빙그레 웃으며 문을 열었다.
담백한 평상복을 입은 서문요란과, 흑의로 몸을 가린 동평이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언제 들어오시나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역시! 저희가 올 줄 알고 계셨군요.”
‘내가 뭐랬어요, 동 호위의 은신술도 소용없댔죠?’
‘전력을 다하면 가문 내에서도 알아볼 자가 없거늘. 유운 공자의 경지가 실로 놀랍군요!’
동평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유운을 바라보았다.
서문요란은 어쩐지 뿌듯한 기분이 들어서 살짝 미소 지었다.
“금 대인, 이분은 서문 세가의 소가주이신 요란 소저이십니다. 이쪽은 운연 상단의 금만보 대인이시고요.”
유운의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둘은 마주 보며 웃었다.
“새로운 상단 설립하셨다지요? 축하드려요, 금 단주님.”
“감사합니다. 모두 소가주님의 도움 덕분입니다.”
“두 분이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공자님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다행이군요. 뛰어난 두 분이 함께라면, 천하를 위해 큰일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중년 사내와 젊은 여인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고생하셨어요. 공자께 들킨 것은 아니겠죠?’
‘들킬 뻔했으나…. 다행히 잘 넘어갔습니다, 허허허.’
한때는 서로를 경계하던 사이였으나, 이제는 같은 편.
서로 마주 보며 따듯하게 미소 지었다.
잠시 차를 마시며 목을 축인 후, 대화가 이어졌다.
“제가 계속 설명해도 되겠습니까, 공자님?”
“서문 소저만 괜찮으시다면야.”
“저도 좋아요, 공자님.”
“그러면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사업은 임시로 ‘추억 만들기’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금만보가 신나서 설명하고, 유운은 진지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서문요란 역시 흐뭇한 표정으로 같이 들었다.
‘금 단주가 고생깨나 했겠군요.’
‘어떤 사업이든 초반에는 가시밭길이니까요. 밤새워서 일해도 부족했을 거예요.’
호위 동평의 속삭임에 서문요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쁜 그녀를 대신해서 열심히 일했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보니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호오. 그랬군요. 화공 어르신에게 그런 사연이….”
“벌어들인 돈으로 고아들에게 일자리와 교육을 제공한다라. 참으로 훌륭합니다, 금 대인.”
“말하지 않은 고객의 마음조차 헤아리다니. 역시 금 대인이십니다!”
유운은 연신 금만보를 칭찬했다.
그것도 진심을 듬뿍 담아서.
‘공자님 말씀대로야. 금 단주가 잘 해내긴 했어.’
지분 역시 동등하니, 사업이 잘될수록 그녀도 이득이었다.
그녀 또한 기뻐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왜 이리 가슴이 허전하지?’
동생이 태어나서 부모의 관심을 빼앗긴 아이가 된 것만 같았다.
‘요란아, 요란아. 이 무슨 유치한 생각이니? 네가 일곱 살 소녀도 아니고.’
스스로 타일러보았지만, 흐뭇하게 웃는 유운을 보니 가슴이 초조했다.
‘사실 제가 한 일이 훨씬 더 커요, 공자님!’
서문요란은 금방이라도 외치고 싶었다.
유운이 잘되는 꼴을 흑산조가가 보고만 있을 리가 있겠는가?
바람잡이들을 고용하여 유운을 흠집 내는 정도는 양반.
무뢰배들을 동원하여 상단의 물품 하역을 막기도 했고, 거래처 상인들을 협박하여 물건 공급을 끊으려고 하기도 했다.
“놈들의 방식이 너무나 치졸하고, 더럽습니다. 어찌할까요, 소가주님?”
“서문가의 시조께서 하신 말씀 잊으셨나요? 선에는 선으로, 악에는 악으로.”
“……!”
“들은 대로 시행하세요.”
“존명!”
역소문, 중상모략…. 심지어 무력까지!
서문요란은 은밀하게, 그러나 냉혹하게 방해자들을 처리했다.
‘참으로 아쉽습니다, 소가주님. 공자님께 저희가 한 일을 자랑할 수도 없고.’
‘누가 알아주길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에요, 동 호위.’
금만보가 빛이라면 서문요란은 어둠.
그리고 유운은 고고한 학과 같은 사내였다.
‘휴우. 저토록 맑은 사내에게 어찌 이런 이야기를 하겠어요.’
그리 말하면서도 내심 섭섭했다.
그래서일까? 칭찬받는 금만보가 어쩐지 얄미워 보였다.
‘그러고 보니 공자와 함께하는 시간도 나보다 훨씬 더 길잖아?’
서문요란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유운과의 시간은 귀한 보물과 같다.
그러니 그녀가 무엇을 하든, 금만보도 이해해주리라.
서문요란은 그리 생각하며 환하게 웃었다.
“공자님께서 이토록 사업에 관심이 많으신지 몰랐어요. 새로운 사업까지 제안하실 정도라니.”
“저희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모두를 이롭게 하는 일입니다. 어찌 관심이 없겠습니까?”
부드럽지만 든든한 대답이었다.
‘확실히 내가 사람을 잘 봤어.’
서문요란은 속으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새로운 사업이니, 혹시 부족한 점이 있을지도 몰라요.”
“어떤 점이 말씀이십니까?”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죠.”
“무슨…. 허업!”
서문요란이 갑자기 유운의 손을 잡아끌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보드라운 손길에 유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서, 서문 소저? 이게 무슨…?”
유운보다 지켜보던 금만보가 더 당황했다.
“서류로 읽고, 눈으로 보는 것도 좋지만. 직접 체험하는 것만 하겠어요?”
“그, 그렇긴 합니다만.”
“오늘 하루, 같이 고객이 되어서 한번 돌아보는 게 어떨까요?”
내용은 질문이었지만, 답을 기다리지 않고 유운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나루터에서 바라본 풍광이 그리 뛰어나다면서요?”
“비무대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그림이 유행이래요.”
“시장통에서 자연스럽게 서로 마주 보는 그림도 인기래요.”
“이리로 가봐요. 아니 저리로!”
서문요란이 유운을 이끌고 거침없이 서촌을 누볐다.
금만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따르기만 했다.
그러다 뒤를 돌아보는 서문요란과 눈이 마주쳤다.
‘후후후…!’
얼굴 가득한 승리자의 미소.
그때야 금만보는 깨달았다.
‘당했구나! 공자를 빼앗겼어!’
자신도 모르게 주인공이 바뀌었다.
유운과 금만보가 아닌 유운과 서문요란으로.
“공자님, 저희 상단에 다른 사업도 있는데, 저와 같이 체험을 해보시는 게….”
금만보가 기회를 노려 입을 여는 순간.
와락!
“……!”
“……!”
서문요란이 냉큼 달려들어서 유운과 팔짱을 끼었다.
“서, 서문 소저! 나, 남녀가 유별한데 어찌….”
유운의 얼굴이 사과처럼 빨갛게 익어버렸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하지만 서문요란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이익! 서문 소저, 이건 반칙이오, 반칙!’
‘후후후…! 반칙이면 어때요?’
서문요란은 누가 뺏어가기라도 하듯 유운의 팔을 꼭 껴안았다.
상큼한 체향과 뭉클한 감각.
유운은 아예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이걸 따라 할 수 있겠어요? 없죠? 후후후.’
서문요란은 금만보를 보면서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는 절대 할 수 없는, 젊은 아가씨만의 특권이었다.
‘이이익! 나의 공자님을 빼앗아가다니!’
금만보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럴수록 서문요란은 바싹 유운 옆에 붙었다.
“공자님, 몸에 힘을 빼시지요. 자세가 너무 뻣뻣합니다.”
오죽하면 지켜보던 화공이 몰래 속삭일 정도였다.
“소, 소저. 소, 손을….”
서문요란에게는 유운의 떨리는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서문의 여식은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아!’
암사자처럼 위엄 넘치는 자세로 내려다보았다.
‘유운 공자만은 내어줄 수 없소!’
중년 사내의 눈동자 또한 이글이글 불타오른다.
둘은 같은 목적을 가진 동업자이자, 같은 편.
그렇다고 선의의 경쟁까지 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었다.
“오오오! 이토록 열정적인 광경이라니! 좋습니다, 좋아요!”
감정이 살아있는 풍경에 화공의 얼굴 역시 피었다.
“이 순간의 느낌을 놓칠 수는 없지!”
스윽스윽.
곧바로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선남선녀.
뜨거운 눈으로 그들을 응원하는 후원자까지.
‘참으로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닌가! 이건 대작이 될 거야!’
화공은 확신하며 신들린 듯 붓을 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