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몰려드는 사람들 (3)
“내가 먼저일세,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온 기회인가?”
서가진미 앞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주인 왕포삼이 유운의 방을 오가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줄을 서시오, 줄을. 공자께서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는 만나지 않는다고 하셨소.”
“어이쿠. 여기까지 와서 얼굴도 못 뵐 수야 없지.”
“사람이 이리 많으니 정리는 해야지. 줄을 섭시다, 줄을!”
사람들은 차례로 유운과 면담을 하였다.
“대인께서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유운이 미소 지으며 중년 상인을 맞이했다.
부드러운 태도에, 상인의 경직되었던 입가가 풀어졌다.
“공자님, 저는 서촌에 잡화점을 내려고 합니다.”
“잡화점이요? 어떤 물건을 취급하시는지요?”
“그릇, 조리도구, 목탄, 땔감 등 민초들이 쓰는 소소한 물품들이지요.”
“서촌은 오일장만 기다려야 했던 작은 마을입니다. 장사가 되시겠습니까?”
“한참 전의 일 일 따름이지요. 지금의 서촌을 어찌 작은 마을이라 하겠습니까?”
호각대는 물론 화공, 학사, 예인에 각종 공사를 위한 인부들까지.
서촌은 돈과 사람을 끌어당기는 태풍의 핵이었다.
“물론 자리 잡은 상인이 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중년 상인이 눈치를 보며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엄연히 운연상단이 있거늘. 내가 무리한 제안을 한 건 아닐까?’
백리세가의 공자가 뒤를 봐준다는 소문이 파다한 신생 상단이었다.
혹시나 공자의 이익을 침해하여 밉보일까 걱정할 때였다.
“새로운 상점이라. 잘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더욱 편리해지겠군요.”
유운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쉽게 말입니까? 공자께서 운연상단의 금 대인과 연이 있다 들었사옵니다.”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의 먹이까지 다 먹어서는 안 되는 법이지요.”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중년 상인은 유운의 눈을 보며 감탄했다.
‘맑구나, 맑아!’
명문 세가일수록, 작은 이익 하나 놓치지 않는 법이거늘.
유운은 오직 민초들을 위해, 일면식도 없는 자신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고, 공자님. 감사합니다!”
중년 상인은 기뻐하며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렇게 하루종일 면담이 진행되었다.
모두가 기쁨의 탄성만 터트린 것은 아니었다.
“공자님, 저는 만서각에 문방사우를 공급하려고 합니다. 특히 자신 있는 물품이 붓이온데….”
젊은 상인이 품에서 붓 서너 자루를 꺼내서 탁자 위에 올렸다.
“붓털이 가느다랗고 기니. 세필(細筆)에 적합한 붓이로군요.”
“바로 보셨습니다. 양모(羊毛)로 만든 붓입니다.”
상인이 자랑스럽게 붓을 내밀었다.
유운은 꼼꼼하게 붓을 살피고는 한숨을 쉬었다.
‘우 대인이 납품하기로 한 우모필(羽毛筆)보다 질이 떨어지는구나.’
우근의 고급 붓은 물론, 기존에 쓰던 붓과도 큰 차이가 없는 양산품이었다.
“참으로 아쉽습니다. 붓촉이 조금 더 균일하고, 부드러웠으면 좋았을 것을.”
“아아…!”
유운이 부드럽게 돌려 말했지만, 상인 역시 알아들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고작 이런 붓으로 공자의 마음을 잡으려고 하다니.”
상인이 부끄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학사로서 유운의 명성은 본래부터 높았으니, 붓을 보는 눈이 낮을 리 없다.
“아닙니다, 이 붓은 속이 비어 가벼우니, 만서각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잘 쓰일 수 있을 것입니다.”
“본래 학인(學人)을 위해 만든 붓입니다. 마땅히 만서각주께 인정을 받아야지요.”
젊은 상인이 달아오른 얼굴로 유운을 본 후,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는 더 좋은 물품을 가져오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면박이나 모욕을 받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격려받을 줄이야.
젊은 상인은 감격하여 눈물을 글썽였다.
‘내 기필코 훌륭한 물건을 가지고 오리라!’
그리고 이 이야기를 고스란히 전하니.
“유운 공자께서는 부족한 사람조차 내치지 않으시는구나!”
“듣고 또 들어도 흐뭇한 이야기들뿐일세, 그려!”
그저 무공이 뛰어나서만은 아니었다.
바로 청명(淸名)!
깨끗하고 맑은 이름이었으니.
서촌은 물론 인근의 여러 현에서 유운을 칭송했다.
하지만 좋은 일에는 항상 마가 끼는 법.
모두가 유운을 좋아하지만은 않았다.
* * *
흑산조가의 군사부.
쾅!
백리오혁이 탁자를 내리쳤다.
“소식을 들으셨소? 맑고 깨끗한 이름이라니? 유운, 그놈이 더러운 수작을 부린 것이 분명하오!”
유운의 명성이 사방에 울려 퍼지니.
백리오혁은 질투심에 뱃속이 뒤틀려 죽을 것만 같았다.
“해원검이라니! 나도 아직 얻지 못한 별호이거늘…. 이보시오, 손 군사. 내 말 듣고 있소?”
백리오혁이 눈앞의 사내에게 소리쳤다.
하얗게 분칠한 얼굴, 멋들어진 학창의, 손에서 놓지 않는 쥘부채.
흑산조가의 군사, 손사문이었다.
“보이십니까, 이 자죽철접선의 고운 자태가? 어렵게 구한 귀한 물건이랍니다.”
촤락.
손사문은 대답하기는커녕 부채를 활짝 펼쳤다.
옻칠한 대나무 사이로 새하얀 학이 날개를 펼쳤다.
‘사내자식이 분칠도 모자라 여인용 부채까지? 미친놈.’
백리오혁은 속으로 욕하면서도 겉으로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손 군사의 풍모에 참으로 잘 어울리오. 어디서 구하셨소?”
백리세가이긴 하나 자신은 수십 명의 손자, 손녀 중 하나.
하지만 상대는 흑산조가주의 총애를 받는 군사였다.
“동방이 아니면 어디서 이런 물건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동방이라니, 엄청난 보물이겠구려!”
백리오혁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부채를 다시 살폈다.
동방은 수려한 산세와 신비로운 영물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동쪽에는 신선들이 노닌다’하여 동천(東天)이라 불릴 정도였다.
“영물의 힘이 깃들어있으니.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지요.”
“참으로 부럽소, 그런데 손 군사.”
아부도 잠시, 백리오혁은 초조한 마음에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손사문은 눈살을 찌푸리며 슬쩍 뒤로 물러섰다.
오물 덩어리 취급하니 기분이 좋을 리 있겠는가?
하지만 감히 탓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았다.
“손 군사가 분명 녀석을 가문에서 쫓아낼 수 있다 하지 않았소?”
은근슬쩍 자신을 탓하는 말에 손사문의 부채를 ‘탁’ 쳤다.
“제가 알려준 계책대로 했으면 그리되었겠지요.”
“커험. 아무리 그래도 천한 낭인 나부랭이한테 귀한 영약을 다 내어줄 수는 없지 않소.”
본래 손사문이 건네준 만년화리의 내단은 엄지손가락 크기였다.
그런데 백리오혁은 그중 대부분을 자기가 먹고, 손톱만 한 크기만 넘긴 것이다.
“적랑쌍도가 내단을 다 먹었으면, 비무에서 졌을 리가 없습니다.”
“크흠. 이미 지난 일을 따져 무엇하겠소.”
자신을 탓하는 말에 백리오혁은 헛기침을 했다.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소? 한 번만 더 도와주시오, 손 군사.”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툭.
손사문이 품에서 노란 비단 주머니를 꺼내더니 탁자 위에 던졌다.
“이것이 무엇이오?”
백리오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무식해도 이리 무식할 수가.’
손사문은 속으로 짜증을 냈다.
전 무림이 셋으로 갈라져 싸우던 옛날,
맹주의 위를 놓고 세 영웅이 싸우는 이야기, 삼맹분천(三盟分天)!
노란 비단 주머니는 그중 한 군사의 계책 주머니로 유명했다.
‘무가의 어린아이조차 읽는 필독서이거늘, 백리세가의 적통이 이조차 모른다니!’
흑산조가의 피가 섞이지만 않았어도 진즉 내쳤을 터였다.
“직접적인 무력이 통하지 않았으니, 다음은 무엇이겠습니까?”
“…더 강한 무력?”
백리오혁이 머뭇거리며 대답하자, 손사문이 한숨을 쉬었다.
“보통은 반대인 계략을 생각하지요.”
“계략이라.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오?”
“지금 유운 공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무공?”
“약관도 되기 전에 적랑쌍도를 꺾은 자가 무공이 부족하겠습니까?”
손사문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부하? 권력? 명성?”
“휴우.”
“…여자?”
‘후계를 노리는 자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막말을 하다니.’
손사문은 어이없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돈입니다.”
“……!”
“세력을 만드는데도, 명성을 얻는데도 모두 돈이 필요하지요.”
“혹시 돈으로 놈을 밀어버리라는 거요? 으하하! 잘 생각하셨소.”
백리오혁이 환하게 웃었다.
병기. 마수. 폭약.
흉악한 물건일수록 큰돈이 되고, 흑산은 그 분야의 최고였다.
흑산조가의 재력이면 서촌 따위는 순식간에 몰락할 터였다.
‘가주께서 너 따위한테 더 투자하실 리가 있겠느냐?’
손사문은 한심하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백리오혁은 흑산조가가 가진 수많은 비단 주머니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번엔 조금 다릅니다. 힘으로 미는 것이 아니라, 당기는 방법, 즉 유혹이지요.”
“무슨 뜻이오? 인근에 기루라도 세우자는 뜻이오? 그리해서 어느 세월에?”
백리오혁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손사문은 더 말하기도 귀찮은지 턱짓으로 비단 주머니를 가리켰다.
“일단 읽어보십시오.”
“그냥 내게 돈을 주면 될 것을….”
백리오혁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내용을 읽었다.
그런데 읽을수록 그의 얼굴이 풀렸다.
“진짜 이리 큰돈을 벌 수 있단 말이오?”
“휴우. 계책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계책. 즉 가짜이지요.”
손사문이 짜증 섞인 한숨을 쉬었다.
“허나 이대로라면 정말 큰돈을….”
탁!
손사문이 부채를 치자, 백리오혁이 움찔했다.
마지못해서 다시 내용을 읽더니, 얼굴이 환해졌다.
“으하하, 이거 정말 그럴듯하구려!”
백리오혁이 기분 좋은 듯 크게 웃었다.
자신도 깜빡 속을 정도다. 유운 같은 서생이 이 뒤에 숨은 함정을 알아챌 수 있을 리 없다.
손사문이 더 말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털었다.
파리를 쫓는듯한 모욕적인 태도였지만, 백리오혁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유운, 네 이놈! 이건 걸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하하!”
백리오혁은 활짝 핀 얼굴로 흑산조가를 나갔다.
“이제 귀찮게 하지 않겠지.”
후르릅.
손사문은 느긋하게 부채질을 하며 차를 들이켰다.
“인간의 욕심을 이용하는 계책이라. 헤헤, 과연 군사님이십니다.”
뒤에서 지켜보던 부하가 간사하게 웃으며 손을 비볐다.
“겉으로 군자니 뭐니 해도, 사람 속은 다 똑같지.”
“그렇습지요. 돈 이기는 사람 못 봤습니다.”
돈이 안 통한다면, 그것은 금액이 적어서였다.
어떤 문제든 돈이면 해결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혹시 이 계책이 안 통하면 어찌하시겠습니까?”
“흐음. 무력도 안 통하고, 돈까지 마다하는 자라.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손사문이 갸웃하며 탁자 위로 손을 뻗었다.
무(武). 재(財). 병(兵). 모(謨). 권(權)….
탁자 위에는 글자가 새겨진 패가 가득했다.
“흐음. 예측할 수 없는 자는 좋지 않지. 본가의 위험 요소라는 뜻인데….”
딸깍.
손사문은 그중 한 개의 패를 쓰러뜨렸다.
“그렇다면 더 크기 전에 짓밟아버려야지. 흑산의 진짜 힘으로 말이야.”
손사문은 서늘한 웃음을 지으며 부채질을 했다.
때아닌 한기에 부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