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학사의 무공백과-60화 (37/114)

제60화

몰려드는 사람들 (2)

“공자님, 몰려든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저와 함께 마차로 가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금만보의 말에 유운이 군중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옷을 입은 채 여유를 부리는 상인도 있었으나, 초라한 행색으로 불안과 기대에 찬 눈길을 보내는 상인들이 훨씬 더 많았다.

“생업도 미루고 저를 보겠다고 기다리신 분들입니다. 이야기라도 들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지 않은 시간과 수고가 들 터인데….”

“그저 귀 기울여 듣는 것뿐입니다. 그게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허어. 과연 공자님이십니다.”

세상 어느 명문의 후손이 하찮은 상인 따위에게 신경을 쓰겠는가?

금만보는 유운의 겸손함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금만보가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진 후.

“갔다!”

“유운 공자 혼자야!”

“가자!”

상인들이 눈치를 보더니, 일제히 달려들었다.

우르르.

“저리 비켜, 내가 먼저야!”

“무슨 소리, 나부터라고!”

“으으… 여기 사람 있어요, 사람 있다고요!”

몰려드는 인파에 소화가 말려들었다.

소화가 기겁하여 소리를 질렀지만, 어른들의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쑤욱.

유운이 성큼 걸어오더니, 무 뽑듯 소화를 들어 올렸다.

“모두에게 기회를 드릴 테니, 서두르지 마십시오. 단, 사람을 밀치는 분에게는 기회가 없습니다!”

유운이 외치자, 그때서야 소동이 잦아들었다.

“다치지는 않았느냐, 소화야?”

“휴우. 밟힐 뻔했어요. 괜찮아요, 쌩쌩해요.”

소화가 안긴 채 팔을 둥둥 휘둘렀다.

‘어느새 키가 이렇게 커지셨담?’

원래도 유운이 팔 하나 정도 더 컸는데, 서너 달 사이에 한 뼘 이상 더 커졌다.

“다행이로구나.”

유운이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히히히. 높은 곳에 오니까 전망이 좋네요.”

소화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우와, 진짜였어!”

“공자님이 정말 소화를 아끼시나 봐.”

“정말일 줄 알았어, 소화는 거짓말을 못 하거든!”

아이들이 흥분해서 떠들어댔다.

상인들 역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아이가 대체 누구길래?”

“혹시 다른 백리의 후손이라도 되나?”

“흐음. 스승님께서는 거래 대상보다 주변인의 호감부터 얻으라고 하셨지. 좋다, 이제부터 나의 목표는…!”

의문과 호기심, 기대감으로 가득한 시선 사이.

불안해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서, 설마. 저 꼬맹이 말이 진짜였다고?’

키다리 상인이 입술을 씹을 때였다.

“넘어지지 않았다면서 옷이 왜 이리 더러워졌느냐?”

“흥흥흥!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에요. 무슨 일이 있었냐면요….”

소화가 유운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였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냐. 참으로 심성이 고약한 사람이로구나.”

유운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고, 공자님. 그게 공자님께서 아끼시는 아이인 줄도 모르고. 죄송합니다!”

키다리 상인이 쩔쩔매며 고개를 숙였다.

“모든 아이는 소중한 법이거늘. 어찌 사람에 따라 다르게 대한단 말입니까?”

유운의 태도는 보기 드물게 냉랭했다.

모르는 자도 화가 났음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적 대주에게 칼을 맞았을 때도 담담하게 미소 지으시던 분인데.”

“화를 전혀 안 내는 사람이 내니까 무섭구만.”

유운의 위엄에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키다리 상인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 그게. 죄, 죄송합니다. 사죄의 대가로 만서각에 바, 반년간 무료로 종이와 먹을 공급하도록 하겠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대신 이후로는 정상가격으로… 네, 네? 이런 좋은 거래를 마다하신다니요?”

“사람을 대하는 자세에서 사람을 알 수 있는 법입니다. 신뢰할 수 없는 상인과 어찌 거래할 수 있겠습니까?”

“시, 신뢰…!”

키다리 상인의 얼굴이 하얘졌다.

계약 실패나, 불리한 계약쯤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평판을 잃는다?

“마, 망했구나, 고작 아이 하나 때문에 망했어!”

상인으로서 이보다 더 큰 손해가 없다.

키다리 상인은 넋을 잃고 털썩 주저앉았다.

‘쯧쯧. 타고난 심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구나.’

이 일이 어찌 아이 때문이겠는가?

유운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귀인께서 소화를 챙겨주셨다 들었습니다.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귀인이라니요, 과분하신 말씀입니다.”

유운이 고개를 숙이자, 키 작은 상인이 황급히 두 손을 맞잡았다.

“소화한테 상냥하게 대해주었어요. 맛있는 꿀떡도 주셨구요, 히히!”

소화의 말에 유운의 눈매가 풀어졌다.

“귀인과 어찌 길바닥에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까? 제가 잘 아는 주루가 있으니, 괜찮으시다면 함께 가시지요.”

“어이쿠. 그래 주시면야 삼생의 영광이지요.”

두 사람은 함께 서가진미로 향했다.

“공자님께서 저리 특별 대우를 하시다니. 다른 상단에서도 눈여겨보겠구나!”

“우 씨에게 대운이 깃들었나 보이, 대운이!”

“어찌 운만이겠나. 평소부터 잘해왔으니 일이 풀린 게지.”

사람들은 부러워하면서 키 큰 상인을 바라보았다.

“쯧쯧. 저 친구는 앞으로 글렀구만.”

“일이 안 풀리는 사람 옆에 있으면 덩달아 안 풀리기 마련이지.”

“자리를 피해야겠구만. 같이 있다가 액운이 옮을지도 모르니.”

그의 곁을 피해서, 황급히 유운의 뒤를 쫓았다.

조그마한 소녀와 키다리 상인만이 남았다.

“히히히. 그러게 뭐랬어요. 공자님이 혼내줄 거라고 했죠?”

“너, 너 이 꼬맹이가!”

“베에에~쌤통!”

소화가 양 뺨에 손가락을 대고, 혀를 내밀었다.

“으아아! 나는 망했다, 망했어!”

텅 빈 거리.

키다리 상인의 울부짖음만이 울려 퍼졌다.

* * *

“혹시 이런 일이 있을까, 접객실을 비워놓았습니다. 편히 이야기 나누십시오, 공자님.”

주루 주인이 공손히 인사한 후, 직접 안내했다.

“긴한 이야기에 기름진 음식과 술은 방해가 될 터이니. 담백한 마른 음식과 차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갑작스레 찾아왔는데 이리 살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공자님 덕분에 손님이 몰려드니 저야 좋지요.”

정중한 태도, 정갈한 상차림.

커다란 현의 일급 객잔에서나 볼 법한 응대였다.

‘서촌에 인물이 몰린다더니. 과연 주루 주인조차 다르구나.’

키 작은 상인은 속으로 감탄했다.

주인이 나가고, 다탁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이리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근(牛筋)이라고 합니다, 공자님.”

“소의 힘줄이라. 한 번 들으면 잊기 어려운 이름이로군요.”

“선친께서 유연하면서도 질긴 상인이 되라며 지어주셨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믿음이 갑니다.”

유운의 부드러운 미소에, 우근은 가슴이 든든해졌다.

어찌 이름 때문이겠는가?

‘아이에게 간식이라도 더 사줘야겠구나.’

소화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런데 서촌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기 위함이지요.”

“마을 일이라면, 운연상단의 금 대인을 찾으심이 좋을 듯합니다. 제가 소개해드릴 터이니….”

“저는 서촌이 아니라 만서각을 찾아왔습니다.”

“……!”

우근이 간절한 눈으로 유운을 바라보았다.

예의가 바른 사람일수록 오히려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법.

유운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이 상인은 달랐다.

‘이것 또한 소화가 맺어준 인연이로구나.’

유운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각의 일은 온전히 저의 권한이니. 잘 찾아오셨습니다.”

뇌물이다 접대다 알선이다.

새로운 거래를 트는데 드는 수고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그런데 이리 쉽게 허락하다니?

“꼬마 아가씨 덕분이로군요. 두 분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하하하, 별말씀을. 그래, 우 대인께서는 어떤 물건을 취급하십니까?”

“선친의 뒤를 이어, 세가와 관청에서 주로 쓰는 물건을 납품하고 있습니다.”

“납품이라.”

“문방사우, 의복 같은 소모품부터 여인의 장신구는 물론 무인을 위한 무기류까지. 모두 가리지 않습니다.”

“무기류라. 혹시 수련 도구의 맞춤 제작도 가능합니까?”

“물론입니다. 경험 많은 장인을 여럿 알고 있습니다. 철제인형이든, 갑옷이든, 무게추든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마침 잘 되었군요. 그렇지 않아도 호각대원들을 위한 역기가 필요하던 차였습니다.”

근육 키우기는 거의 마무리되었다.

이제부터는 섬세하게 근육을 다듬고, 잘라내야 하니.

특별한 도구들이 필요했다.

“제식 의복도 가능합니까?”

“두말하면 서럽지요. 세가원들이 입는 의복이야말로 저희의 주력 품목이니까요.”

“말씀만 들어도 든든하군요. 그렇다면….”

호가대원을 위한 검은 무복, 주방일을 하는 아낙들을 위한 조리복, 책 정리 작업에 쓰이는 각종 문방사우까지.

유운은 그동안 아쉬웠던 부분을 모두 쏟아냈다.

“허어. 각 하나 규모라 양이 적으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크군요.”

“혹시 우 대인의 일에 방해가 된 것은 아닌지요?”

“상인이 일감을 마다할 리 있겠습니까? 저야 감사하지요.”

“대신 대금은 은전으로 즉시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액 현금으로요?”

우근은 귀를 의심했다.

기간이 한참 남은 어음을 주는 경우는 양반이다.

“공급이 모두 끝났으니 대금을 주셔야지요, 나으리.”

“감히 돈 이야기를 꺼내다니. 퉷, 천한 상인 녀석 같으니라고! 다음 달에 찾아오너라!”

“저희도 장인에게 대금을 주어야 하는데….”

“준다고 하지 않았더냐! 지금 우리 가문을 못 믿겠다는 말이냐?”

갖은 핑계를 대며 돈을 주지 않으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잘못된 선례를 남길 수는 없으니. 절반은 미리, 절반은 뒤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리 좋은 조건이라니. 그 이상 욕심을 내면 상인이 아니라 사기꾼일 것입니다.”

우근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어떤 것이든 좋습니다.”

설마 뒷돈을 달라는 것일까?

어쩐지 이 공자라면 그러지는 않을 것만 같았다.

“돈은 넉넉하게 드릴 터이니, 좋은 재료, 훌륭한 장인을 부탁드립니다.”

“물론입니다. 저야말로 원하던 일이었습니다.”

“또한 가능한 서촌의 사람을 쓰고, 서촌에서 만든 재료를 썼으면 합니다.”

“……!”

콩을 만지면 콩가루가 묻기 마련.

‘마을에도 적지 않은 돈이 흘러가겠구나!’

마지막까지 사람을 챙기는 모습에 우근은 또 한 번 감탄했다.

“무슨 말씀이신 줄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따로 긴히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지요.”

유운이 목소리를 낮추자, 우근도 덩달아 긴장했다.

‘설마 본가에 진상할 보물이라도 만들라는 건가?’

하지만 유운의 말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성현께서는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하셨지요.”

“……?”

“그리 믿고 살았지만, 세상에 나와보니 알겠더군요. 때로는 겉모습 역시 중요하다는 점을요.”

유운의 말에 우근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제가 너무 무심하였습니다. 소화의 옷이 너무 낡았더군요.”

무시당한 소화를 보니 가슴이 아팠다.

무심코 나의 생각을 내 사람들에게 강요한 것은 아닌가?

그들의 행복을 내가 꺾은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가장 귀한 옷감으로, 가장 예쁜 옷을 지어주십시오.”

“아무리 아끼신다 하여도 세가의 종복일진대. 괜찮으시겠습니까?”

“제가 받은 것이 훨씬 더 크니까요.”

유운은 빙그레 웃으며 품속 두루마리를 쓰다듬었다.

놀라운 인연은 모두 소화로부터 시작되었으니까.

“또한 장 노야를 위한 옷도 마련하여주십시오.”

어렸을 때는 몰랐다.

사랑도 관심도, 모두 당연하다는 듯 받았다.

“평생 받기만 했습니다. 한 번쯤 주는 기쁨을 누리고 싶군요.”

“세가의 늙은 종복까지 챙기시다니!”

“저에게는 가족과 같은, 아니 가족입니다. 각별히 신경 써주십시오.”

“상인 인생을 걸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근의 눈이 활활 타오르니, 꽤 괜찮은 선물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기대되는군요. 우 대인만 믿겠습니다.”

유운은 빙그레 웃었다.

벌써부터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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