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몰려드는 사람들 (4)
유운을 찾는 사람은 끊이질 않으니, 서가진미는 발 디딜 틈도 없었다.
‘고작 운좋은 어린아이일뿐이거늘. 다늘 눈이 삐었군.’
통통한 중년 상인이 속으로 비웃었다.
쥐를 닮은 세모꼴 얼굴에, 고양이같은 수염.
백리오혁의 특명을 받은 상인, 탁흠이었다.
‘명문가에서 곱게 자라다가, 이제 막 성공의 맛을 보았으니, 그 맛이 참으로 달겠지. 그런 애송이를 유혹하라고? 흐흐,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지.’
탁흠은 백리오혁에게 받을 보상을 생각하며 음흉하게 웃었다.
반나절을 기다려서야 유운을 볼 수 있었다.
“탁흠이라고 하옵니다. 대 백리세가의 혈손을 뵙게 되어 삼생의 영광이옵니다!”
탁흠은 들어오자마자 넙죽 엎드렸다.
표정은 엄숙하고, 자세는 정중하니.
마치 맹주를 뵙는듯한 태도였다.
“과한 말씀이십니다. 예를 거두어주십시오.”
“아닙니다. 서촌 전체가 만서각에 봉해진 영토가 아닙니까? 그러니 공자야말로 이 땅의 주인이시지요. 공자님의 덕이 사방에 미치니….”
상인 탁흠은 뜨거운 목소리로 외친 후, 듣기 좋은 말을 들어놓았다.
하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약관도 되지 않은 꼬맹이가 그리 큰 명성을 누리다니!’
밑바닥을 전전하던 자신과 비교하니, 더욱 억울하고 분했다.
하지만 돈은 어리석은 주인을 버리고, 똑똑한 주인만을 찾는 요물이니.
‘흐흐, 잘만 구슬린다면 큰돈이 되겠구나!’
물정 모르는 백면서생쯤이야.
탁흠은 속마음을 숨긴 채 부지런히 눈알을 굴렸다.
“…그리하여 제가 공자님께 큰 이익을 가져다줄 제안을 가지고 왔습니다.”
“저의 이익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두를 위한 일이라면 듣겠습니다.”
“바로 그 모두를 위한 일입니다.”
탁흠이 재빨리 지도를 탁자 위에 올린 후, 서촌과 청수현을 가르는 커다란 강을 가리켰다.
“이곳은 엽하(葉河)가 아닙니까?”
가을이면 붉은 낙엽으로 가득하다 해서 붙은 이름이었다.
“그렇습니다. 이름도, 풍경도 모두 아름답기는 합니다만….”
탁흠이 못마땅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촌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지요.”
“굽이진 물줄기 때문에 사람이 오고 가기가 쉽지 않기는 하지요.”
“핵심을 바로 짚으시다니! 과연 명가의 자손이십니다. 여기 북쪽을 보십시오.”
“청수향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인근에서 가장 큰 성읍이지요. 예로부터 사람과 물자가 통해야 돈이 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교통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역시 이해가 빠르십니다. 아이가 어찌 홀로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끌어주는 어른이 있어야지요.”
“설마 강에 다리라도 놓자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탁흠의 말에 유운은 고민에 빠졌다.
‘틀린 말은 아니지. 백호와 흑호라는 커다란 문파 둘을 품을 정도이니….’
청수현은 사람도 물자도 풍부한 땅이다.
서촌과 이어질 때 얻는 이득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클 터였다.
‘하나 모두 내 생각과 같지는 않겠지.’
서촌이 시골을 벗어나서 커다란 성읍이 되는 일이다.
마을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리라 생각할 때였다.
“청수현은 백리세가의 영역 바로 바깥! 외부로 가문의 힘을 뻗는 일이니, 분명 본가에서도 높이 평가할 것입니다.”
은밀한 목소리로 유운을 구슬리기도 했다.
“쉽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사람도 재물도 적지 않게 소요될 것입니다. 신중하게 검토해야….”
“허어. 재물이라. 이름 높은 해원검께서, 고작 재물 따위에 얽매이신단 말입니까?”
“……!”
탁흠이 목소리를 높이며, 교묘하게 유운을 자극했다.
“돈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리에 통행세를 부과하는 것만으로 막대한 돈을 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탁흠이 강 양쪽의 땅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흐흐흐. 진짜는 바로 땅이지요.”
“……?”
“사람이, 물자가 이 다리를 통해서 오고 가니, 주변 땅의 값어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금싸라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돈은….”
탁흠이 두 손을 비비며 은근히 다가왔다.
“모두 공자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본가의 재산이 아니라, 유운 개인의 재산이 될 것이라는 암시였다.
“그 수익은 엄청날 터. 고작 주루 건물 따위는 수십 개를 사고도 남는….”
그 땅 대부분은 서촌에 살아온 백성들의 논과 밭이다.
하지만 탁흠은 이미 제 것인 양 마음대로 주루와 객잔을 짓고 있었다.
‘이런 사람이 진짜로 있을 줄이야.’
유운은 속으로 탄식했다.
상업사(商業史)라는 읽으며 가끔 대체 어떤 못된 사람이 이런 못된 생각을 할까, 생각했었는데.
바로 눈앞에 있었다.
“허나, 그 땅에는 모두 주인이 있지 않습니까.”
“그거야 돈을 물려주면 될 일이지요.”
“자손 대대로 지켜온 논과 밭이니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무지렁이들이 어찌 공자의 명을 거역하겠습니까? 뒷말이 두려우시면 은전 몇 개 던져주시면 될 일입니다.”
“그래, 얼마를 주어야겠습니까?”
“은전 다섯 냥에서 열 냥…. 아니 석 냥이면 충분하지요.”
“방금 전까지 이 땅의 가치가 스무 냥짜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개발만 잘하면 백 냥은 그냥 넘을 겁니다. 그러니 공자께서는 엄청난 돈을 버시게 될 겁니다. 적어도 서른세 배! 아니, 상황에 따라 백 배도 가능합니다!”
잔뜩 흥분해서 말하는 탁흠의 머릿속에, 백성 따위는 눈곱만큼도 들어있지 않았다.
유운은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잇지 못했다.
“혹여 뒷말이 두려우십니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땅을 팔 능력도 없는 무지렁이들입니다. 공자님 덕분에 석 냥이나 벌었으니,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탁흠은 이미 계획이 성사된 양, 자신만만했다.
탁!
유운이 손바닥으로 책상을 쳤다.
“듣고 보니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로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밀고 도박장을 지으면 훨씬 더 큰 수익이 날 겁니다. 이로써 후계 경쟁에서 크게 앞서가는….”
“남의 땅을 제 마음대로 헐값에 팔아놓고 돈을 벌어다 주었다라. 상인이 아니라 도적의 논리가 아닙니까?”
“그렇습….네?”
신나게 돈 계산을 하던 탁흠이 화들짝 놀랐다.
“말씀하시는 동안, 가져오신 서류를 읽어보았습니다.”
지도 옆에는 종이 더미가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계획은 이미 다 준비되었다며, 수결만 하시라고 큰소리치던 바로 그 서류였다.
멈칫했던 탁흠은 이내 빙그레 웃었다.
‘오라, 내 기를 죽여서 자기 몫을 더 키우겠다? 흥, 보기보다 제법이군. 그렇다고 내 몫을 줄 수는 없으니. 땅을 좀 더 뺏어야겠구나.’
탁흠은 자신만만하게 서류를 가리켰다.
“크흠. 자세히 살펴보셔도 됩니다. 물론 이해하기 쉽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서류는 상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전문 용어로 가득했다.
어떻게 용어를 이해한다 해도, 내용은 더욱 복잡했다.
‘크크크. 꼬고 꼬았으니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할 것이다.’
얼핏 보면 유운에게 유리해 보이나, 실상은 달랐다.
교묘한 말로 사고 책임이나 재고 위험을 유운에게 모두 떠넘겼다.
“계약의 구조가 상당히 복잡하군요. 굳이 이런 어려운 용어를 사용해야 하는지….”
“상계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양식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탁흠이 냉큼 말을 끊었다.
‘곧 죽어도 모른다는 소리는 안 하는구나.’
명문은 자존심 빼면 시체다.
여기서 적당히 체면을 세워주고 아부만 잘한다면….
“고귀하신 명가의 후손께서 하찮은 종이 쪼가리를 살피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만 믿으십시오. 공자께서 그저 수결만 해주시면 됩니다!”
‘얼른 써, 네가 쓰기만 하면 나는 대박이 나는 거야!’
탁흠은 흥분해서 외쳤다.
자재, 인력, 땅 등 온갖 곳에서 남겨 먹을 수 있으니.
토목공사야말로 진짜 금덩어리였다.
“성현께서 말씀하시길, 올곧은 말일수록 쉬운 말로 전하라 하였습니다.”
유운의 말에 탁흠은 멈칫했다.
“옛 말씀이 어찌 상업에 적용되겠습니까? 용어가 어려우셔서 오해하셨나 본데….”
“공동으로 사업을 진행한다고 명시해놓고, 정작 모든 위험은 만서각이 부담한다라. 저로서는 쉬이 납득하기 어렵군요.”
“그, 그것은….”
“게다가 자재, 인력의 선정 등의 모든 권한은 대인께서 가지고 본 각은 그저 돈만 내면서 감사할 권한조차 없으니. 어찌 상식적인 공사 제안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제가 공자를 속이기라도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속내가 드러난 탁흠이 오히려 벌컥 화를 냈다.
“고작 작은 명성을 등에 업고 이리 사람을 무시하다니. 해원검이라는 이름은 허명에 불과하였구려!”
인상을 찡그리며 말투조차 바뀌었다.
‘음식 냄새가 풍기면 파리가 꼬인다더니.’
유운이 그 얄팍한 속내를 모를 리가 없다.
“서촌에 대운이 깃들었다 들었는데 모두 거짓이었어. 세상에 이를 널리 알려야겠구나!”
“……!”
“크흠. 사람 셋이 모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내는 법이지.”
탁흠이 철푸덕 자리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제 뜻대로 안 되면, 밥 위에 잿가루라도 뿌리겠다는 심산이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로구나.’
본래 설득하거나, 운연상단의 도움을 받으려 하였으나, 생각이 바뀌었다.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크흠. 그걸 이제야 안 게요? 훌륭한 제안이니 다시 생각을….”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침 이런 일에 능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전문가요. 다른 사람은 필요가….”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서문세가의 금지옥엽이신….”
“서, 서문? 서, 설마!”
“자세한 검토는 서문 소저를 통해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그, 그 서문요란 말씀이시오? 아, 아니 되오. 아니 돼!”
탁흠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손을 내저었다.
고고하고 도도한 외모만 본 이들은, 그녀의 본 모습을 모른다.
“네가 감히 서문을 상대로 사기를 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상계를 어지럽힌 악덕 상인을 쥐잡듯 잡았다.
먼발치서 보았음에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그, 그 여자는 안돼! 맹수라고!’
사람을 내려다보는 차가운 눈.
어지간한 대상인도 감히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헤헤헤. 생각해보니 제 조건이 조금 과했던 것 같습니다. 약간의 조정을….”
탁흠이 손을 비빌 때였다.
“이보게, 거기 사람 없는가?”
“부르셨습니까, 공자님.”
“주인장이 직접 오셨구려. 이걸 서문 소저에게 보내줄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지급(至急)으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돌아가는 꼴을 짐작하고 있던 참이다.
서가진미의 주인이 냉큼 서류 더미를 받아들더니,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고, 공자! 아, 아니 되오!”
탁흠이 손을 뻗었으나,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서문 소저께서 공정하게 판단해주실 겁니다.”
“고, 공정…!”
탁흠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상인이라면 서문이 말하는 ‘공정’이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다.
“참, 소식 들으셨습니까? 서문 소저께서 이번에 상련(商聯)에서 상인들의 부정부패를 조사하는 감사관을 맡기로 하셨다더군요.”
“가, 감사관! 아악, 갑자기 머리가…!”
탁흠이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졌다.
하지만 몰래 실눈을 뜨고 눈치를 살피다, 유운과 눈이 딱 마주쳤다.
“갑자기 쓰러지신 것 치고는 정신이 명료하시군요. 몸 안의 기운도 평온하고요.”
“고, 공자! 그것이 아니오라. 사, 살려주십시오! 재물이라면 얼마든지….”
“신상필벌이라 하였습니다. 서문 소저께서 잘 판단하실 겁니다.”
공을 세운 자에게는 상을, 해를 끼친 자에게는 벌을.
유운의 단호한 말에 탁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