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59화 (36/114)

제59화

몰려드는 사람들 (1)

“떴다!”

“유운 공자가 떴다!”

누군가의 외침에, 다루에 죽치고 앉아있던 상인들이 벌떡 일어났다.

“저, 정말인가?”

“만서각을 나오셔서 지금 서촌을 시찰하고 계시다네!”

“이럴 때가 아니지. 서둘러야겠구만!”

상인들이 봇짐을 짊어지고 몸을 일으켰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백리세가 같은 명가의 후손을 언제 또 뵐 수 있단 말인가!”

“인생을 바꿀 기회야!”

부유한 상인도 있었으나 대부분 조그마한 상단의 주인이거나, 홀로 움직이는 젊은 상인이었다.

다들 부푼 꿈을 안고 서둘러 이동했다.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그전에도 뵐 기회는 많았지 않은가.”

“커험. 이 사람이! 그때와 지금이 같은가?”

“암, 상황이 다르지 않나. 상황이.”

끈 떨어진 연과 같았던 서너 달 전과는 달랐다.

옛말에 물 들어올 때 노를 젓는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물이 아니라 홍수가 쏟아지는 상황이었다.

바로 돈이라는 이름의 홍수가.

“본래 유서 깊은 명가의 후손 아니신가.”

“거기에 근래 무공으로 명성을 높이셨으니.”

“어디 무명(武名)뿐이겠는가? 천하에 협명(俠名)이 널리 퍼지고 있으니.”

“고고하고 맑은 이름이라. 당금 무림에 실로 보기 드문 일이지.”

상인들은 말조차 아끼며 서둘러 뛰었다.

“자네는 이번에 무엇을 제시할 생각인가?”

“만서각에 먹과 종이 같은 문방사우를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할 생각일세.”

뚱뚱한 중년인과 바짝 마른 중년인이 뛰면서 이야기했다.

“고작 그것으로 되겠나? 규모가 작아서 큰돈이 되지 않을 터인데.”

“쯧쯧. 생각이 그리 짧아서야. 서고를 새로 정비하고 있을 터이니, 먹이든 종이든 빨리 소모되지 않겠는가?”

“아하! 그만큼 만서각을 자주 찾을 핑계가 생기겠구먼.”

“그렇지. 다 그렇게 인연을 쌓아가는 거 아니겠나?”

“길게 보고 있구만.”

“유운 공자의 뒤에 누가 있는지 생각해보게.”

“만보지류, 아니 운연상단의 금만보 대인 아닌가?”

“부침이 심한 상계에서 오래도록 살아남은 상인일세. 그 금 대인이 작정하고 서촌에 자리 잡았으니, 앞으로 큰 사업 기회가 많을 걸세.”

“공자께서 서문과 이어졌다는 소문도 돌던데….”

“허어. 알만한 친구가 왜 그러나. 소문은 원래 한 다리 건널수록 과장되기 마련일세.”

“그렇고 보니 그렇구만.”

“암. 서문까지는 조금 과한 감이 있지.”

자신들이 상계의 미꾸라지이고, 금만보가 붕장어라면, 서문은 고래와 같은 존재.

서문에는 천하의 물류를 좌지우지하는 대형 상단이 즐비했다.

“이런 조그마한 저수지에서 어찌 고래가 놀 수 있겠나?”

“그렇지. 손익계산 확실한 것으로 유명한 가문이니. 근래 명성을 조금 떨친다 한들 이곳에 관심을 둘 리가 없….”

말을 나누던 두 상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저분은 서문가의 금지옥엽이 아니신가!”

“금안신녀!”

아무리 초라해도, 그녀가 찍은 품목은 항상 대박이 났으니.

황금의 눈을 가진 신녀!

상인이라면 남녀노소 모두 그녀를 존중하며 그리 불렀다.

“서문 소저께서 직접 서촌에 행차하시어 유운 공자와 이야기를 나누시다니.”

“설마. 새로운 투자 대상으로 유운 공자를…?”

다들 숨을 죽인 채 발걸음을 멈추었다.

천하의 명문인 백리와 서문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감히 누가 끼어들겠는가?

그들이 멈춘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사업 이야기를 나누는 것치고는 분위기가 어째….”

“자네 눈은 옹이구멍인가? 한창때의 남녀가 저리 바싹 붙어있는데 무슨 뜻이겠나?”

“우리는 아예 보이지도 않겠구만!”

여인이 사내를 손으로 잡아끌고, 때로는 팔짱까지 낀다.

상인들 중 뜨거운 청춘을 보내지 않은 자가 없다.

“허허, 좋을 때로구나.”

“좋은 인연을 망칠 수는 없는 법이지.”

늙은 상인은 선남선녀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젊은 상인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어설픈 욕심으로 귀인의 만남을 방해하는 바보가 될 수는 없지.’

‘두 사람의 평생 원수가 될지도 몰라.’

사업상 손해는 나중에 보상할 수 있지만, 상해버린 감정은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다.

모두 마른침만 삼키며 멀찌감치 구경할 때였다.

자신만만하게 떠들던 여인이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추었다.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주변을 보더니, 얼굴이 새빨개졌다.

사내에게 뭐라고 말하더니, 쌩하고 사라졌다.

‘서문과 얽혔다니. 공자의 몸값이 더욱 올라갔겠구나!’

‘경쟁이 더욱 치열하겠어!’

‘어떻게든 한 마디라도 건네야….’

사람들이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장애물은 아직 하나 더 남아있었다.

“저분은 금 대인이 아닌가?”

“중요한 사업을 논하시나 보네.”

금만보가 위엄 어린 눈으로 이쪽을 주시했다.

서늘한 눈길에 어린 의도는 분명했다.

‘섣불리 우리의 만남을 방해하는 자, 용서치 않을 것이오!’

파격적인 자금 규모에, 방대한 인원까지.

운연상단이 신생이라고 무시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더군다나 유운과의 친분도 두터웠으니. 서촌의 터줏대감이자 실세라고 할 수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금 대인만 떠나면!’

상인들은 출발선에 선 달리기 선수처럼 몸을 풀었다.

‘유운 공자와 연을 만들고 만다.’

‘큰물에서 놀 기회야!’

일촉즉발, 고요한 가운데.

눈을 빛내며 기회만 엿볼 때였다.

“와아아아!”

“소화는 정말 대단해!”

해맑은 아이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우리 앞에서는 고리눈을 뜨시던 촌장님께서도 공자님 앞에서는 쩔쩔매시던데?”

“하늘처럼 높은 명가의 후손이라, 귀한 분들도 뵙기 어렵대.”

“그런 유운 공자님을 매일 볼 수 있다고?”

“역시 소화야!”

한 소녀가 십여 명의 어린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후후후, 뭘 그런 것 가지고. 아무것도 아닌데 뭘.”

말과는 달리 소화의 어깨는 슬쩍 올라가 있었다.

“가까이서 보면 어때?”

“소문처럼 얼굴에서 빛이 나고 그래?”

“도술을 수행하시느라, 새벽이슬만 드신다던데?”

“하늘의 신선에게 배운다는 소문도 있던데. 정말이야?”

유운을 직접 보지 못한 아이들이 흥분해서 물었다.

“두어 달 만에 만서각의 모든 책을 머릿속에 다 넣으신 데다, 수십 년을 무공을 갈고 닦은 설 사부조차 무릎 꿇리시고, 닳고 닳은 상인의 속임수도 한눈에 꿰뚫어 보셨는데….”

신나게 자랑하다가, 뒤늦게 유운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오만함은 마음의 독이니, 응당 겸손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소화는 끝에 한마디 덧붙였다.

“…그렇긴 한데, 정말 평범하신 분이야.”

설명과 결론이 맞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개의치 않았다.

“우와아아!”

“진짜로 하늘이 내린 재능이 맞나봐!”

“무공도 엄청 나다며, 정말이야?”

“그럼, 너희도 알면 깜짝 놀랄걸? 한번은 말이야….”

‘목검으로 목각인형 십여 개를 날려버리신 이야기부터 할까, 집채만 한 바위를 들어 올리신 이야기를 할까?’

소화가 자신만만하게 유운의 무용담을 자랑하려 할 때였다.

“주먹질 한 번에 백 명이 하늘로 날아갔다면서?”

“맞아. 나도 들었어. 권풍이 어찌나 센지 옆 마을까지 날아갔대.”

“우와, 역시 공자님은 대단하구나!”

아이들이 감탄하면서 우러러보자, 소화는 움찔했다.

‘아, 아무리 공자님이라도 그 정도는 아닌데?’

소문이란 게 그렇다.

“왕 씨네 막내아들이 넘어졌다더라.”

입을 거칠 때마다 조금씩 살이 붙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머리가 부딪혀서 피가 철철 났다더라.”

“머리가 깨져서 생명이 위독하다더라.”

“천하의 의원이 다 달라붙었는데도, 죽었다더라.”

“장례식 날, 슬피 울며 나타난 젊은 여인이 수백이 넘는다더라.”

옮겨질 때마다 과장이 덧붙고는 했다. 유운의 소문 역시 마찬가지.

소화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지금은 아니자만, 금방 그런 경지에 오르실 텐데 뭐.’

“물론이지. 공자님이 손만 뻗으면 다 날아가.”

소화는 자신감 있게 미래의 유운을 당겨왔다.

“그뿐인 줄 알아? 공자께서 제자리에서 한 번 뛰시면….”

무려 한 장(삼 미터)을 뛰었다며 설 사부가 감탄한 이야기를 하려던 때였다.

“삼층 누각도 뛰어넘으신다던데?”

“겨우 그 정도가 아니야. 한 번에 산을 뛰어넘는다고 했어.”

“누구 말이 맞아, 소화야?”

아이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소화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산이지. 공자께서 백 장밖에 안 되는 동네 뒷산도 못 넘으실 거 같아?”

이왕 내친걸음이다. 소화는 화끈하게 선언했다.

“우와. 역시 공자님이야!”

“공자님도 대단하고, 소화도 대단해!”

아이들의 대화를 듣던 어른들은 피식 웃었다.

“백 장 높이를 한걸음에? 천하제일의 경공술을 가졌다는 운중문의 고수들조차 불가능할 터인데.”

“껄껄껄. 어린아이들이 아닌가. 자네가 이해하게.”

아이들이 들을까 속삭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을 아침저녁으로 볼 수 있다니. 부럽다.”

“나, 나도 시녀 할래!”

마을 제일의 부자였던 촌장의 딸이 말했다.

자신의 고급스러운 비단옷보다, 소화의 수수한 시녀 복이 더 갖고 싶었다.

“본가의 시녀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걸? 나름 까다로운 시험을 거쳐야 해.”

“그, 그렇겠지?”

소녀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릴 때였다.

“우리 집에 놀러 올래?”

“만서각에?”

소녀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만서각은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백리세가의 땅이었다.

“응. 거암 대주님도 내 친구라고 하면 들여보내 줄 거야.”

“진짜 진짜?”

소녀는 환한 얼굴로 소화의 옆에 바싹 붙었다.

“원하면 공자님이랑 이야기도 할 수 있을걸? 내 말은 다 들어주신다고.”

“흑흑, 고마워 소화야.”

“뭘 이런 걸로.”

“아니야. 내가 처음에 못되게 굴었잖아. 정말 미안해.”

“히히, 괜찮아.”

두 소녀가 사이좋게 손을 맞잡을 때였다.

“꼬맹이가 허풍이 심하구나. 어린 것이 싹수가 노래.”

지켜보던 상인 하나가 코웃음을 쳤다.

키가 크고 성마른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무슨 말이 그래요. 듣는 꼬맹이 기분 나쁘다고요.”

소화가 발끈해서 획 고개를 돌렸다.

“공자께서는 명망 높은 명가의 후손이시고, 협명을 널리 떨치신 무림의 명사이시다.”

키 큰 상인이 만서각을 우러러보며 두 손을 모았다.

“그런데 고작 평민 아이가 그런 분을 만나게 해주겠다 말겠다라니. 기가 찰 일이로구나.”

“아저씨가 몰라서 그래요. 공자님께서 저를 얼마나 아끼시는데.”

“끌끌. 어린 것이 벌써 사기꾼 기질이 보이는구나.”

소화가 억울하다는 듯 가슴을 칠 때였다.

“자네, 말이 너무 심하지 않나? 아직 어린아이이거늘.”

키 작고 동글동글한 얼굴을 가진 중년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아이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지 않나? 귀한 분을 모시는 아이일 수도 있으니….”

“흥. 옷은 허름하고, 배움은 빈약하니. 저런 하찮은 아이가 어찌 명가의 종복일 수 있겠는가?”

키 큰 상인은 멸시하는 눈으로 소화를 내려다보았다.

“휴우. 같은 말이라도 기분 좋게 할 수도 있지 않나. 굳이 그렇게 모질게 말하다니.”

“사기꾼의 종자는 어릴 때 뿌리를 뽑아야 하네.”

“후우. 옛말에 입이 화를 불러온다 했네. 자네는 언젠가 입으로 망할 걸세.”

키 작은 상인이 한숨을 쉬었다.

“쯧쯧. 사람 보는 눈이 그리 없어서야. 자네야말로 상인으로 대성하기는 글렀군.”

싸늘하게 말하더니 휙 돌아섰다.

사람을 보지 않고 거칠게 움직이다, 소화의 몸에 부딪혔다.

“아야얏!”

조그마한 소화가 튕겨 나갔다.

흙바닥을 구르며 옷이 더러워졌다.

“소화야, 괜찮아?”

“어떡해, 어떡해!”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갔다.

소화는 억지로 울음을 참고 소리 질렀다.

“두고 봐요. 공자님한테 일러서 아저씨 혼내줄 거예요.”

“끝까지 허풍은. 하여간 못 배운 애들이란.”

키 큰 상인은 혀를 차며 떠나갔다.

“어허. 그리 보지 않았거늘 저리 무도하다니. 상종 못 할 친구로구만.”

키 작은 상인은 혀를 차더니, 소화를 일으켜 세웠다.

“아이야, 괜찮으냐?”

“다치지는 않았어요. 뾰족한 돌멩이들은 지난번에 다 치웠거든요.”

“나는 네 마음을 묻는 것이다.”

소화가 아무리 당차다 해도 갓 열 살을 넘은 소녀다.

아이들 앞이라 간신히 참고 있을 뿐.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못됐어요, 진짜 못된 아저씨예요.”

“미리 막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자, 이거라도 먹으면서 기분 풀어라.”

키 작은 상인이 봇짐을 풀더니, 소화에게 분홍색 떡을 내밀었다.

“우와, 꿀떡이다!”

“냄새가…와, 너무 향기로워.”

“진짜 맛있겠다.”

아이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찹쌀을 곱게 갈아 꿀과 버무렸으니, 보기만 해도 달콤한 기분이 들었다.

“집사람이 챙겨준 간식이란다. 설탕이 아니라 진짜 꿀을 넣었지.”

“꿀꺽. 귀한 간식이네요. 이걸 저희가 먹어도 된다고요?”

이 와중에도 친구들까지 챙기다니?

상인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다 같이 먹거라.”

“히히히. 감사합니다.”

소화는 고개를 숙이더니 냉큼 꿀떡을 집어 들었다.

“아저씨는 공자님한테 특별히 잘 말씀드릴게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하하하, 말만 들어도 든든하구나.”

고작 아이가 무슨 힘이 있을까.

속으로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이리 걱정해주다니. 마음이 실로 어여쁘구나.’

상인은 껄껄 웃으며 소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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